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림을 그린 캔버스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 이상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 사실이 나에게 그림을 그릴 권리를 주며,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래,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 9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이다. 고흐는 그림 그리는 일을 ‘힘든 노동과 딱딱한 계산을 병행하는 일'이라고 했다. 또 한 번은 흰 캔버스에서 공포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고흐는 그림 그린 캔버스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담아냈다. 고흐는 이 일을 권리이자 이유라고 주장했다.
도로타 코비엘라 감독은 이런 고흐의 예술혼에 매료됐나 보다. 도로타 감독은 특히 고흐가 생을 마치기 전 보냈던 6주간의 시간에 주목한다. 그 작품이 바로 <러빙 빈센트>다. 그런데 도로타 감독은 고흐가 보낸 최후의 시간을 그냥 판에 박힌 기법으로 재현해내지 않는다. 고흐가 그랬듯 도로타 감독도 ‘힘든 노동'과 ‘딱딱한 계산'을 병행해 ‘그려낸다.'
오프닝만 봐도 도로타 감독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노란 집', ‘즈아브 병사의 반신상' 등 고흐의 대표작 3편을 모티브로 했다. 특히 구름과 달이 일렁이는 첫 장면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고흐의 작품 애호가들에게 오프닝은 고흐에 대한 오마주(프랑스어로 '경의, 존경'을 뜻하는 말로, 영화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업적이나 재능에 경의를 표하는 것 - 글쓴이)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오프닝 장면을 완성하는데만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작업이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과정은 더욱 놀랍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107명의 화가가 6년 여에 걸쳐 총 62,450여 점에 달하는 유화를 그려서 전편을 완성해 냈다고 하니 말이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 사실 시각적인 면에 비해 이야기 전개는 진부하다.
먼저 이야기의 뼈대를 살펴보자. 주인공 아르맹 룰랭(더글러스 부스)는 고흐가 죽기 전 동생 테오에게 남겼으나 전하지 못한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오베르쉬아즈로 떠난다. 룰랭은 이 일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조셉 룰랭(크리스 오다우드)의 뜻이 확고해 그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룰랭은 테오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래서 화구상인 탕기 영감, 여관주인 아들린 라부, 가셰 박사와 그의 딸 마르그리트 등 고흐가 생전에 접촉했던 인물들을 찾아 퍼즐을 맞춰 나가기 시작한다.
룰랭은 이 과정에서 고흐가 타살당했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가셰 박사는 단호한 어조로 자살이라고 결론 짓는다. 가셰 박사는 타살정황을 제기하는 룰랭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빈센트가 캔버스마다 빛나는 별을 그렸거든. 하지만 그 별들은 깊고 텅 빈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지. 그는 미래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어."
타살 정황으로 흐르던 이야기는 룰랭과 가셰 박사의 대화에서 순간 맥이 빠져 버린다. 이 같은 이야기 구성으로 볼 때, 차라리 품이 많이 드는 유화 에니메이션 보다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구성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내게 그림은 구원이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유화로 가득 채운 화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풀렸다. 생전에 고흐는 유화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적었다. 고흐는 1882년 8월 테오에게 아래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유화이다. (중략) 요즘 유화를 그리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자유를 얻는 느낌이다. 전에는 얻을 수 없었지만 결국 가장 내 마음을 끄는 성과를 얻게 해주는거다. 유화는 내게 아주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새로운 수단을 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나를 아주 행복하게 한다."
유화에서 행복을 느꼈던 고흐의 마지막 삶의 궤적을 유화로 재현해 낸 건 참으로 적절했다. 도로타 감독 스스로 지난 8월 <시네21>과의 인터뷰에서 "반 고흐의 생을 표현하는 이번 영화에서는 사랑을 담아 한장 한장 그려나가는 방식이 필요했다고 믿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야기 구성의 완성도와 별개로 유화 에니메이션 자체만으로도 <러빙 빈센트>의 가치는 빛난다.
지금은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생전에 고흐의 삶은 불행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고흐에게 그림은 자기 구원의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고흐의 예술혼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유화로 엿볼 수 있었음은 평소 고흐를 좋아했던 내겐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예술가가 되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수는 없지. 소망하는 것을 터뜨리기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 빈센트 반 고흐, 18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