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삭개오작은교회)
1. 들어가는 말
주제를 밝혀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단계적 성찰을 밟아가 보기로 한다.
(i) 영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
(ii) 기독교 영성의 기본구성소 및 고유성
(iii) 기장교단 발족이후 교단에 형성된 영성신학의 몇가지 흐름
(iv) 21세기 문명전환과 생태학적 위기 속에서 기장 영성운동의 방향과 과제
2. 영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
성경엔 하나님에 대한 비은유적 혹은 비상징적 언명으로서 세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출3:14)요, 그 둘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1서 4:8)요, 그 셋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요한4:24)는 언명이다. 존재자체이신 하나님, 사랑자체이신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은 알고보면 존재론적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성과 현실성을 곧바로 지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유한한 존재자일지라도 존재함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서 하나님 안에 있고, 영성적 생명차원을 맛봄으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은혜로운 관계 안으로 초청된다.
존재자체이신 하나님과 사랑자체이신 하나님 안에서, 그를 힘입어 우리가 “살고 기동하며 존재하지만”(행17:28)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영이신 하나님”도 그렇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우리가 ‘영성적 차원의 생명 체험’을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허락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여타의 인간생명 현상의 3가지 특징들 곧 지성․감성․도덕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체험현상이다. 그것은 인간본성 자체 안에서 자기충족적으로, 자가발생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영이신 하나님의 접촉․ 강림․ 임재 ․ 내주․ 부어짐․조명등을 통하여 계시적 사건으로서 발생하는 은총의 사건인 것이다. 인간성 신비가 그 가장 깊은 면에서 빛을 발하는 자기초월적 생명현상이다.
사람의 영성은 지성․감성․덕성과 나란히 열거되는 제4기능으로서의 정신활동 첨가사항이 아니다. 지성․감성․덕성을 그 바탈에서 근거지우며 동시에 그 세가지 인간의 정신적 삶이 통전되면서 자기초월되도록 고양시키는 심령적 현상이 영성이다.
영성의 조명 안에서 지성은 더욱“환하게 꿰뚫어 비취는 앎”에 이르고, 감성은 더욱 “정화된 아름다운 예술적 감정”에 이르고, 덕성은 더욱 “자율적 책임성과 숭고한 도덕적 실천”에 이른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온전하게 하고, 계시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고 완성한다”는 고전적 신학명제가 있다. 그 명제는 영성과 지성․감성․덕성등 다른 인간정신적 체험과 갖는 상호관계 질서를 잘 설명해 준다.
흔히 오해되듯이, 영성을 성령은사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특별한 은사체험들( 방언, 신유, 예언, 영분별 등)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협의적인 가능주의적 영성이해에서 벗어나야 하며, 동시에 영성을 인간 이성의 자기발현으로만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합리주의 견해도 극복되어야 한다. 동시에, 영성적 체험이 기독교 종교안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종파주의적 우월의식도 버려야 한다. 영성은 종교유무를 떠나서, 종파차이를 떠나서, 사람이라는 생명체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 하나님의 ‘은총의 전자기장(電磁氣場)’ 혹은 ‘은총의 중력장’(重力場)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영성적 존재인 것이다.
신학적 지식이나 성경지식이 많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성이 깊은 것 아니다. 기독교적 윤리실천이 남달리 철저하고 경건한 퓨리탄적 윤리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영성적 인간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성령충만으로 방언과 신유은사 기적을 베풀지라도 그 현상을 영성과 곧바로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영성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깊고 높은 것이다.
3. 기독교 영성의 기본구성소 및 고유성
모든 사람은 보편적으로 모두 영성적 존재이지만, 인간의 삶은 추상적으로나 보편적으로 살지않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사는 것이니까, 기독교는 기독교적 영성의 특징과 고유성을 지니게 된다. 인간은 개인이면서 공동체안에서 삶을 이뤄가는 문화언어적 ․역사 정치적 ․사회경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영성도 그래서 특성을 지니게된다. 이 특성은 기독교라는 종교로 하여금 기독교 답게 하는 것이며,. 그 구체적 특성을 통하여 우주적이고도 보편적인 종교성(영성)에 공헌하는 것이다.
첫째, 기독교적 영성의 특징은 성경으로부터 온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적 교양서적의 집대성이거나, 고대문헌자료의 편집결과가 아니다. 성경을 특정신학의 해석학적 눈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해치게되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향곡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 처럼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일관된 주제가 있다.
