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트랜스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캐서린 켈러 교수가 방한 강연회를 가졌다. 그와의 인터뷰는 페미니즘과 여성 신학에 대한 이론적 대안들을 충실히 모색해보자는 취지로 준비되었다. 80-90년대 우리에게 모더니즘의 이상들도 충분히 현실화되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유입되어, 지적 그리고 실천적 혼란을 야기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러한 혼돈과 실패가 현재의 페미니즘 논의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하거나 혹은 실수를 최소화하자는 의도이다. 인터뷰에 참석한 사람들은 Catherine Keller(Drew University), 전현식(연세대), 김성복(꽃재교회), 박지은(이화여대), 최순양(이화여대), 박일준(감신대), 강도현(뉴스앤조이 대표) 등이며 뉴스앤조이, 에큐메니안, 베리타스 등의 교계언론도 참석했다. 인터뷰의 내용은 박일준 박사가 정리했다. 2부로 나누어 전재한다.
본 인터뷰는 최근 높아지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또한 교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성소수자 문제 등을 놓고 현재 미국 신학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감리교 여성 신학자인 캐서린 켈러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대안들을 모색해 보기 위한 자리이다. 꽃재교회는 특별히 이번 캐서린 교수의 방한을 앞두고, 페미니스트 신학의 활성화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소정의 후원과 또한 인터뷰를 위한 자리를 제공해주었다. 특별히 이번 방한은 연세대학교 융복합연구원이 주관하는 한국연구재단 Global Research project 연구수행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는데, 연세대학교 전현식 교수가 연구책임자로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이번 방한은 장신대 한-미 인문분야 특별협력사업인 "페미니즘과 제3의 성" 연구팀과 협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장신대 김은혜 교수가 연구책임자이다.
이번 인터뷰는 페미니즘과 여성 신학에 대한 이론적 대안들을 충실히 모색해보자는 취지로 준비되었다. 80-90년대 우리에게 모더니즘의 이상들도 충분히 현실화되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유입되어, 지적 그리고 실천적 혼란을 야기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러한 혼돈과 실패가 현재의 페미니즘 논의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하거나 혹은 실수를 최소화하자는 의도이다.
최근 일고 있는 소위 페미니즘 열풍은 뒤늦게나마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그 출발이 매우 늦었던 탓에, 서구사회에서 진행되었던 페미니즘 논쟁들의 문제점들을 현시대에 반복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남/녀의 생물학적 이분법에 근거하여 여성해방과 권리를 주장하던 '제2물결'(the Second-Wave) 시대의 뤼스 이리가라이의 주장들이 '포스트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담론과 구별 없이 뒤섞여, 담론으로 유통되고 있는 측면들이 있다. 90년대 후반 페미니즘 담론이 '여성'이라는 이름을 '백인여성'을 위한 담론으로 독점하고 있는 모습이 흑인여성들이나 다른 인종의 여성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상황에서, 버틀러는 '성'(sex)과 '젠더'(gender)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집었다. 우리의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이해(gender)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성(sex)에 기반하여 구성된다는 통념을 뒤집어, 젠더가 성에 기반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이 젠더를 통해서 구성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니 생물학적으로 선천적인 것으로 이해된 성에 대한 모든 이해는 이미 젠더, 즉,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투사되어 재구성된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되었다.
