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은 있는가?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한국교회환경연구소장) |
비판은 쉽다. 하지만 대안은 있는가? 다행히 고삐 풀린 금융자본의 파괴행위를 제어하기 위한 국제적 거버넌스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세계 에큐메니칼 기구를 통해, 지구촌 경제에 절실한 것은 투기에 기초하지 않은 금융체제이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역경제의 이익에 복무하는 금융체제임을 주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로의 복귀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의 시장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는 것이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보다 근원적이고(radical) 현실적인(realistic)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첫째 경제의 ‘지역화’, 둘째 화석연료에 기초한 현 인간문명으로부터의 탈피, 셋째 ‘생태경제’로의 문명사적 전환이다.
첫째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근본적 대안으로 경제의 ‘지역화’(localization)가 모색되어야 한다. 이 말은 지금의 팽창지향적인 단일 지구촌 경제모델을 버리고 세계경제를 ‘작은 규모’(small scale)의 지역경제로 재편하고 다원화하여 그들 간의 평등하고 호혜적인 상호협력관계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리적으로 큰 시장이 더욱 효율적이며 번영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일찍이 슈마허(E.F.Schumacher)는 이런 생각을 ‘거대망상증’(giantism)이라고 강력 비판했으며, 언제나 자연환경에 덜 유해한 작은 규모로 세계 경제를 재편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가 걸린 사활적 과제라고 역설한 바 있다. 대규모 시장경제는 언제나 자원 집약적이며, 경제의 규모가 커질수록 비용은 당연히 증가한다. 요점은 자연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경제활동 규모도 반드시 그 한계 안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인간경제는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서 고작 5백여 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작은 규모의 지역 자립경제로 되돌아가야 한다. 친환경적인 작은 규모의 지역경제들이 거대한 국제시장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래 땅과 함께 숨쉬며 살았던 세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대안은 화석연료에 기초한 현재의 에너지 문명에서 탈피하는 것과 병행되어 찾아져야 한다.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피크오일(peak oil) 그리고 자원의 고갈이 이른바 ‘전 지구적 삼중 위기’(global triple crises)로 지목된 지 오래다. 지금 월가의 붕괴 이후 ‘시장의 실패’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시장의 실패란 시장 매커니즘으로 효율적인 자원 분배가 이뤄질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월드워치연구소(World Watch Institute)의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 박사는 무엇이 ‘진정한’ 시장의 실패인지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은 월가가 아니라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우리의 인간 문명 그 자체다. 그 핵심 원인은 시장 가격에 ‘진실’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종 석유 제품이나 육류의 시장 가격에는 지구온난화나 사막화 등의 간접적인 비용이 반영돼 있지 않다.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가격이 포함되지 않고 싸게 공급되다 보니 당연히 자원이 고갈되고 과잉 개발된다. 이렇게 시장이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석유와 육류의 소비가 많아지고 우리는 그 문화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철저한 실패다. 많은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정유 공장은 대기오염이나 지구온난화 등 사회적 비용을 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정유 가격에 이 비용을 포함시키지 않아 사회적으로 적정한 수준 이상의 소비를 초래할 수 있다. 문제는 누군가 이 비용을 반드시 부담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짜 점심’(free lunch)은 없다. 언제, 누가 부담하는가만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모두가 그 대가를 치러하여 하는 때가 왔다. 우리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현재의 문명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탈출하려면 우리는 특정지역에 묻혀 있는 석유자원이 아니라 이 세상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골고루 내리시는 태양빛과 또 지구의 70%를 이루고 있는 물에 의존하는 에너지 문명으로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이것은 가능한 일이고, 여기에 교회가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셋째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근원적인 대안은 생태경제로의 전환이다. 현재의 경제 위기로부터의 탈출은, 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며 경제적 발전이 곧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기존의 경제적 신앙과 가설들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고전적 자유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케인스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비록 그들이 시장과 국가와 자본주의에 관해 서로 적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끝없는 ‘물질적 진보’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다. 그들은 모두 서구 계몽주의의 자식들이다.