성서학자들은 그것을 ‘계약전통’과 ‘창조전통’, ‘예언자전통’과 ‘성육신 전통’(성례전 전통)이라고 부른다. ‘계약전통’과 ‘예언자전통’이 상호공명을 이루고, ‘창조전통’과 ‘성육신전통’(상례전 전통)은 또다른 공명을 이룬다.
둘째, 위에서 기독교 영성을 구성하는 기본적 두가지 구성소는 어떤 정신을 드러내는것인가? ‘계약전통’과 ‘예언자전통’은 정의(공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뿌리를 둔다. ‘창조전통’과 ‘성육신 전통’(성례전 전통)은 창조세계에 대한 긍정, 치유, 축복, 성화(聖化)에 강조점을 두면서 하나님의 신적 속성 ‘긍휼이 여기는 맘(사랑)’에 뿌리를 둔다.
‘계약전통/예언자전통’은 역사공동체 안에서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그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 우상타파 정신과 구원사의 전개가 핵심을 이룬다. ‘창조/성육신 전통’은 창조세계 자체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말씀이 육신을 이루며, 만물이 성화(聖化)되고 영화(榮化)되는 비젼을 끊임없이 제시하여 이 세계가 자폐증에 걸린 닫혀진 세계가 되지 않고 열려진 세계가 되도록 고양시킨다.
셋째, 기독교 영성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 십자가 죽음, 부활, 성령강림 사건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그 특수성을 지니게된다. 다른 말로하면, 기독교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삶에 일치하는 제자직의 영성과, 그리고 성령 강림 체험으로 인하여 새롭게 탄생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에클레시아 영성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그 특수성과 고유성을 얻는다. 기독교 영성수련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닮음이며, 따름이며, 순명이며, 일치’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 안에 참 자유․자아의 완성․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만이 아닌 공동체적 사회적 구원, ‘세계로부터 구원’이 아닌 ‘세계의 구원’, 역사의 구원만이 아니라 자연의 구원이 동시에 있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특징이다.
기독교영성은 성육신신앙과 부활신앙과 성령강림체험에 의하여, 모든 형태의 몰역사적 영성․반신체적 영성․타계주의적 영성․개인주의적 영성․비생태계적 영성․만물의 성숙과 창조적 변화를 거절하는 반진화론적 영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4. 기장교단 발족이후, 교단안에 형성된 영성신학의 흐름
기장교단이 1953년 설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장교단 안에 형성된 몇가지 영성적 흐름의 특징이 있다. 한국교회 형제들은 그것을 기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기장성이라는 명칭으로 완전히 담아내기 쉽지않는 4가지 맥이 흐르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개혁파교회 정통성을 이어가는 ‘말씀의 영성’이다. 신학적으로는 칼빈신학과 칼 바르트 신학의 조명을 받고 있다. 개신교의 영성은 뭐니 뭐니 말해도 성경말씀의 주석에 철저하게 기초하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내적조명’을 받아 계시적 구원을 말씀사건 안에서 현존케하려는 영성의 흐름을 말한다. 목회방향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도목회(正道牧會)를 하려는 목회자들의 영성흐름이다.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고 교인들을 건전하게 육성하고 성숙시키려는 목회적 지향성을 갖는다.
둘째는 1970년대 한국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억눌린 민중들의 삶속에서 예수의 제자직을 수행하려는 ‘저항과 섬김의 영성’이다. 도시빈민선교, 노동자선교에서 싹이트고 한국의 민중신학과 본훼퍼의 제자직신학의 조명을 받는다.
서구기독교신학 전통이 역사흐름 속에서 ‘갈리리 복음’으로 부터 많이 이탈했음을 절감하고, 가나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인간형제들안에서 예수의 부름을 듣고 그 부름에 응답하려는 정열을 동반한다. 제도적 교회의 양적 부흥에 관심보다는 한국의 갈리리 현장에서 ‘한(恨)의 사제’가 되려고 노력한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영성흐름이다.
셋째는 역사참여와 역사변혁을 추구하는 참여신학이, 성서적 전통에서 계약전통과 예언자전통을 드러내지만, 또다른 영성의 측면 곧 부활절 이후 성령강림을 통한 심령부흥 ․ 기도의 능력 ․교회의 성장을 본의아니게 소홀히 했다는 반성이 일각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후, 교단안에서 ‘성풍회’ 운동이라는 동질감을 가진 ‘기도와 부흥의 영성’ 흐름이 조성되었다. 신학교 교육에서의 역사비평적 성경해석이 말씀의 영적능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성경말씀을 영적으로 깊이 천착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교인의 심령부흥과 교회의 성장을 이룩한다는 면에서 타교단의 대형교회 목회지향성과 닮은 면이 있지만, 기장성 때문에 훨씬 건전한 ‘기도와 부흥의 영성’ 흐름을 형성하였다고 본다.
