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하나님께 이른다
창세기 28장 16~19절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꼐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디모데후서 1장 5~7절
나는 그대의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합니다. 그 믿음은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대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깃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를 일깨워서, 내가 그대에게 안수할 적에 그대가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금 불붙게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38절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때는 서른 살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여기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요,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맛단, 레위, 멜기, 얀나, 요셉, 맛다디아, 아모스, 나훔, 에슬리, 낙개, 마앗, 맛다디아, 서머인, 요섹, 요다, 요나안, 레사, 스룹바벨, 스알디엘, 네리, 멜기, 앗디, 고삼, 엘마담, 에르, 예수, 앨리에서, 요림, 맛닷, 레위, 시므온, 유다, 요셉, 요남, 엘리아김, 멜레나, 멘나, 맛다다, 나단, 다윗, 이새, 오벳, 보아스, 살라, 나손, 아미나답, 아드민, 아니, 헤스론, 베레스, 유다,. 야곱, 이삭, 아브라함, 데라, 나훌, 스룩, 르우, 벨렉, 헤버, 살라, 가이난, 아바삿, 셈, 노아, 레멕, 므두셀라, 에녹, 야렛, 마할랄렐, 가이난, 에노스, 셋, 아담,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 이른다.
오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평소에 잘 생각해보지 않았던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해준 복음서 기자의 뜻을 생각해 보면서, 어떻게 내 인생을 바르게 성취 시켜야하는지 생명실타래의 맨끝위와 맨끝 아래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은 누가복음서 본문에서 따서 "마침내 하나님께 이른다"로 삼았습니다.
성경을 한번 통독하려고 큰 맘먹고 달려든 우리 자녀들이 고만 성경통독이라는 장한 생각을 포기하고서 넘어지는 마의 함정이 두곳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구약의 레위기와 민수기요, 신약에서는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내용을 읽을 때입니다. 발음도 잘 안되는 히브리사람들의 희한한 이름들과 12지파 인구통계 숫자들을 그래도 처음 10분동안 쯤은 한구절씩 짚어가며 꾹 참고 읽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엔 몇 구절씩 건너뛰면서 읽게 되고, 15분이 마의 계곡인데 점점 짜증이 나고, 부아가 나고, 불평이 맘속에 솟구쳐 나면서 고만 성경을 덮어 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 옛사람의 족보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고대 이스라엘의 케케묵은 인구조사 기록문서를 왜 지금 내가 읽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슬며시 역정이 납니다. 어찌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책 안에 이런 재미없는 내용이 들어와 있는가 하고 원망이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네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우리에게 남겨준 기자는 마태와 누가입니다. 마태와 비교하여 볼 때, 루가라고 하는 복음서 기자는 두가지 점에서 특이합니다. 그 첫째는 예수의 가계를 기록하되 강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에서 과거로, 맨 아래에서 맨 위로 올라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누가를 무슨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려고 이런 족보서술방식을 택했을까요? 마태의 다분히 구원사적 역사해석의 시각과 비교하여 볼 때, 누가의 족보서술 방식은 역사와 신화를 뒤섞으면서 할아버지가 화롯가에 앉아 밤톨을 구워주면서 그 손자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도란 도란 들려주듯이 이야기 형태를 취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어떤 상징적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음이란 마태가 강조하는 유대적-이스라엘적 역사와 혈통에 메여있는 민족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전 세계민족들, 전 우주를 포괄하는 보편적 복음이라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인데, 인간생명을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면 전능자 하나님에게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생명의 시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저 유명한 야곱의 하늘 꼭대기에 그 끝이 닿은 사닥다리 꿈 이야기를 잠깐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야곱은 형 에서와 아버지 야곱의 노여움을 피하여 먼 하란 땅 삼촌을 찾아 들판을 걸어가다가, 루스성 근방 어느 들판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었습니다. 