사실 지금까지 무한한 경제발전이 가능한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온 이유는 경제를 자연에서 고립된 것처럼 그리고 또한 인간의 경제 안에 자연이 한 하부구조로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Herman E. Daly)가 주장하다시피, 경제란, 그 물리적 차원에서, “유한하고, 성장하지 않으며, 물질적으로 닫힌 지구의 에코시스템 아래 존재하는 열린 한 하부구조”다. 이런 견해에서는 에코시스템(창조질서)이라는 큰 원 안에 인간의 경제라는 작은 원이 포함된다. 데일리에 의하면, 어떤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경제성장은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왜 지속가능하지 않은가 하면, 인류는 이미 ‘최적의 규모’(optical scale), 즉 더 이상의 성장은 그 성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만드는 어떤 지점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간디가 남긴 말처럼, 우리의 지구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need)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욕심(greed)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때문에 가난의 문제 해결은, 데일리가 주장하듯이, 이미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고 또한 환경적으로도 지탱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배정의의 실현과 인구증가의 억제와 같은 사회적 관계의 개혁, 즉 ‘질적 발전’(qualitative development)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데일리는 우리에게 ‘불가능성의 원리’(impossible theorem)를 제시한다. 이 원리는 세계 경제가 성장을 통해서는 가난과 환경파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원리다. 좀 더 단순히 표현하면 미국식 고도 자원소비 방식의 경제로는 60억 인류의 빈곤과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원리다. 마치 무한정 책을 사 모으기만 하고 버리지 않는 도서관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듯이, 영원한 경제 성장은 불가능하고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멈춰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원리에 의하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성장’(sustainable growth) 혹은 ‘녹색 성장’(green growth)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실 데일리에게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용어는 ‘나쁜 모순어법’에 속한다. 왜냐하면 성장에다가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형용사를 붙이거나 녹색 물감을 칠함으로써 마치 여전히 성장이 가능한 것처럼 믿도록 우리를 속이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지금 반드시 단행해야 할 문명사적 전환을 다시금 연기시킴으로써 결국 그 전환의 고통을 배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데일리에 의하면, 성장에 대한 대안은 지속가능한 성장 혹은 녹색 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다. 경제의 목표는 ‘무한한 빵’이 아니라 ‘충분한 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예수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의 작은 실천에서부터 대안적 삶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은 매일 우리의 ‘먹는 일’부터 시작한다. 생명밥상 운동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경제 지역화의 핵심이 ‘안전한 먹을거리 문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라면, 지속가능한 생태 소농 공동체를 꾸려내기 위한 지역 간 도농연대가 교회의 구체적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귀농운동은 경제논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신앙이 없으면 못하는 운동이기에 교회가 앞장설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질문을 물으신다. “아담아(농부야),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인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또한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빈곤층 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대안화폐 운동도 유망하다. 교인들 간의 상호부조가 이미 보편화되고 있는 교회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큰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착한 소비 운동 혹은 윤리적 소비 운동도 교회가 앞장서서 전개할 수 있는 생활운동이다. “Fair trade, not free trade!”를 표어로 공정무역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가장 작은 실천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SRI) 운동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대출과 무함마드 유누스가 창설한 그라 은행의 ‘서브 서브 서브프라임 대출’의 차이는 간단하다. 미국의 은행은 이윤극대화를 위한 은행이다. 혹 한국교회가 서브 서브 서브프라임과 같은 이런 대안적 금융을 꿈꾸고, 제안하고, 교회가 가진 물적 자원을 통해 실현해볼 길은 있을까? 한국 개신교회가 가용한 자금이 3조이며 이는 가톨릭이나 불교에 비해 거의 10배에 이른다는 보도에 이러한 제안을 던져 본다. 물론 꿈 같은 이야기다.
-기후변화의 현실과 교회의 대응(5)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