넷째는 1990년대 이후, 위에서 언급한 기장교단 안에 형성된 3가지 유형의 영성흐름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하고, 달라진 시대상황 속에서 새로운 영성운동의 갈증이 대두되었고, 그 흐름은 아직도 형성중이지만 ‘비움과 생태적 살림영성’으로 집약될 수 있겠다.
‘말씀의 영성’에 동의하지만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씀이나 침묵을 모르는 ‘말씀의 남발과 과잉성’에 위기를 본 것이다. ‘저항과 섬김의 영성’의 동기와 그 지향성에는 동의하지만 영혼에서 솟구치는 자발적 기쁨과 감사가 결여된 ‘무거운 멍애’처럼 변해가는 십자가의 영성에 무언인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기도와 부흥의 영성’에 반대할리 없지만, 복음이 삶의 한 복판과 세상성 한복판에서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기독교왕국 건설과 교회중심주의로 흘러가는 ‘십자군적 멘탈리티’(Crusade Mentality)에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4번째 기장내 영성의 흐름은 생태환경의 위기극복이라는 과제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기장내의 영성흐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상에서 거칠게나마 살펴본 기장교단안에 흐르는 네가지 영성의 맥은, 지금까지는 아직도 유기적 통전성이나 상호 긴밀한 대화 및 협력관계성 없이 개별적으로 흐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깊이 성찰할 때 교단안에 형성된 4가지 목회적 영성흐름은 서로 이질적이거나 배타적 관계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고 경청하며 보완하고 심화시킴으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도록’(엡4:13) 해가야 할 것이다.
5. 21세기 처음 한 세데(2001-2030) 동안, 기장교단의 영성신학과 수련의 방향과 과제
앞절에서 살핀 기장교단안에 흐르는 4가지 영성적 맥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 시켜가면서, 반드시 보충하거나 추가해야 하거나, 더욱 강조해야 할 영성과제를 몇가지 제시하려고 한다.
(가) 중생(重生) 경험의 처음자리로 돌아가 ‘청빈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기장교단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던 조선신학교가 역사적 고난의 한 복판에서 1940년대에 탄생 할 수 있었던 것은, 설립자 김대현장로와 선구자 만우 송창근 목사, 장공 김재준의 목사의 ‘청빈의 영성’이 주춧돌로 놓여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옛사람이 죽고 성령안에서 다시 거듭난 체험”(요3:3)부터 시작된다. 중생체험은 기독교 영성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보아야 한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거듭남은 인간의 도덕적 수양이나 자기성찰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것이고, 성령안에서 한번 자연인으로서 죽고 그리스도사람으로 다시 사는 사건이다. 중생한 사람에겐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빌3:7-8).
중세기 영성박사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경험에 의하면, 청빈에는 3단계가있다: 소유의 청빈(Poverty of Possession), 의지의 청빈(Poverty of Will), 존재의 청빈(Poverty of Being)이 그것이다.
‘소유의 청빈’에는 물질적 소유, 명예와 권력의 소유, 지식의 소유, 전통권위의 소유등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모든 소유가 다 해당된다. 특히 목회자가 물질적 소유욕망으로부터 자유는 어느정도 가능하지만, 물질적 소유욕을 충족시키지 못한 보상심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여 명예욕과 권력욕에는 일반인보다 더 집착하는 경향이 보인다. 특히 명예욕은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청빈의 영성’이 제1단계차원에서 결코쉬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 기장교단 노회나 총회의 모든 긴장갈등 대립이 교회지도자들의 명예욕과 권력욕에 기인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의지의 청빈’은 성공한 목회자나 기독자가 자신의 ‘성취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의미있는 일을 도모하지만, 명분을 “복음을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부러 거짓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한다지만. 그의 무의식 바닥을 뒤져보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욕망이 강하다.
‘그리스도의 종’ 혹은 ‘하나님의종’이라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뜻만을 받들고 순명해야하건만, 실제로는 자기의 의지와 뜻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려든다. 겉으로는 영성이 매우 풍부한 사람같고 영적 은사에 충만한 사람같지만, ‘의지의 청빈’에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설치던 시대가 가면 바람에 나는 겨처럼 이룩한 모든 업적들이 허무하게 되고만다.
“존재의 청빈‘은 최고경지인데, 자기자신을 완전히 무화(無化)시킴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존재의 부어주시는 선물로 사는 경지를 말한다. ’존재의 청빈‘에 이르기까지는 무리일런지 모르나, 기장이 영성적으로 되살아나려면, 목사와 장로들이 최소한 ’청빈의 영성‘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헛일이 된다.
