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태석 신부를 도와 미사를 봉헌했던 한 남수단 청년이 한국으로 유학을 와 의대를 졸업하고 학사모를 썼다. 15일 뉴시스에 따르면, 올해 33세인 타반 이콧씨가 6년간의 의과대학 과정을 마치고 이날 부산 인제대 의과대학에서 열린 '제34회 학위수여식'에 참가해 동료 학생 107명과 함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며 의학윤리를 다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해 2월 24일에도 이태석 신부의 남수단 제자가 한국 유학길에 오른지 수년만에 졸업을 한 바 있다. 당시 아프리카 남수단 출신으로 충남대 공과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는 32세의 산티노 뎅이라는 청년이었다. 그 역시 지난 2010년에 암으로 작고한 이태석 신부의 제자로 알려졌다.
'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이태석 신부는 의대를 졸업한 후 부와 명예가 보장된 편안한 의사의 길을 가지 않고 다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해 사제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01년 6월 로마의 살레시오수도회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이태석 신부는 그 해 11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아프리카 수단에 의료선교사로 나갔다.
수단은 정치와 종교적 갈등으로 북수단과 남수단으로 갈라져 이십년 가까이 내전(內戰)으로 내홍을 앓고 있는 나라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의 톤즈라는 작은 마을에서 유일한 의사이자 사제로, 또한 교육자로서 8년 가까운 세월을 수단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보듬고 그들과 함께 했다.
이태석 신부는 하루 3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였고 그 중에는 의사인 그를 만나기 위해 100km를 걸어서 찾아온 환자도 있었다. 또한 톤즈 인근의 80여개 마을을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가 순회 진료를 하였다. 그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손수 벽돌을 찍어 12개의 병실을 갖춘 병원을 짓기도 했다.
또한 변변한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케냐에서 선생님들을 모셔와 가르쳤으며 손수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무엇보다 이태석 신부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였다.
그들은 절망의 한복판에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같은 수단사람조차 찾지 않는 한센병환자들의 마을을 찾아 그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뭉개진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맨발로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 상처투성이인 그들의 뭉개진 발을 위해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서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그대로 '아버지(Father)'였다.
톤즈사람들에게 '쫄리(John Lee)' 신부로 불리던 이태석 신부는 2010년 1월 14일 대장암과 간암으로 48세의 짧은 나이로 선종(善終)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톤즈마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흐느껴 울었다. 눈물 흘리는 것을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서 아파도 울지 않고, 배가 고파도 울지 않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는 톤즈사람들(딩카족)이기에 그들의 흐느낌과 눈물 속에는 이태석 신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녹아있었다.
어느 한센병 환자는 이태석 신부를 가리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는 절망의 자리에 앉아있던 그들에게 곧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는 한센병 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손과 발을 어루만져주었던 사람, 그는 곧 하나님이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체 야생동물처럼 들판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셈(수학)을 가르치고 음악을 가르쳐주었던 사람, 그는 그들에게 곧 하나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