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40년, 그리고 그 몰락②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
먼저 사적 금융자본은 ‘공공의 책임성’이 없다. 이윤을 낼 수 있는 곳이면 땅 끝까지도 찾아가지만, 자신의 기대가 거품으로 판명되었을 때 즉각 그 비용과 손실을 ‘사회화’ 한다. 가한 자들에게 전가한다는 말이다. 또한 사적 금융자본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를 본업으로 한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거래되는 하루 약 1.5조 달러의 천문학적인 자본 가운데 단지 2.5%만이 실물경제에 쓰이고 있으며, 나머지 97.5%는, ‘약탈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알려진 헤지 펀드에 의해 주도되는, 단기성 투기다. 그래서 누군가는 분명 돈을 벌지만, 일자리가 창출되지도, 공장이 새로 지어지지도, 그리고 작은 부품 하나가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이러면서 금융자본은 우리가 사는 실제세계와의 연관성을 상실했다. 브레턴우즈 시스템이 붕괴된 1970년대 초반 이후 금융경제가 실물경제보다 비대해졌으며, 실제의 생산과 교환활동에 복무해야 할 자본은 실물경제로부터 분리되어 추상화되었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는 1980년대 초 시작된 ‘레이거노믹스’로부터 본격화되었다. 레이거노믹스 아래서 1929년의 대공황 이전까지 세계경제를 주물렀던 전업 투자은행(IB)들이 다시금 금융자본주의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컴퓨터와 수학 및 공학의 발달까지 이뤄지면서 이들 전업 투자은행들은 소위 파생금융상품이란 걸 만들어 그 규모를 50조로 달러로 키웠다. 스스로는 첨단 금융기법을 개발했다며 ‘리스크 제로’의 환상에 취했다. 자기 자본의 100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 이리저리 투자하는 위험천만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미국의 금융자본은 아무런 규제 없이 국경을 넘나들었고, 이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제조업이 거덜 난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지탱시키는 힘이 됐다.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비판이 거셌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종과 오만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이번 월가 금융사태의 뇌관 구실을 한 파생금융상품 CDS(Credit Default Swap)에서 엿볼 수 있듯이, 대형 투자은행들이 벌이는 머니게임 속에서 리스크는 결코 죽지 않았다. 다만 시한폭탄처럼 이리저리 떠넘겨졌을 뿐이다.
이런 특성의 금융 자본주의 아래서 부(富)는 어떻게 창출되는가? 주목할 것은 국제 금융시스템이 ‘부채’를 창출함으로써 (가치가 아니라) 돈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사실 급속하게 축적되어 온 국제 금융자산의 대부분이 부채다. 빚이란 말이다. 현재의 금융시스템은 실질 가치를 창조하지 않고도 부채의 창출을 통해 부를 창출할 수 있으며, 자산 가치의 증식을 통해서도 부를 창출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현대 금융자본주의 아래서 돈은 이제 거의 순수한 추상물이 되고 있으며 화폐의 창조는 가치의 창조에서 분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순수한 추상물이 되어버린 부를 복제하면서 시장 투기를 통해 부의 환상을 창조하는 현대 금융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산에 필요한 단 하나의 실질적 가치도 없이 돈을 창조할 수 있는, 그러니까 돈을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할 수 있는 금융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신학적 물음을 교회는 던져보기나 했는가? 다음으 ㅣ글을 읽으며 마음에 찔림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얼마나 되겠는가?
잘나간다는 차이나 펀드나 남들 다 한다는 펀드 몇 개에 소액 자산을 쪼개 넣었다… 복잡한 파생상품 설명에 질리자, 호기롭게 그냥 질렀다. 잠깐은 재미도 봤다. 수익률 예상 조회를 해 보면, 하루만에도 몇 달치 은행 이자만큼이 붙어 있었다. 어디서 그런 돈이 오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중국 경제가 자동차를 팔아 돈을 버는지, 가짜 시멘트나 멜라민을 가득 탄 우유로 수익을 내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개중 어설픈 개미 투자자였겠지만, 상당수 보통 사람들도 펀드 수익이 발생하는 근원을 따져보는 대신 펀드사 이름값에 휘둘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미국발 금융 대공황이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상품 생산과 거래를 제쳐두고 돈만으로 돈을 벌어들인다는 파생상품의 수익 잔치는 거대한 사기극이었음이 들통났다.
과연 이 ‘거대한 사기극’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얼마나 될까? 시장이 미쳐 돌아가면서 이른바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온통 불로소득을 쫓아다닐 때, 그리고 세계 외환시장의 변동에 따라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한몫 잡겠다고 온 세상이 미쳐서 날 뛸 때,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런 식으로 ‘나의 풍족함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일’이 다름 아닌 죄라고 설교하고 가르쳤는가? 성실하게 땀 흘려 노동하지 않고 누리는 부가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로 자연에 대한 약탈의 결과라고 가르쳤는가? 아니 교회는 오히려 청빈(凊貧)이 아니라 청부(凊富)가 ‘성경적 원리’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요즘은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직자들까지도 경쟁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집단적인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 넘치게 살면서도 현재의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개발하고, 발전하고, 또 경쟁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이 땅에서 성공, 죽어서는 천당’이 되고 만다. 지금 여기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것을 깊이 회개해야 한다. 이 세계와의 종말론적 긴장관계를 잃어버리고 강자의 편에 서서 피 묻은 돈으로 바친 헌금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기도해준 공범관계를 통렬히 자복해야 한다. 과거의 독재자들은 ‘강압’으로 국민을 지배했다. 금융자본이라는 오늘날의 맘몬은 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무기로 우리를 지배한다. 스리랑카의 신학자 알로이스 피에리스(Aloysius Pieris)는 ‘가난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poverty)가 ‘가난으로부터 오는 자유’(freedom that comes from poverty)와 결합되지 않으면 우리는 맘몬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단언했다.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처음으로 할 일은 부의 신 맘몬으로부터 생명의 신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회심’하는 것이다. ‘돈 신’에 대한 우리의 은밀한 사랑과 비겁한 굴종으로부터 영적·정신적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경제 위기 시대에 무엇보다 먼저 요청되는 기독교적 영성(spirituality)이다. 바로 이런 영성이 생태적 영성과 결합되지 않으면 우리의 ‘자연 사랑’은 반쪽짜리 영성이 되고 만다.
-기후변화의 현실과 교회의 대응(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