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시기 때문에
시편 119편 70~75절
그들은, 심장이 기름기로 뒤덮여서 분별력을 잃었으나, 나는 주의 법을 지키면서 즐거워합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 나를 세우셨으니, 주의 계명을 배울 수 있는 총명도 주십시오. 내가 주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기에,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 주의 판단이 옳은 줄을, 나는 압니다. 주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주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갈라디아서 6장 7~10절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마태복음 20장 8~12절
저녁이 되어,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러니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기를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군요'하였다.
자연재난과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행성들은 자기의 갈 길을 달려가 한반도에 가을이 왔습니다. 결실의 계절이 되면 우리는 무엇인가 진실의 법정 앞에 서게 됩니다. 감출 수 없고 허세를 부릴 수 없는 사물의 실상이 드러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너의 삶은 진실하느냐고 묻는 무언의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성경을 뚫고 흐르는 한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다라는 메시지입니다. 신구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한 분이시라는 것, 미쁘신 분이라는 것,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은혜로운 하나님 되시기로 하신 언약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어 의인은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라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의 기초를 이룹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단순히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심판의 빛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거룩한 진실이요, 사랑과 의로움이 하나가 된 진실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는 봉독한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에'우리가 깨달아야하는 세 가지 신앙의 근본이치를 터득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진실하시기 때문에 심는 대로 거둔다는 엄정한 법칙을 짓밟고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바울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우리 조상들은 굳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우주자연의 근본이법이 뒤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가고, 마침내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주공법과 창조질서에 대한 회의는 우리의 삶의 혼돈질서에서 생기는 착각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심지도 않고 뿌리지도 않았는데 재주를 부리고 요령을 부려서인지 수확을 잘 거두고, 어떤 사람은 진실과 정직의 씨를 뿌렸는데 검불만 거두고 빈 손으로 돌아오니 '심는 대로 거둔단 말도 따분한 도덕론자들의 교과서적인 헛소리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시는 분이 되고 만홀히 여김 받아도 쌀 그런 분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이 말씀이 진정 사실이 아니라면 믿음도 헛것이고, 종교도 헛것이고, 도덕윤리도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고 물줄기가 절벽을 기어오르는 역류현상을 보는 것과 같으며, 도량형 저울의 눈금이 물건 사러 온 사람과의 친근관계에 따라 마음대로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라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원론이 그렇다는 말이고 인생의 현실적 삶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럴듯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의 타작마당에서 쭉정이를 알곡이라고 착각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얼렁뚱땅 적당적당 넘어가면서 성공했고 처세술에서 남보다 앞섰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까지 통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런 호락호락한 싸구려 물건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오후 다섯 시에 온 일꾼, 그래서 한시간도 일을 하지 않은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 즉 온종일 하루 품삯을 주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삯비유는 경제논리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항상 오해하기 쉬운 걸림돌 스칸딜론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들려주신 포도원 품삯비유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진실하심이라는 말뜻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비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현상을 반영합니다. 수많은 날품팔이 일꾼들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예루살렘 길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고용해 주는 포도원 주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서산에 걸리기 시작한 오후 여섯시 한 일꾼이 주인의 호의로 포도원에 들어가 한 시간쯤 일을 하고 품삯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동자 가족이 살아갈 최저 생계비가 한데나리온 이었다고 합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 한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 품꾼은 깜짝 놀랬을 것입니다. 감격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후의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라면 일한 시간만큼 더많은 품삯을 주는 것이 분배정의요 노동정의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도 당당히 할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과 계약조건이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이며 나는 잘못한 일 없고 나중 온 사람에게 내가 그렇게 해주고 싶은 것은 나의 뜻이니 당신 품삯이나 받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항상 왜 내게는 저 한시간밖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 받은 한 데나리온보다 적어도 다섯배 일곱배 품삯을 주지 않는가 하고 불평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비유는 노동임금에 관한 노동법 근거를 가르치려는 비유가 아닙니다. 인생은 그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보면 다 오후 다섯 시에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노동시간으로 계산하지 않고 한 데나리온의 하루 품삯을 다 주시면서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포도원 비유의 정신을 살린다면 인간은 누구나 그 이상을 독점적으로 누리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더 커진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생을 누릴만한 최소한의 생활조건은 보장받는 사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오늘 성경은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신앙의 제3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진실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녀에게도 고난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는 119편에서 오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의 판단이 옳은 줄을 나는 압니다. 주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주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장이 기름기로 뒤덮여서 분별력을 잃었으나, 나는 주의 법을 지키면서 즐거워 합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고난이 처음엔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었고 신앙에 회의가 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원인이 되었으나 이제는 고난을 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하여 분별력을 회복했고 사물을 더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내면의 눈꺼풀이 열렸으며, 주의 율례 곧 주의 계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닫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는 고난이 더 이상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 것만이 아니라 자청하거나 환영할만한 용기는 아직 없지만 그래도 매우 역설스럽게 하나님이 은혜의 한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 것이지요.
진정 고난을 경험해 본적이 없이 은혜를 알는지요.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밥 한 그릇이 하늘이라는 시인의 화두를 이해 할 수 있을는지요. 하나님께서 삶속에 고난이라는 '가시'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진실로 모든 인간이 탐욕과 심장에 뒤덮인 기름기를 제거할 수 있을 까요. 하나님의 '진실하심' 때문에 고난이 허락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곁에도 두신 것이라는 역설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하나님이 진실하시기에 피조물 속에서 보이시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모습은 서로 모순 충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만고 불변의 법칙을 지키시는 이가 '해질 무렵 온 농부에게 하루 품삯을 모두' 내줄 수 있으며,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은혜의 도구'로 주실 수 있는가?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서로 자가당착인 듯한 그 세 가지 성경의 말씀이 성숙한 믿음 안에서 보면 주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에' 이뤄지는 같은 신적 사랑의 세 가지 다양한 표현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