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트랜스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캐서린 켈러 교수가 방한 강연회를 가졌다. 그와의 인터뷰는 페미니즘과 여성 신학에 대한 이론적 대안들을 충실히 모색해보자는 취지로 준비되었다. 80-90년대 우리에게 모더니즘의 이상들도 충분히 현실화되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이 유입되어, 지적 그리고 실천적 혼란을 야기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러한 혼돈과 실패가 현재의 페미니즘 논의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하거나 혹은 실수를 최소화하자는 의도이다. 인터뷰에 참석한 사람들은 Catherine Keller(Drew University), 전현식(연세대), 김성복(꽃재교회), 박지은(이화여대), 최순양(이화여대), 박일준(감신대), 강도현(뉴스앤조이 대표) 등이며 뉴스앤조이, 에큐메니안, 베리타스 등의 교계언론도 참석했다. 인터뷰의 내용은 박일준 박사가 정리했다.
박지은(이화여대): 트랜스페미니즘의 정의가 상당히 폭넓은데, 이것이 어떻게 한국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켈러: 박사님 질문이 저에게 '희망'을 주는데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의 작업과 한국에서 활동하시는 여성신학자들과의 연대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저는 이미 한국계 미국 여성신학자들과의 연대가 있습니다. 저의 신학은 사랑의 신비 혹은 관계성으로 언제나 출발하기 때문에 이는 서구의 분리된 개인의 에고와 이기주의를 거부합니다. 아울러 페미니즘의 이 개인주의적 에고의 모방도 거절합니다. 하지만 여성적 관계성이 담지한 '비자아'의 위험성, 즉, 자기 자신의 존재감 상실의 위험성도 또한 거절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셈인데, 분리된 자아도 아니고, 해체된 자아도 아닌 제3의 길 말입니다. 이는 곧 "연결하는 자아"(connecting self)의 길입니다. 이는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이냐 남성이냐의 이분법적 이해로부터 거리를 둡니다. 즉, '얽혀진 형태'의 자아를 저는 주장합니다. 이 연결성이라는 개념이 저를 과정신학자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저를 또한 생태신학자로 만들어주고 있기도 합니다. 연결성은 단지 인간들 사이의 관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더 나아가 지구행성과의 연결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 신학적 감각으로 보기에, 이 관계성 개념이 한국 여성신학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한국여성신학은 백인남성의 에고를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백인여성중심의 페미니즘을 모방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 생각에, 한국여성신학은 강건한 관계성(strength of relationality) 개념에 기반해 있습니다. 관계는 쉽지 않습니다.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한국여성신학은 그 관계의 부담을 짊어지는 강건함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즉, 정(情)을 담지한 관계성입니다.
전현식(연세대): 연대에서 하셨던 강연 내용과 연관하여, 특별히 한국 정치의 무력함을 경험하면서, 켈러 교수님이 희망을 말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하여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목이 "지금의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now)이었습니다. 거기서 고린도서의 바울이 말하는 "카이로스적 시작(kairotic incep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다시 한 번 여쭙고 싶습니다.
켈러: 제가 금년 12월까지 집필을 마치려고 하는 책의 제목이 『지구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Earth)인데요, 교수님 말씀하신대로 카이로스는 그냥 평범한 여느 순간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순간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카이로스의 순간을 "예외"(exception)의 순간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시작"(inception)으로 보고자 합니다. 저는 모든 순간이 카이로스적 잠재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교회에서도 이 잠재성을 느꼈습니다. 향린교회에서 아름다운 예배를 마치고 미국 대사관 앞으로 가서 전쟁반대 시위에 함께 하면서, 저는 바로 그런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모든 순간이 메시야로 나아가는 문이다"고 했는데요,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도래하시는 메시야'를 매순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의 순간을 칼 슈미트처럼 '예외'의 시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파시즘으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미국적 예외주의의 정치는 바로 이런 도착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심지어 국제법으로부터의 예외된 존재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미국적 예외주의는 '나쁜 신학'(bad theology)에 근거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능성의 개념에 근거한 신학 말입니다.
