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휴

우리의 유토피아 vs 그들만의 유토피아

커버스토리] 젊은이들, '유토피아'라는 말만 들어도 지레 겁먹어"- 앙드레 지드

  [7호] 2009년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info@ilemonde.com  
전통적 지배체제 극복한 '서로 돕는 사회' 가능
완전히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하자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은 “모두가 꿈을 꾸고 있는 기나긴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리고 꿈을 꾸고 있는 기나긴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다음을 상기시켰다. “얼마나 많은 의지박약한 젊은이들이 스스로 용맹함으로 충만한 줄 알다가 ‘유토피아’라는 말만 듣고도 지레 겁을 먹고는, 분별 있는 이들의 눈에 공상가로 비쳐질까 두려워했던가. 인류가 이룩한 모든 위대한 발전이 다름 아닌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길인데 말이다.”1)


그러나 세상을 바꾸려면 인류학자, 경제학자, 역사가, 투사들이 몽상적인 광대 구실에 스스로를 가두어서 좋을 게 없다. 성격만 좋고 실속은 없으며, 현실 기틀의 구축자라는 유리한 처지를 상대편에게 넘겨줄 가능성이 농후한 그런 광대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로 어떤 유토피아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는 유토피아적 영감에 불과 하던 것들이 이제 위정자들의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프랑스 자크 베커와 장 르느와르의 공동작품 <인생은 우리 것>(1936) 

 

칼 폴라니,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 부정

 

경제역사학과 사회인류학을 넘나드는 분석에서 출발한 칼 폴라니는 1944년 발표한 저서에서, 세계는 ‘거대한 변형’을 통해 ‘자기 조절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벗어던졌다고 보았으며(즉, 사회의 제도적 규제 없이 자가 조정이 가능한 시장은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이제 그 전환 과정이 완료됐으므로 ‘전례 없는 자유 시대가 시작’돼 ‘사회 현실과 직접적으로 조우’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했다.2)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폴라니가 이미 지나간 과거라고 보았던 것은 다시금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거대한 변형의 자리를 거대한 복원이 대신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복원은 다시 “사회의 자연적인 상태”3)로 소개되면서 세력을 구축하려 든다. 여전히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이 금지된 채 말이다. 자본주의자들이 형성한 ‘이성의 클럽’은 반대자들, 즉 ‘유토피아주의자’들과 광인들에게 좀처럼 설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광기란 다른 데에 있다. 1776년부터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철학적 영구성을 이론으로 정립했다. 그는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와 교환하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어떤 성향”의 이름으로, 집단적 최적점과 경제적 이기주의들의 접점을 동일시하는 보편적 법칙을 상정했다. “도축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이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마련해주는 건 그들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해서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정이 아닌 자기애에 호소하는 것이며, 여기서 관건은 결코 우리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이 얻는 이익이다.”4)
 
애덤 스미스, 공리주의적 유토피아 주장
 

애덤 스미스는 예언자적인 실수를 범했다. 그는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자유를 논하는 인류학자이고 싶어했지만, 실은 산업적·상업적 맷돌을 논하는 미래예측학자였다. 폴라니는 이렇게 지적했다. “과거의 그릇된 해석 가운데 이토록 미래를 제대로 예고한 것은 없었다.”
“런던의 주식중개인이나 아이오와의 곡물상의 행동을 결정하는 시장 법칙이 잉카의 수도사, 영주, 사제와 트로브리앙 섬주민의 생활상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애덤 스미스의 놀랄 만한 자민족 중심주의”5)는 다른 이들도 강조한 바 있다. 인간을 영원히 계산적인 경제 동물로 간주하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유토피아는 어쨌든 훗날 시장사회로, 그리고 그것의 세계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에 이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새로운 신념과 새로운 법칙의 성질이 별로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이렇게 요약했다. “봉건 영주와 그의 자연적인 상급자들을 결합시켜준 복잡하고 다양한 모든 관계를 부르주아지는 가차 없이 끊어버렸고 오로지 냉혹한 이해관계, 매정한 현금 결제 요구라는 연결고리만을 남겼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희열, 기사도적 열정, 소시민적 감수성에서 비롯된 신성한 전율을 이기적 계산이라는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빠뜨려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성을 단순한 교환 가치로 삼아 버렸다. …마침내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 조건과 상호 관계를 환멸스런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늘 새로운 판로에 대한 욕구에 떠밀려 전세계를 공략한다. 그들은 곳곳에 진출해 곳곳을 착취하고 곳곳에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6)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장 중심 논리 비판


