가난한 사람의 생명은 쓰리고 슬플 때가 있다
우체국에 공과금을 내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시장 길목을 거쳐오는데, 방앗간과 두부공장 앞길에 참새 몇마리가 부지런히 모이를 찾는다. 오랜만에 집 텃새 참새들을 도심에서 보게 되니 반가웠다. 내가 소년기 땐, 참새들이 떼지어 날아다녔고 기와집 지붕의 기와골마다 손 넣어 알을 꺼내면 참새 알 두어 개는 언제나 꺼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참새를 보니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는 바 되지 아니하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도 귀하니라.”(마 10:29, 눅12:6-7)
앗사리온은 로마 통치하 화폐단위 동전의 명칭인데 얼마나의 액수일까? 궁금하여 최근 번역되어 출판된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2009)를 뒤져보았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라고 한다. 예수님 시대 유대 시골사회에서 4인 가족의 일년 최저 생계비는 250-300 데나리온 정도였는데, 이 액수는 날품팔이 한 사람이 축제일이나 공친날을 제외하고 규칙적으로 일거리를 얻었을 경우 1년 수입 총액이다. 예수님의 ‘포도원의 품꾼비유’(마20:1-16)에도 포도원주인이 품꿈들에게 약속한 하루임금이 1데나리온이라고 되어있다. 1앗사리온은 1데나리온의 16분지1의 화폐가치에 해당하는 엽전이었다.
현재 지구촌 전체를 놓고 볼때, 1달러로 4인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수도 수억 명이 된다. 아프리카나 제3세계 빈곤국가 날품팔이 가장이 하루버는 돈이 요즘 미화단위로 10달러 정도라고 어림짐작할 때, 요즘화폐가치로 1데나리온은 미화 10달러요, 한국화폐로는 15,000 원이고, 1앗사리온은 100원쯤 된다. 한국의 장날 좌판에 벌려놓고 파는 번데가 한봉지에 500원하듯이,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 즉 우리 돈 200원에 팔리면서 서민들의 영양보충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로마화폐 이야기를 꺼낸 진짜 나의 속셈은, 위에 인용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말씀 하시던 적나라한 ‘삶의 현장’을 감성적으로 실감나게 느껴보기 위해서다. 당시 사회의 맨 밑바닥에 몰린 극빈층 사람들은 두 앗사리온에 팔려가는 참새 다섯 마리 신세처럼 자신의 처지를 처량하게 느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나 긍지나 삶의 보람이나 기쁨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날품팔이 일꾼이 예루살렘 거리에만도 차고 넘쳤으며,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 시각까지 과수원 품꾼을 구하는 손길을 기다려도 공치는 날이 많았다.
차라리 아예 노예 신분으로서 자기를 팔아버린다면 최저 600-25,000데나리온은 받아볼 수 있을 터인데, 가정이 있는 몸으로 그럴 수도 없거니와 노예로서 사주지도 않았다. 예수는 그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저 참새보다 귀한 존재들이라고, 하나님이 그대들 머리털까지 다 세시고 계신다고. 예수의 이런 격려의 말이 얼마나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을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부자의 장례비가 최고 25,000 데나리온이었다고 조사되고 있는데, 그 돈 액수는 4인 가족이 8년간은 살아갈 수 있는 최저생계비 만큼 큰 돈이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심정이 십분 이해되고, 우리사회 부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절제하는 생활을 하고 가난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니까.
연록색 나뭇잎들 사이에서 성령의 현존은 보는 심안이 열려
동네시장 방앗간과 두부공장 앞에서 먹이를 찾는 참새들을 보고 두 앗사리온에 얽힌 성경이야기를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아파트 입구에 와있다. 나는 서울 강북구 수유리 ‘4.19국립공원묘지’ 근방 아파트에 살고 있다. 며칠 전 가뭄 끝에 내린 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나무 가지마다 연초록 새잎이 돋아나면서 그야말로 눈부신 생명의 녹색잔치가 한창이다. 나무마다 생기가 뿜어져 나오고, 연초록 나뭇잎새들은 첨구경하는 지구촌 공기가 신나서 야단들이다. 이 봄의 축제에 참석하려고, 지난 겨울 얼마나 참고 견디었을까? 장하다고 어루만져주고 싶어진다. 담장이 덩굴은 새끼 잎이 벌써 담장을 기어 올라가 볼 태세다.
내일이면 어린이날이 아닌가? 어린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처럼 나뭇잎새마다 연초록 작은 잎들의 꿈들을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연초록이라고 싸잡아 표현할 수 밖에 없지만, 나무종류마다 연초록의 색상도 가지가지이다. 좀 더 초록인 것, 좀 연분홍이나 엷은 갈색을 띄는 것도 눈에 띄이니, 이미 땅에 지긴 했지만 눈부신 모란 꽃잎을 흰색이라고 밖에 표현 못하는 언어의 부적합성을 절감한다. 문득 시편 한 구절이 가슴에서 목구멍을 거치지도 않고 직접 뛰쳐 나온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갑자기 생명의 영, 창조의 영, 지면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온 나뭇가지마다 휘저어 다니시면서 아직 주저주저하는 겁내는 여린 잎들을 독려하시며, 힘주시며, 축복하시며, 생기로서 충만케 하고 계심을 느낀다. 그동안, 명색이 조직신학과목을 30년간 신학교 교실에서 가르치면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을 신자들의 심령과 성경문장과 교회당 안에 가두어 두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대자연 속에서 생명의 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충만케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구나라고 회개하게 된다. 부흥회나 기독교인들의 대형집회에만 쫒아다니시는 성령님이라면, 그리고 성경구절의 말씀 밖에서는 일하실수 없는 경전문자에 메이신 성령님이 참 답답하셨겠구나 라고 내 얼굴이 남모르게 붉어진다.