야곱은 돌하나를 주아 베개삼아 피곤한 몸에 잠이 들었는데, 희한한 꿈 하나를 꾸게 되었습니다. 꿈인즉,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어마어마하게 긴 사닥다리가 있는데, 그 한쪽은 하늘 끝에 닿았고, 다른 한쪽 끝은 바로 자기가 누워있는 땅에 닿아있는 것 아닙니까? 꿈을 꾸려면 야곱의 꿈같은, 돼지새끼들이 올망졸망 어미젖을 빠는 꿈, 큰 돈을 벌거나 횡재한다는 돈꿈이나 꾸기를 바라니까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이러고 있는가 봅니다. 여하튼 청년 야곱이 어마어마한 큰 꿈, 멋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만 댕그렇게 걸려 있는 꿈이 아니라, 그 사닥다리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이 하늘 끝에 닿은 사닥다리의 층계를 오르고 내리는 모습하며, 거룩한 하나님같은 분이 그 층계 꼭대기에서 말씀하시는데, "나는 주 하나님인데,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네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준 하나님이다. 내가 너도 축복하여 너와 네 자손에게 지금 네가 누워있는 이 땅을 주겠다. 그리고 언제나 너를 지켜주고, 너와 동행해 주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꿈이었습니다.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은 꿈이었지만, 야곱은 예사스러운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자기가 누워있었던 이곳에 현존하시는 것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룩한 그 무엇이 그를 감싸는 듯 느꼈습니다. 그래서 거룩체험의 특징인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곱은 두려워 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그 말을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죽어서 들어가는 머나먼 저 은하수 건너가서 있는 집이 아니고,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이구나, 여기가 곧 하늘의 문이구나. 비록 사닥다리라는 상징적 물건을 통하여, 이곳과 저곳이, 하늘과 땅이, 영원과 시간이, 구별되어야 하지만 딱 갈라져 있는 별천지 먼 세계가 아니라, 서로 통해 있고 잇데어 있다는 깨달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사닥다리 한쪽 끝은 하늘에 닿아 있지만, 다른 한쪽, 이 쪽 끝은 지금 이 잠자리를 편 이곳, 밥지어 먹고 사는 이곳, 분단현실과 아이엠에프 경제환난으로 고난당하는 이곳에 내려 꽂혀 있다는 자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비극은 경제위기나 분단상황이 지정 위기가 아니라, 야곱같이 꿈을 꿀줄 모르는 현세적 경제동물이 되어버렸다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곳이 곧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다"고 야곱은 감격해서 옷깃을 여미었는데, 한국 그리스도인들중 뜨겁게 믿는 신도들일수록 이곳은 불에타 없어져 버릴 곳이요, 사탄마귀가 득시글거리는 버림받은 땅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여기'의 거룩함을 모르는데 정말 위기가 있습니다.
오늘 디모데 후서 1장을 보면, 바울사도가 일너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그대의 거짓없는 믿음을 기억합니다. 그 믿음은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대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깃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젊은 디모데라는 청년의 심령속에 믿음의 유산으로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그의 모친 유니게에게 있었던 믿음이 살아 숨쉬고 전승되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받은바 믿음의 유산과 은사를 까먹지 않고 더욱 불붙게 하여,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젊은 사역자 되기를 기도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메시지, 야곱의 사닥다리 꿈 이야기 그리고 디모데에게 보낸 사도의 편지 그 세가지에는 무엇인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각자의 생명은 하찮은 것 같지만 "마침내 하나님께 이른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우리 생명을 귀중하게 잘 감당합시다. 아무렇게 뒹굴게 내 팽개쳐서는 안됩니다. 우리 각자의 생명을 영근 알곡이 되도록 완성시켜야 합니다. 특히 믿음의 유산을 잘 지키고 전달시켜 가야 합니다.
그 점을 분명히 자각한다면, 이삼년간의 경제시련도, 야곱이 들판에서 벧엘의 꿈을 꾸고 거뜬이 고난을 이기면서 20년 머습생활을 한 후 당당히 이스라엘 민족을 일궈 내듯이, 창조적 꿈을 키우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마침내 하나님께 이르고, 우리 일상생활의 삶의 터는 하늘에 가 닿아있음을 명심하면서 살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