분명 시장경제가 있기 전부터 시장들은 존재했다. 하지만 서로 고립돼 있던 이들은 주변적인 동시에 기존 사회관계의 복잡성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리고 이들 시장에서는 “용기가 기사의 특성이고 신앙심은 사제의 특성이며 기술이 장인의 특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익 추구의 동기란 상인에게 고유한 특성이었다.”7) 과거에는 세 가지 의무에 따라 삶이 흘러갔다. 주기, 받기, 되돌려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증여의 논리’가 새로운 학문의 이름으로 무효화되면서 계약이 지위를 대신하고 “재화가 관계를 대체”8)하게 되었다. 폴라니는 “이러한 모험이 인류의 역사에서 결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강조한다. 이제는 굶주림에 대한 누군가의 두려움과 이익에 대한 또 다른 누군가의 갈증만이 인간을 경제생활에 참여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판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수입이 형성되는 것을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아울러 시장 조건 변화에 따르는 가격 변동에 대해 어떠한 개입도 이루어져선 안 된다.”

   
 

                                             독일 프리츠 랑 감독의 <메트로폴리스>(1926)

비극으로 끝난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이러한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인간을 짓이겨 덩어리로 만드는 악마의 공장” “수그러들 줄 모르는 잔혹한 공격” “과학만이 줄 수 있는 확신에 힘입어 작업에 단련된 이들이 사회라는 몸체에 가하는 생체 해부 행위”가 가장 먼저 맹위를 떨친 곳은 영국이다. 최저임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알아서 자신에게 적절한 대가를 시장에서 찾아야 했다. 때로는 굶주림이라는 대가가 주어지기도 했다. 1847년 아일랜드를 황폐화시킨 기아 사태처럼 말이다. 한 해 동안 사망한 주민은 5명 중 1명꼴이었다.9)
자유무역을 주장한 이론가인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사회보장이 “부와 힘을 빈곤과 약함으로” 바꾸어놓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때마침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염소와 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 결과에서 깨달음을 얻은 윌리엄 타운센드는 특정한 자극이 지니는 실효성을 증명해 보였다. “굶주림은 가장 난폭한 동물도 길들인다. 가장 사악한 이들도 정숙함과 세련됨, 순종과 복종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학설은 즉시 영국의 1834년 신빈민법에 적용된다. 한마디로 더 이상 이들을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을 들쥐에 비유한 것으로 모자라, 이들을 궁핍한 지경으로 만들고 나면 그 수가 줄어들 것임을 증명까지 해 보이지 않았던가! 미국 헌법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보다는 좀더 온건한 분위기로 1766년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공적 지원을 늘릴수록 이들은 스스로를 돌보는 노력을 덜하게 되며, 당연히 더욱 가난해지고 만다. 반면, 이들을 위한 도움을 줄일수록 스스로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고 빈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후로 표현 방식은 바뀌었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최근 결정된 사항들(사회 지원 일부 폐지, ‘위험 계층’에 대한 감시 강화)을 보면 기본 정신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다.10)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가 제아무리 자연적이고 과학적임을 자처하더라도 공적 개입이라는 구명조끼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는 노동과 토지에 관해 규제를 완화했고 금융시장을 창설 또는 확대했으며 질서를 확립했다. 폴라니도 이러한 모순을 역설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단순하고 자연적인 자유’를 인간사회의 필요와 양립시키는 것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정부 개입이라는 성벽을 세운 것은 토지, 노동, 지방행정 등의 단순한 자유를 일부 조정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이리하여 국가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철학을 전적으로 따르는 이들조차 자유방임 구축에 필요한 새로운 권한과 기관, 도구를 바로 그 국가에 부여해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행정 및 정부라고 하는 기계는 단일 통화와 시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력 가동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각종 규제 사항이 빼곡한 2천 쪽에 달하는 문서다. 민족국가를 마비시키고 복지국가를 파괴하며 투자자들의 신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귀중한 상상력과 재치를 총동원했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란 참으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늘 누군가의 지원을 필요로 하니 말이다.
1873년의 경제위기와 보통선거의 확대로 경제가 다시 사회 속에 닻을 내릴 당시 “유럽에서는 자유무역이 한창이었다. 국가와 국민들은 더 이상 공연의 주최자가 아닌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이들은 실업과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은행과 관세를 이용했고, 이민법도 여기에 보완적인 도움을 줬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모순이 드러난다. “자유방임 경제가 국가의 의도적인 행동으로 생겨난 반면, 이후의 제한 조처들은 자발적으로 시작됐다. 자유방임주의는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계획 수립 자체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시장 유토피아’의 실패, 그리고 경제의 탈사회화에서 비롯된 혼란의 위험으로 인해 산업국가들은 그 국민성과 역사를 막론하고 모두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비록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어찌 보면 2008년 가을의 상황과도 닮지 않았는가?