조직신학적 성령론을 30년간 신학교 교실에서 가르쳐온 나는 이제 70살이 되어서야 심안(心眼)이 열려, 인간의 심령과 성경말씀과 예배공동체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님만이 아니라, 생명기운을 뿜어내며 돋아나는 저렇게 눈부시고 청초한 연초록 잎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본다. 그리하여 그렇게 일하시는 손길과 숨결을 느꼈다. 구상 선생님의 「말씀의 실상」이라는 시가 저절로 입에서 되살아 나온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 이적에나 접하듯 / 새삼
놀라웁고/
창 밖 울타리 한구석 / 새로피는 개나리꽃도 / 부활의 시범을 보듯 /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한 우주, 허막의 바다에 /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 상상도아니요, 상징도 아닌 / 실상으로 깨닫습니다.
연초록 부드러운 생명들, 취약한 피조세계가 창조주의 공동일꾼들
내 생각이 온통 여리고 부드럽고 그러나 놀랍고 경이로운 연초록 나뭇잎새들에게 집중하다가, 나뭇잎만이 아니라 대자연 우주시공간 속에서 지구라는 녹색행성도 지극히 여리고 취약한 것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주공간에서 녹색행성인 지구를 컬러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 경이롭다는 감정과 함께 숙연해 질 때도 있다. 우주복을 입고 우주공간에 나가서 지구를 바라보면, 어쩐지 약간 애처롭고 여린데 일찍 시집보내는 신부를 바라보는 부모의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렇겠다고 나는 동감한다.
보통 우리들은 지구행성에 대하여 사실이 아닌 많은 오해를 가지고 살고 있다. 지구는 오대양 육대주를 갖추고, 에베레스트산 같은 고봉들을 거느린 매우큰 별이라는 오해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구라는 행성의 평균반지름은 6,730킬로미터이다. 그런데, 한반도 남쪽 땅끝마을 해남군 끝에서 함경북도 온성군 최장 직선거리는 1,020 킬로미터이다. 우리조상들의 길이셈법으로 계산하면 4킬로미터가 10리 길이니까 2,600리이다. 넉넉하게 잡아서 삼천리(3,000리) 금수강산이라 칭한다. 이 한반도 남북길이의 6.5배를 수직으로 파들어가면 지구중심 핵에 도달한다.
지구대기권의 두께는 140킬로미터 두께지만 대기의 기체 80%가 밀도 높게 모여있는 대류권은 지상 12 킬로미터 두께에 불과하다. 생물체들이 숨쉬고 살며, 눈비가 내리고, 태풍불고 황사가 일어나는 층이 이 대류권인데, 그 두께는 지구를 둥근사과에 비교할 때 사과를 싸두는 클린랩(Clean wrap)이나 농구공 겉표면에 칠한 광택제 두께정도만 할 뿐이다.
지구가 물리적으로 평형상태를 유지하면서 안정된 리듬을 갖기까지는 45억년이라는 시간을 걸려 조율되었고, 그만큼 절묘한 생명의 집(oikos)이다. 평균기온이 섭씨 2도만 올라도, 빙하가 녹고, 여름혹서에 유럽에서만 15,000명 노인들이 죽고, 프로리다주에 미얀마에 해일이 덮치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정체모를 바이러스 병균이 창궐하여 큰 교란 상태가 발생한다. 1992년 리우‘유엔환경회의’이후 채결된 ‘기후변화협약’의 이행과 그 후속조처로서 채결된 ‘교토의정서’(1997)의 준행이 중요하다. 그만큼 지구라는 녹색별이 생명체가 살아갈만한 별로서 지속가능하려면 매우 취약한 녹색행성임을 인류가 크게 자각할뿐만 아니라, 온실가스배출량의 감소를 당장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기후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전체의 붕괴가 갑작스레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도와드리면서 지구를 생명체가 살수있도록 생명지속가능의 행성으로 유지시키는 일꾸들은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다. 산소함량을 21%로 유지시키고, 일정한 산소와 탄산가스의 교체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일꾼들은 이름없는 균류, 녹색식물, 미생물, 바다의 프랑크톤, 곤충들, 그리고 우리주위에서 도시의 매연까스를 뚫고 나오는 연초록 잎들이다.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도움이(Created Co-creator) 들이다. 사람이 그 직위에 복귀하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부드러워져야한다. 지금처럼 강한 것, 큰 것, 억센 것, 영악한 것이 존경받는 가치질서와 무한경쟁 승리 교육철학으로서는 않된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부드러운 맘을 주시겠다”(겔26:26)고 약속하신다. 노자 도덕경엔 “가장 높은 덕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콩크리트로 4대강에 보를 16곳이나 만들고, 세멘트 사용량이 많기로 세계 몇째나라가 되는 토건국가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생명계는 연초록 나뭇잎들처럼 신선하고 생명력을 듬뿍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여리고 취약한 것임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에게 십자군영성(Crusade Spirituality)이 필요하지 않고 십자가영성(Cruxfix Spirituality)이 요청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신적 성품과 생명의 본질이 ‘긍휼히 여기는 맘’ 이기 때문이다. 성서 속을 꿰뚫고 흐르는 두가지 전통, 성서의 메시지에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기조음(基調音)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출애굽사건과 십자가 사건, 계약 전통과 성례전 전통이 그것이다. 전자는 ‘정의’의 요청이며, 후자는 ‘인애’(仁愛)의 요청이다. 미가서는 예언운동의 총체적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한다: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훼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正義)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