‘청빈의 영성’을 수련하려면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론 ‘십자가 고난’을 집중적으로 명상하는것이지만, 우주시대인 만큼 허허막막한 대우주 시공 속에서 지구를 생각하고, 생명계를 생각하고, 자기자신의 찰나같은 인생의 기회를 생각하는 ‘우주의식 훈련’이 유효하다.
(나) 성육신의 신학전통을 굳게 붇잡고 가면서 ‘계곡과 여백의 영성’ 훈련에 힘써야 한다.
기장교단과 한신신학이 영원히 놓아서는 않되는 신학정신은 ‘성육신의 신학전통’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특히 장공신학의 정수를 이루는 신학적 화두이다. 성육신 신학이 말하려는 욧점은 빌립보 2장 ‘그리스도찬가’에 압축되어 있다. 본래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을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아버지뜻에 순명하여 십자가에 죽음심이다.
하늘이 땅에 임하여, 땅을 하늘의 영광으로 변화시켜가는 방향이다. 땅은 긍정되고 고양된다. 하늘이 영적질서로서는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울는지 모르나, 하나님은 땅을 궁극적 인 구원의 최종목적으로 하여 하늘을 창조하셨다(바르트).
성육신의 영성은 ‘자기 낮춤․자기 비움’의 정신이다. 이것을 동양적 감성언어로 다시 표현한다면 ‘계곡과 여백의 영성’이다. 계곡은 산 봉우리와 대칭을 이루면서 만물을 어머니처럼 품고 기른다. 사람들은 산 봉우리를 바라보고 높이지만 정말 위대한 것은 계곡이라고 동양 지혜자들은 강조한다. 여백은 동양화의 특징이자 동양적 종교성의 표현이다. 여백을 남겨둠은 채울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영이 활동하시고 숨쉴 공간이기 때문이다.
설교에 여백이 없고, 축사에 여백이 없고, 예술 표현에 여백이 없을 때 심령은 답답하고 자유로운 숨을 못쉰다. 여백은 완전한 동그라미를 그릴수 있지만 다소 불완전한 원을 붓으로 그리는 동양화가의 어리숙함이다. 눌변이 웅변보다 감동적일 수 있고, 미완성 교향곡이 더 감동적일 수 있다.
‘계곡과 여백의 영성’은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의 채워주심을 믿고 맡기는 겸허의 기다림이다. 총회영성수련원이 탄생한 이후, 주로 ‘침묵의 영성’이나 ‘관상기도’를 강조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계곡과 여백의 영성’수련의 방편인 것이지 그것이 기장영성의 전부가 아님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침묵의 영성’이나 ‘계곡과 여백의 영성’은 인간 심령의 연못에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이 고이고, 고인 맑은 옹달샘 안에 홀연히 비취는 하나님의 얼굴․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을 보려고 함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
(다) 동물세계는 적자생존․무한경쟁이지만, 하나님나라 세계는 약자동반․나눔의 영성이다.
진화론적 사회생물학은 19세기 서구 강대국들의 식민지약탈과 지배의 이데올로기 근거였다. ‘사회진화론’이란 사회발전 과정에서 약자는 도태당하고, 강자가 승리하며 번성하는 것이 생물계의 엄연한 법칙이자 선 그자체이듯이, 인간사회안에서도 사람이 생물인 한 예외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니이체의 ‘힘에로의 의지’( Will to Power)와 ‘초인 철학’이 뭇소리니․ 히틀러․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의지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과 세계관은 1,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65년이 지난 지금에도 세상을 지배하는 강자들의 가치관이다. 세계화나 현정부의 ‘국가경쟁력강화’라는 정책명분도 바로 그러한 철학의 수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세계는 이것을 부정한다. 건강하고 똑똑한 양 99마리를 길 위에 남겨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기어이 찾아 함께 마을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의 태도는 현대인의 세계관에서 보면 용납되지 않고, 도리려 반사회적․비도덕적․몰책임적이라고 비난받는다. 목회현장이 복잡한 것이 아니고, 이 두 입장에서 무엇을 따를가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난 30년동안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정도로 한국 개신교의 급성장과 ‘대형교회’들의 성취가 있을 지라도, 세상이 사랑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져 그 힘의 현실성만 인정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결과적으로 ‘예수의 길’을 버리고 ‘적자생존․무한경쟁의 길’을 따르는 종교단체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장교단의 영성운동중에서 1970년대 민중신학운동이나 민중교회를 중심으로 ‘저항과 섬김의 영성’ 흐름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일시적이건, 특정사회, 특정시대의 제한된 영성이 아니다. 우리교단이 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지구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빈곤국가나 계층은 그들 자신의 책임못지않게 월씬 더 근본적으로 더 큰 책임으로서 사회정치구조적 희생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들을 살려내고, 함께 인간답게 살도록 일으켜 세우는 일은 그들에 대한 가진자의 자비로운 시혜나 동정이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용산참사 희생자’, ‘비정규직의 억울함’, ‘ 영세상인들의 몰락’, ‘변두리 학교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의 열악성’, ‘이주노동자들의 차별과 노동력착취’를 방치하면서 그들 당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잔인한 간접살인 행위마져 될 수 있다. 기장의 영성은 끝까지 ‘작은자들의 우선적 선택’을 지지하는 예언자적 영성을 절대로 약화시켜서는 아니된다.