이러한 “자유주의적 유토피아” “인간을 짓이겨 덩어리로 만드는 악마의 공장” “수그러들 줄 모르는 잔혹한 공격” “과학만이 줄 수 있는 확신에 힘입어 작업에 단련된 이들이 사회라는 몸체에 가하는 생체 해부 행위”가 가장 먼저 맹위를 떨친 곳은 영국이다. 최저임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알아서 자신에게 적절한 대가를 시장에서 찾아야 했다. 때로는 굶주림이라는 대가가 주어지기도 했다. 1847년 아일랜드를 황폐화시킨 기아 사태처럼 말이다. 한 해 동안 사망한 주민은 5명 중 1명꼴이었다.9)자유무역을 주장한 이론가인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사회보장이 “부와 힘을 빈곤과 약함으로” 바꾸어놓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때마침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염소와 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 결과에서 깨달음을 얻은 윌리엄 타운센드는 특정한 자극이 지니는 실효성을 증명해 보였다. “굶주림은 가장 난폭한 동물도 길들인다. 가장 사악한 이들도 정숙함과 세련됨, 순종과 복종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학설은 즉시 영국의 1834년 신빈민법에 적용된다. 한마디로 더 이상 이들을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을 들쥐에 비유한 것으로 모자라, 이들을 궁핍한 지경으로 만들고 나면 그 수가 줄어들 것임을 증명까지 해 보이지 않았던가! 미국 헌법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보다는 좀더 온건한 분위기로 1766년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공적 지원을 늘릴수록 이들은 스스로를 돌보는 노력을 덜하게 되며, 당연히 더욱 가난해지고 만다. 반면, 이들을 위한 도움을 줄일수록 스스로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고 빈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후로 표현 방식은 바뀌었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최근 결정된 사항들(사회 지원 일부 폐지, ‘위험 계층’에 대한 감시 강화)을 보면 기본 정신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다.10)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가 제아무리 자연적이고 과학적임을 자처하더라도 공적 개입이라는 구명조끼가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는 노동과 토지에 관해 규제를 완화했고 금융시장을 창설 또는 확대했으며 질서를 확립했다. 폴라니도 이러한 모순을 역설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단순하고 자연적인 자유’를 인간사회의 필요와 양립시키는 것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정부 개입이라는 성벽을 세운 것은 토지, 노동, 지방행정 등의 단순한 자유를 일부 조정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이리하여 국가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철학을 전적으로 따르는 이들조차 자유방임 구축에 필요한 새로운 권한과 기관, 도구를 바로 그 국가에 부여해줄 수밖에 없었다.”오늘날에도 유럽의 행정 및 정부라고 하는 기계는 단일 통화와 시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력 가동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각종 규제 사항이 빼곡한 2천 쪽에 달하는 문서다. 민족국가를 마비시키고 복지국가를 파괴하며 투자자들의 신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귀중한 상상력과 재치를 총동원했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란 참으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늘 누군가의 지원을 필요로 하니 말이다. 1873년의 경제위기와 보통선거의 확대로 경제가 다시 사회 속에 닻을 내릴 당시 “유럽에서는 자유무역이 한창이었다. 국가와 국민들은 더 이상 공연의 주최자가 아닌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이들은 실업과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은행과 관세를 이용했고, 이민법도 여기에 보완적인 도움을 줬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모순이 드러난다. “자유방임 경제가 국가의 의도적인 행동으로 생겨난 반면, 이후의 제한 조처들은 자발적으로 시작됐다. 자유방임주의는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계획 수립 자체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시장 유토피아’의 실패, 그리고 경제의 탈사회화에서 비롯된 혼란의 위험으로 인해 산업국가들은 그 국민성과 역사를 막론하고 모두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비록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어찌 보면 2008년 가을의 상황과도 닮지 않았는가?