이를 통해 버틀러는 '성'(sex)을 남/녀의 이분법으로 설정하고, 양성 간의 갈등과 해방을 모색하는 페미니즘이 성적 소수자들에게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제2 물결 시대의 성차의 페미니즘이 인종적으로 백인이 아닌 모든 여성들에게 전혀 해방의 담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동시에 노출한 것이다. 이후 미국에서 페미니즘 연구는 '성차'(sexual difference)가 아니라 '젠더'에 입각하여 진행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90년대 이후, 즉, 버틀러 이후 페미니즘의 동향을 '포스트페미니즘'이라 부른다. 켈러가 강연에서 지적하듯이, 이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은 여러 다양한 소수자들을 '페미니즘'의 우산 아래 결집하는 공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과제가 이미 완료되었다는 의미에서 '포스트-,' 즉, '탈-페미니즘'의 담론으로 들리는 단점도 동시에 내재한다. 사실 대한민국 사회의 현재 페미니즘 담론은 초기 페미니즘 담론과 버틀러 시대의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이 뒤섞여 있는 상태이다.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은 이미 유행하고 있는 용어라기보다는 기존의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담론들 사이에 야기되고 있는 내적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기 위한 대안적 전략 모색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차별받고 억압받는 '여성'을 해방의 주체로 세우려는 페미니즘의 정신을 다시금 강조함과 동시에, '여성'(women)들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들을 함께 품고 나아가야 한다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강조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포스트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마치 페미니즘의 문제들이 이미 극복되었거나 해소된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캐서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가 『변화하는 차이: 여성성과 철학의 물음』(Changing Difference: The Feminine and the Question of Philosophy)에서 지적하듯이, 포스트페미니즘의 시대에도 가정폭력으로 억압을 받는 사람의 대다수는 여전히 '여성'(women)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의 문제가 '여성성'(the feminine)이라는 연대의 이름 하에서 희석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트랜스페미니즘은 다양한 소수자들과 주변화된 사람들과의 연대를 도모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억압의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현재 트랜스페미니즘은 바로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한 문제인식이며, 이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도모하는 중이다.
인터뷰는 최순양 박사(이화여대)가 켈러 교수의 트랜스페미니즘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최순양(이화여대): 켈러 교수가 주창하는 트랜스페미니즘은 우선 전대의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들 자체 안에서 동의를 얻지 못했던 문제를 지적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대안적 착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의 물결이라 일컬어지는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이리가라이의 경우처럼 여/남의 성차(sexual difference)에 근거하여, 여성의 해방과 권리획득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 페미니즘 운동에서 말하는 '여성'은 모든 여성을 포괄하는 개념이 되지 못했음을 이미 흑인여성들의 '우머니스트 운동,' 스피박의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그리고 버틀러의 '젠더 연구' 등이 지적한 바 있다. 특별히 스피박은 페미니즘 운동이 제시하는 여성의 이미지 속에 제3세계 여성들이 포함되지 못하며, 페미니즘 운동이 지향하는 해방이 결코 이 비백인, 제3세계 여성들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탈식민주의' 운동을 주창하였다. 켈러 교수의 트랜스페미니즘은 바로 이러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초기 페미니즘은 여/남을 구별하고, 분리하여, 억압당한 여성들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제의 해결 혹은 대안에 이르는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켈러는 '관계성' 개념을 좀 더 발전시켜-현대 물리학의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사고실험으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얽힘' 혹은 중첩성(entanglement)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우머니스트 운동가들이 지적하듯, 관계는 단지 여/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빠로서 어머니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양하게 "얽혀지기"(entangled)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여성해방은 단지 여/남 이분법에 근거해서 모색될 것이 아니라, 삶이 일구어가는 관계의 복잡성과 중층성 그리고 모호성 등을 성찰하면서 차근차근 해방의 과제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켈러는 존재를 실체나 관계로 특정하는 이전의 신학들과 달리 '신비'로 조망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명백히 자명하게 기술하거나 진술하거나 알 수 있다는 입장을 거절한다. 따라서 '여성'에 대해서 그리고 '남성'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입장에 근거해 '정형화'(stereotyping)하려는 모든 시도를 우상화라고 조망한다. 그래서 켈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즉,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신학적 개념을 '관계적 육화'(intercarnation)로 제안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특정 육체성을 구현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과의 관계로 진입하셔서 관계를 이루시고 완성하신다는 말로 이해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는 '단순한 존재'(simpleton)가 아니라, 다수성(multiplicity)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한 두 마디의 말로 규정하거나 정의할 수 없다. 이는 관계를 구성하는 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다수성의 측면은 왜 우리가 그 누구를 규정하거나 이해할 때, 단순하게 정형화하면 안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즉,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존재 전체가 아닌 것이다. 즉, 다수성은 모든 존재가 단순하고 명확한 관계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얽혀있음"(entanglement)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신비'(mystery)의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저 사람 혹은 존재는 내가 알고 있는 모습 그 이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과 관계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권력은 이 다수성의 존재, 즉, 복잡하고 다양하고 중층적인 존재를 획일화하여, 그 획일적으로 정형화된 존재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다루려는 힘을 발휘하고자 한다. 바로 이 힘은 켈러에 따르면 언제나 '예외적인 힘'인데, 말하자면 자신의 권력을 모든 표준화된 질서의 바깥에 예외적으로 정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방은 자신의 존재와 힘을 다른 존재들로부터 예외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그 질서에 속한 모든 존재에게 너는 그 예외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부추기면서, 그 예외적 존재가 되기 위한 무한한 경쟁을 부추긴다. 그 무한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서로와 연대하기보다는 서로를 짓밟고 넘어서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따라서 해방은 바로 이 예외적 존재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극복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며, 이 해방은 이 무한경쟁의 구조 속에서 패자로 규정되거나 낙인찍은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 질것이라는 점을 켈러는 '얽힘'(entanglement)라는 말을 통해 함의한다.