전현식: 저의 질문은 바울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카이로스적 순간이 어떻게 도래할 수 있느냐입니다. 그 순간은 분명 바울의 내부로부터 도래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이 절망으로 가득 찬 일상의 시간들을 희망의 순간으로 바꾸어가는 근원적 동력이 무엇이냐를 저는 묻고 싶습니다.
켈러: 저는 단지 기독교적 예외주의가 카이로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교수님이 질문하신 근원적 동력은 제가 보기에 교회입니다. 교회는 실재(real)입니다. 오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전쟁반대 시위를 했던 교회, 그 교회가 실재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맨하탄의 교회는 교회 바깥에 아주 큰 무지개 걸개를 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 교회는 매주 하나님의 나라를 주일날 실현하고 있습니다.
박일준: 켈러 교수가 incarnation이 아니라 'intercarnation'을 제안한 것은 바로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성육신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카이로스적 순간으로 변혁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도현(뉴스앤조이 대표): 장신대에서 발표하였던 내용을 보니,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있고, 얽혀있음을 강조하셨는데요, 그런데 이 관계성이 트럼프와 같은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얽힘'은 우리가 그들과 소통해야 하는 의무의 개념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원수와 함께 소통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의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그런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입니다.
켈러: 일단 저의 대답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과도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속한 학교의 사람들과 학생들은 그런 노력을 잘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좀 더 급진적이 되고자 하고, 그래서 약자들과 소수자들과 소통하고 품고 연대하는 일들을 곧잘 도모하지만, 보수적인 사람들하고는 소통을 잘 혹은 거의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저는 "예외주의적 진보주의자의 태도"(exceptionalistic progressive mode)라고 부릅니다. 선생님 질문처럼, 저도 어떻게 그런 사람들과도 소통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제 동료학자는 이런 일을 아주 훌륭히 수행해 왔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문제에 훌륭하게 대처해 왔을 것입니다. 성서의 이야기와 은유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저는 진보주의자일수록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서는 특별히 예수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지 말라고 합니다. 즉, 전혀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어차피 상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정치적으로 좌나 우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중간에서 흔들리는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계층과의 소통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진보라 일컬어지는 부류의 사람들끼리도 더 나은 연대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들, 생태주의자들, 성소수자들을 연대하는 사람들, 탈식민주의자들과의 연대를 공고히 수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들 때문에 이 '진보'의 무리들은 자기만을 "예외적인" 진리를 실현하는 사람으로 동일시하면서, 다른 운동의 사람들과 좋은 연대를 구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쨌든 모두가 "얽혀" 있는(entangled) 존재들입니다. 핵심적인 물음은 우리가 그렇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가입니다. 제 생각에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모든 존재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국과 얽혀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얽혀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강도현: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안으로 여성적 리더십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일부 여성 지도자들이 이렇게 요청된 여성적 리더십의 모습을 정형화하여, 정치적으로 남용하는 모습들도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남성적 리더십의 전형을 넘어서, 여성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리더십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켈러: 좀 대답이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이 여성 리더십과의 좋지 않은 경험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 같고, 저희도 힐러리 클린턴의 리더십과 연관하여 나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젠더-본질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저 역시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분들의 나쁜 리더십에 많은 실망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가 '페미니스트인 리더'(leader who is a feminist)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지도자 말입니다. 물론 저도 우리 사회에 (생물학적) 여성 리더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여성들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부장제가 부여하는 젠더-관계를 변혁해내는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변혁의 과정은 매우 느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을 돌아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화해왔는지를 보면서, 인내심을 갖고 희망을 다시 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점점 더 개선되어 왔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시간을 조망하며,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20년 전이었다면, 선생님은 그 질문을 안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인식조차 못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정훈(에큐메니안): 저는 앨리스 워커의 우머니스트 신학과 켈러 교수님의 트랜스페미니즘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켈러: 선도적인 우머니스트 신학자 켈리 브라운 더글라스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앵글로-색슨 예외주의'가 '백인우월주의'로 나아갔고, 이것이 '백인-예외주의'로 나갔습니다. 제가 우머니스트 신학으로부터 배운 것은 바로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과 '동시성'(simultaneity)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은 아프리카계 여성들의 경험이 백인여성들의 경험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상 여성들 간의 차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기는 하지만, 저는 이 차이가 언제나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관계는 결국 차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정훈: 제 생각에 켈러 교수님의 트랜스페미니즘은 언제나 텍스트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앨리스 워커의 우머니즘은 현장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그래서 혹시 켈러 교수님이 자신의 신학을 현장으로부터 다시 수립할 생각은 없으신지 묻습니다.