영국의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독일의 로마 가톨릭교도와 사회민주주의자, 프랑스의 교회 반대자들과 성직자들이 “사회를 전반적인 와해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노력을 공격 전선만큼이나 광범위하게 펼쳤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거대한 변형’이다. 이로써 근로계약을 규제하고 사회화했으며, 아동보호법을 제정하고, 위생 규정을 마련하고, 기초생필품 가격을 통제하며, 투자 방향을 정해주었으며, 재분배 경제 영역을 확대하고, 시장에서 통화 주도권을 빼내어왔다. 이리하여 19세기 말의 ‘현대성’은 이러한 기득권들을 되찾으려는 집요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아울러 사회 해체를 유발한 후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신고전주의적 유토피아를 복원하려는 의지이기도 했다.11)
 

그렇다면 도그마가 한 번 더 파열함으로써 지난 30년간 차례로 폐색된 민주적 공간들이 다시 뚫리기만 기다리면 될까? 그러한 기대가 위험한 만큼 새로운 유토피아의 제시가 시급해 보인다.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자기 조절 시장이 와해되면서(1873~96년과 1929 ~35년) 여러 유형의 대응 방안이 등장했다.12) 그중 하나는 권위적이며 파시스트적인 것으로서 봉건영주들의 위협받던 권력을 강화해주었다. 봉건영주들은 혼돈에 맞서 본성의 미덕과 본성을 가꾸는 자들의 미덕을 옹호하는 역할을 자처한 이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봉착한 막다른 골목이 모든 민주적 제도를 제거하는 대가로 구현한 시장경제 개혁”을 통해 출구를 확보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다행히도 또 다른 유토피아가 있었다. 전통적 지배체제를 복원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는 상호부조 시스템을 꿈꾸던 유토피아다. 이는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그의 저서 <프롤레타리아들의 암흑>13)에서 끄집어낸 ‘이카리아’, 즉  정치이론가 에티엔 카베(1788∼1856)의 철학소설 <이카리아 여행>에 등장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다.14) 기존의 것을 수호하는 임무를 거부하며, 늘 같은 이들에게 순종과 감내를 강요하는 숙명의 메커니즘을 해체하는 유토피아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유토피아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1936년 6월, 1944년 8월, 혹은 1968년 5월의 어느 날 변함없이 꿋꿋이 서도록 버텨올 수 있었다. 실제로 승리를 거둔 적들도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게 된 고용주, ‘돈의 장벽’에 덜 예속된 국가, 이와 같은 사회적 쟁취들은 필연적으로 따라온 것들이 아니다. 현재 이들을 무효화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유토피아도 나머지 다른 유토피아만큼의 가치는 있다. 그리고 이 유토피아 덕분에 우리가 배운 점이 있다. 함께 모여 있으면서도 홀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시대이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에만 살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이다.
번역•최서연

<각주>

1) 시인 루이 아라공, 1924. 소설가 앙드레 지드 1935.
2) 칼 폴라니, <거대한 변형,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기원>, 갈리마르, 파리, 1984. 이 위대한 사회과학의 고전은 원서 출간 후 40년 만에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됐다. 별도의 주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본고의 인용문들은 모두 이 번역서에서 발췌했다. 미셸 세르베, 제롬 모쿠랑, 앙드레 티랑, <칼 폴라니의 현대성>, 라르마탕, 파리, 1998 참조.
3) 투기자들의 독재를 중력의 법칙에 비유한 알랭 맹크의 표현. 그는 자신이 사업가이면서도 지식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시장에 대항하는 사고는 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4) 애덤 스미스,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조사>)(‘국부론’), 프랑스대학출판국(PUF), 1995, 제I∼II권, 15∼16쪽.
5) 조지 달튼, <원시, 고대 그리고 현대경제: 칼 폴라니의 에세이>, 베이컨 출판, 보스턴, 1971, XXVIII.
6)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에디시옹소시알, 파리, 1970. 34∼35쪽.
7) 칼 폴라니, <우리의 낡은 시장 정신>, 조지 달튼, 같은 책, 67쪽.
8)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의 표현.
9) 이브라임 바르드, ‘자유무역으로 아일랜드가 굶주릴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6년 6월 참조.
10) 로랑 코르도니에, ‘실업자와 전쟁 중인 경제학자’, 로랑 와캉, ‘클린턴 대통령이 빈곤을 ‘개혁’할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각각 2006년 12월, 1996년 9월 참조.
11) 피에르 부르디외, ‘신자유주의, 무제한적 착취의 (실현 과정에 있는) 유토피아’, <콩트르 푀> 중, 리베르레종다지르, 파리, 1998 참조. 아울러 ‘뉴질랜드, 완전 자본주의의 시험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4월 참조.
12) 피터 구레비치의 명쾌한 저서, <고난기의 정치: 국제 경제위기에 대한 비교 대응책>, 코넬대학출판부, 이타카, 1986 참조.
13) 자크 랑시에르, <프롤레타리아의 암흑: 노동자 꿈의 기록>, 파야르, 파리, 1981.
14) ‘이카리아’는 정치이론가 에티엔 카베(1788∼1856)의 철학소설 <이카리아 여행>에 등장하는 공산주의적 이상 국가의 이름이다.


(기사제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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