(라) 지구촌시대, 가치의 다원사회, 포스트모던 사회임을 직시하고, 기독교영성은 과학및 이웃종교와 대화하고 협력하는 성숙하고도 열린영성에로 변화되어야 한다.
복음은 연약한 진리가 아니다. 과학과 이웃종교에 경청하고 배우고 협동하면 금방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이 변질되어버릴 것이라는 나약한 신앙인, 자신없는 신학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현실이 한국기독교 현주소이다. 한국사회는 그런 자페증 환자같고, 독선적이고 자기 우월의식에 도취한 기독교인들의 독단적 신앙자세를 가장 먼저 고쳐야 할 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생명체와 생명의 종(種)들은, 단순한 상태에서 복잡한 상태로, 단수에서 복수에로 진화한다는 ‘진화사실’ 자체와 어떻게 그러한 진화현상이 발생하는가 설명하는 진화이론을 혼동하는 기독자들이 많다. 굳어진 기독교의 보수성을 열려진 기독교에로 변화시킬 사명이 기장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장도 이미 상당히 보수화되어 있고 신학적 발상자체가 경직되어있다. 김재준․함석헌등 선구자들이 가신지 20여년 지 난 지금에도, 한국 개신교나 기장교단마져도 그분들의 과학과 이웃종교에 대한 열린 개방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마) 21세기 기장의 영성운동 방향은 자연생태적 위기 앞에서 생명과 지구를 살리는 ‘생태학적 영성’에 집중해야 한다.
기후온난화는 요즘 기후붕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자연생태계는 인간이 지구위에 출현하기 수억년동안 지구생태계를 지속시켜온 실질적인 창조행위 도움이들 이었다. 지구녹생행성위에 인간종(種)이 멸종한다고해도, 다른 생명체들은 살아갈수 있지만, 생태계의 붕괴가 진행되면 인간종은 살아 남을 수 없다.
녹색행성인 지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생물이 살수 있고 대기권, 산소량, 해양해류와 지질구조, 전자기장, 사계절의 변화등의 ‘지구 평형성’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만큼 생명의 띄는 ‘엷은 막’같고, 지구의 생명생존조건의 평형성은 붕괴되기 아주 쉬운 취약성을 지닌 것이다. 예들면, 지구온난화의 직접원인이 되는 대기권의 두께는 약 140 Km이고, 그 대기권중에서 대류권은 불과 14 Km인데, 이 두께는 지구 몸통과 비교할 때, 사과를 쌓아두는 클린랩(Clean Rap) 두께 혹은 농구공 겉면에 도색한 광택제 두께에 해당될 뿐이다.
‘생태학적 영성’이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신관의 혁명적 변화를 요청하며(엡4:6), 동시에 지구 온생명 안에서 인간의 자리매김을 다시 새롭게 정립하는 ‘영적 눈뜸과 생태학적 회심’을 말한다(장회익). 만물의 유기체적인 관계성과 의존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 만물을 동체대비(同體大悲)로 대하는 예민한 감수성, 지구 온생명체 가운데서 인간종의 자리매김은 ‘몸의 중추신경계’에 해당한다는 자각과 사명의식의 내면화 작업, 지금의 세계경제 살림을 훨씬 간소하게 살아가면서 ‘녹색경영’에 입각한 ‘지속가능한 기업경영 사회’에로 전환,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도록 격려하고 계몽하는데 기독교 영성은 제1차적 영성적 과제를 보아야 한다.
[참고 추천도서]
1.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분도출판, 2003)
2. 매튜 폭스(김순현 역), 『영성: 자비의 힘』,(다산글방, 2002)
3. 매튜 폭스(김순현역),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분도, 2006)
4. 장회익, 『삶과 온 생명』,(도서출판 솔,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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