최순양 박사가 트랜스페미니즘을 설명하는 내용들은 참석한 기자들을 위해 한국어로 진행되었는데, 켈러 교수가 (영어 통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박사가 무엇이라 이야기했든 전부 동의한다고 말해서 참석한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박일준: 켈러 교수님, 당신의 신학을 간략하게 한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켈러: 신학은 사랑의 철저한 신비에 대한 명상입니다. 사랑의 철저한 신비는 세 가지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향성은 개인주의에 반하여 관계성으로 나아갑니다. 이 관계성은 신비의 측면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방향성은 '힘' 혹은 '권력'입니다. 이는 때로 '권력을 향한 사랑'으로 도착되기도 하는데, 불행히도 우리 미국이 현재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힘이라는 방향성은 신학적으로 '사랑의 힘'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이런 점에서 매우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권력'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방향성은 앎 혹은 지식(knowledge)입니다. 오늘 '신비'를 말하고 있는데요, 이 신비는 바로 우리의 앎의 한계를 가리킵니다. 사랑은 우리의 지식의 한계에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인데요, 우리의 앎은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켈러 교수의 자신의 신학에 대한 간략한 요약에 이어,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김성복(꽃재교회): 목회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때로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되는데요.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참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의 투사(projection)로 나타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우리 세계가 구현한 가장 소중한 가치들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관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소중한 가치가 우리 내면의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 이민자들에게 관대하던 프랑스가 적대적인 나라로 돌아선 일 등은 결국 인간이 자기 먹고 사는 일에 위협을 느낄 때, 무척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향린교회에서 전하신 설교 중에 '미국이 병 들었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교수님은 설교에서 촛불시위가 희망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것이 혹시 우리의 상처와 실패의 투사가 아닐런지라는 생각을 한편으로 갖고도 있습니다. 좌절된 희망이 대리적으로 표출되는 사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 내면의 이기심을 전제로 할 때, 켈러 교수님이 말하는 '연대'(solidarity)가 가능할 것인지 의아합니다. 그래서 켈러 교수님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특별히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을 통제하기 위해 자기 집단의 도덕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타자들을 악마화하는 현상들을 목격하게 될 때, 인간과 더불어 희망을 세워가는 일이 가능할런지요?
켈러: 우리 인간의 모든 언설과 행위들은 물론 투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제한된 언어로 표현된 것을 진리 혹은 사실로 확정할 때, 이것은 투사가 아니라 우상숭배(idolatry)가 됩니다. 이렇게 우상화된 언어가 하나님을 표현하기보다는 언어의 한계에 한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의 책 『불가능성의 구름』(Cloud of the Impossible, 2015)은 부정신학의 전통을 탐구했는데요, 부정신학의 전통은 매우 오래된 전통으로서, 교부 닛사의 그레고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신학적 전통은 목사님이 말씀하신 인간의 투사를 심도 있게 다루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신비한 측면, 즉, 언어를 넘어선 측면을 다룬 전통을 인간의 모습을 대할 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니까요. 인간의 모습에도 우리의 정형화된 언어를 뛰어넘는 측면이 담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형화된 인간의 이미지, 즉, 남자, 여자, 한국인, 미국인 등의 스테로오타입화된 이미지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우리의 얽매임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잘못된 얽매임은 우리 안에 담지된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관계성은 무한한 사랑의 신비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그런 정형화된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고결한 가르침,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 인간됨, 즉, 인간성의 신비에 근거할 때 가능합니다. 즉, 그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나의 생각 혹은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신비한 측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교묘합니다(tricky). 특별히 그 원수가 나에게 인간됨을 보여주지 않을 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김성복(꽃재교회):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가 질문드린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부족함을 타인에게 투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도 투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습이 심지어 이기적이고 질투스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켈러: 맞습니다. 성서의 질투하는 하나님, 복수하시는 하나님, 통제하시고 권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분명 인간의 부족함이 투사된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투사는 특별히 미국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절망스런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각자를 창조적이 되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유하고 그래서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이기적이 되지 않는다면, 각자 고유한 차이를 담지한 존재가 되기 무척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투사는 인간에게 지속적인 유혹입니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엄마나 아빠로부터 떨어져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할 때처럼 혹은 억압받는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때처럼, 이기적이 된다는 것 혹은 '자기됨'(self-ish)이 된다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이 됩니다.