켈러: 예, 선생님 지적처럼, 저는 앨리스 워커와 다릅니다. 저는 백인여성으로서 흑인여성인척하며 우머니스트 행세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론과 현장이라는 이분법은 앨리스 워커 같은 우머니스트들이 등장하면서 백인 페미니스트들에게 던졌던 비판인데요, 그것은 이미 한 세대 훨씬 전에 제시된 문제들입니다. 2017년 이제 우리가 이 다양한 여성들 간의 연대를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이론과 현장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새로운 틀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한국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면, 수업시간에 제가 우머니스트인 한국 남성을 만났다고 흑인제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은혜(뉴스앤조이): 트랜스페미니즘에 성소수자들을 위한 신학의 가능성이 담겨져 있는 것인지 묻습니다.
켈러: 저희 상황에서는 성소수자들을 위한 담론들이 여러분들이 처한 상황과는 다른 맥락에서 유통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감리교회가 거의 분리 직전의 상황에 있습니다. 제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성경에는 동성애자를 반대하는 글이 없습니다. 물론 동성애 행위를 비난하는 듯한 문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삽입'에 관한 것인데요, 이와 연관하여 바울은 3번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늙은 귀족 남성이 젊은 남성을 노예삼아 삽입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 행위가 강제적으로 힘과 권력을 사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바울은 바로 그 행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구절을 오늘날의 상황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성서를 우리 현대인의 삶을 위한 규정집으로 삼아, 모든 구절을 행위규범으로 삼는다면, 이런 구절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룰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하는 여성은 처녀임을 증명해야하고, 만일 이 여성이 처녀가 아닐 경우, 아버지는 이 여성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만일 성서를 동성애 반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우리의 행동규범집으로 삼는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처녀가 아닌 채 결혼하는 여성은 돌팔매질을 당해야하는데, 이러한 성서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제정신이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해준 구약의 규범집에 대한 총체적인 해석은 간단합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율법은 사랑이라는 법과 충돌할 때,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사랑이 궁극적인 판단기준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성소수자와 동성애 문제에서 이 사랑의 법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현식: 오늘날 우리 시대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서를 율법책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김진한(베리타스): 교수님이 트랜스페미니즘으로 넘어가는 계기는, 그리고 정치신학으로 넘어가는 계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이신지요? 이전의 여성신학은 성차의 이분법에 다시 갇혀버리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넘어가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만. 아울러 incarnation으로부터 intercarnation 개념으로 넘어가시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켈러: 좋은 질문이십니다. 제 생각에 만일 페미니즘이 원활하게 잘 수행되어 왔다면 불필요한 개념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페미니즘의 한계들이 지적되어왔고, 그래서 페미니즘은 낡은 개념이라거나 불필요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이 낡은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트페미니즘'이 페니니즘 이후(post-)를 의미한다면 말입니다. 비록 페미니즘에 한계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온전히 실현된 적도 없습니다. 트랜스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끝났다는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한 저의 신학적 대안모색의 노력입니다.
아울러 여러 다른 종교전통들 속에서 저는 성육신의 단초들을 보지만, intercarnation은 그것을 하나의 실체론적인 존재 안에서 보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실현되어가는 성육신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얽혀있고,' 이렇게 한국의 여러분들과 얽힘을 새롭게 엮어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전현식: 지금까지의 신학자들과 달리 생성과 차이에 근거한 켈러 교수님의 신학이 이렇게 소개될 수 있어 무척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