서구 근대는 지난 500년 동안 이 '이기적'인 본능에 기반하여 인간 존재를 '개인'으로 간주하면서, 개인주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분리된 개인이라는 개념이 경제의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개인의 생존과 경쟁과 승자독식을 조장하는 문화가 이어져 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근대 개인주의가 실현된 정점을 상징합니다. 물론 트럼프라는 개인이 이 자본주의 시대를 홀로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모순되게도 이 범지구적 자본주의 경쟁의 희생자들이 가장 자본친화적인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기 때문에 그는 선거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이기심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실현된 모습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말(apocalypse)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성서의 종말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바빌론의 창녀'에 주목하면서 말입니다. 이 성차별적인 이미지가 가리키는 것은 바로 당시 로마시대에 구현되고 있었던 세계 경제의 탐욕입니다. 당대의 모든 지역경제를 집어 삼키면서, 성장하는 거대 경제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은유입니다. 예측이나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닙니다. 성서의 이 '바빌론의 창녀'라는 은유는 2천년 후 지금의 시대를 예고하면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지구경제의 위기, 직업 상실의 위기 등은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의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 지구적 위기의 과정에서 백인우월주의가 다시 등장하는 모습을 미국과 유럽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반대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946년 한나 아렌트는 이런 현상을 예고한 듯이, '이민자들에 대한 반대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라고 적은 바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백인우월주의에 해당합니다. 저와 친구인 윌리엄 코넬리(William Connelly)가 바로 얼마 전 책을 출판했는데요, 제목이 『야심만만한 파시즘』(Aspirational Facism: The Struggle for Multifaceted Democracy under Trumpism)인데요, 우리 시대 파시스트 혹은 국수주의자들 혹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야망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사님이 지적하셨듯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꼼꼼히 성실하게 준비해 주신 목사님의 질문에 중요한 한 가지를 더 답변해 드리자면, 목사님이 촛불시위와 희망 그리고 투사를 언급해 주셨는데, 이점에서 저는 희망을 낙관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 희망은 예언자적 전통으로부터 도래합니다. 세계의 그 어떤 문화적 종교적 전통도 기독교만큼 희망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와 욥기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 나오는 기독교적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깊은 절망과 상처로부터 나오는 희망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나오는 희망입니다. 기대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자신들을 구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기독교적 희망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를 들어, 한 해방신학자는 『희망 없음을 품고 살아가기』(Embracing the Hopelessness)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희망이 그저 아편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서는 바로 이 희망 없는 절망을 품은 채 희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애가는 극단적으로 절망적이고 분노스런 상황에서 희망을 말합니다. 즉, 성서에서 말하는 희망은 절망에 무척 가까이 놓여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간다의 신학자 카통골레는 저항으로서 탄식을 말하면서, 아프리카를 향한 희망을 말합니다. 콩고, 우간다, 그리고 르완다가 위치한 동아프리카의 상황은 무척이나 절망적입니다. 그 상황은 탄식과 절망과 비탄이 가득 차 있을 텐데, 그는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켈러 교수는 '희망'(hope)을 한국어로 무엇인지 물으셨고, '희망'이라고 가르쳐드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