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막1:4-11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 참다운 리더십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 전통은 1월 6일을 주님이 세상 앞에 몸을 드러내신 날로 여겨 기념했습니다. 서방교회 전통은 동방박사들이 주님께 나아와 경배한 날로 기념하고 있고, 동방교회는 예수님이 요단강에 오셔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날로 기념합니다.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은 주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날인 동시에,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와 관련하여 이 날의 의미를 되새겨보려고 합니다.
광야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그는 세상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나 보면서 해야 할 소리를 하지 못하고 지내는 이들에게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오는 무리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눅3:7) 하고 일갈하는 요한은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그의 삶의 자리는 광야입니다. 허허롭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곳, 말랑말랑한 감성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곳, 시시때때로 차가운 비바람과 맞서야 하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밤에는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그곳은 고독한 자리입니다.
테오도르 모노는 사막이라는 공간은 파우스트적인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서 "사막은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강인해지도록 가르치는 학교"(사막의 순례자, p.24)라고 말합니다. 사막 혹은 광야는 영혼을 조각하고 육체를 단련시키는 곳입니다. 광야의 사람 세례자 요한, 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는 야인이었습니다.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거나, 자기를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치장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활달한 영혼 앞에서 자기들의 작음과 더러움을 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나아가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난 해 말 한겨레신문의 카툰 코너인 '김영훈의 생각 줍기'가 참 신선했습니다. 구불구불 굽이치는 광야를 지나는 길과 그 길의 끝에 이어진 커다란 별을 보여주는 그 그림에 작가는 인상적인 문장을 덧붙였습니다. "메마른 사막에선 '누구나' 생명수 얻기 위해 오아시스를 찾지만, 혼탁한 세상에선...'누군가만' 생명의 말씀을 얻기 위해 광야로 나선다...". 요한을 찾아온 이들은 생명의 말씀이 그리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경외심을 가지고 자기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막1:7-8)
그는 자기를 높일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더 위대한 영혼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은근슬쩍 허영심을 채우려는 마음을 그는 단칼에 잘라냈습니다. 위대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수피즘의 스승인 아부 알리 알-리바티(Abu Ali al-Ribati)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는 압둘라 알-라지(Abdullah al-Razi)와 사막 길에 동행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압둘라가 "당신이나 나 가운데 한 사람은 리더 역할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얼른 "당신이 리더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압둘라는 "그렇다면 당신은 내게 복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러자 그는 즉시 가방에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 넣은 뒤에 그것을 등에 걸머졌습니다. 아부 알리가 "그걸 내게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압둘라는 "당신이 내게 '그대가 리더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내게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날 밤에 그들은 세찬 비를 만났습니다. 압둘라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아부 알리의 머리맡에 서서 입고 있던 자기 옷을 벗어 비를 막아주었습니다. 아부 알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혼잣소리를 했습니다. "'당신이 리더가 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Essential Sufism, edited by James Fadiman & Robert Frager, Harper SanFrancisco, 1997, p.135)
참으로 위대한 영혼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자기 분수를 정확히 알고 거기 맞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 정신을 온전히 체현하려고 노력하던 브루더호프 공동체도 한때 리더십의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홍을 겪은 끝에 구성원들은 하이너(Heinrich Arnold)를 공동체 리더로 선출했습니다. 그때 하이너는 병에 걸려 기신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결정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깊이 숙고한 후에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군중들이 이른바 위대한 지도자를 따랐던 경험을 통해 사람을 따른다는 것이 빚어내는 나쁜 결과들을 보았습니다(히틀러를 가리킴). 이러한 태도는 거절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책임을 맡아달라고 할 때, 그를 위대한 인물처럼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불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모든 것은 상호 용서에 달려있습니다."(Peter Mommsen, Homage to a Broken Man, Plough, 2015, p.180)
참다운 리더십은 이런 것입니다. 타자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불꽃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끼는 것은 두 분의 상호 존중 때문입니다.
* 물, 하나님의 영, 하늘의 소리
어느 날 갈릴리 나사렛에 머물고 계시던 예수님이 요단 강에 오셔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 혹은 '씻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죄 없으신 주님이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이 낯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모든 인간의 운명 속에 뛰어 드셨습니다. 우리와 다른 자리에 서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신 것이 아니라, 喜怒哀樂愛惡慾 속에서 복닥거리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풍덩 뛰어들어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시면서, 더 높고 깊은 세계를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이 들려주는 세례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하늘의 열림 2) 성령의 강림 3)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는 사실 처음 창조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늘의 열림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1:2)고 말합니다. 성령의 강림입니다. 혼돈에 찬 세상, 어둠이 드리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깊은 물 위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십니다. 마치 새끼를 품에 안는 어미닭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생겨라" 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그 빛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와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는 이처럼 서로 공명하고 있습니다. 혼돈의 물에 잠겼던 예수가 물 위로 올라오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창조된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 역시 '좋다'는 탄성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1:11) 하나님의 기쁨 혹은 좋음이야말로 모든 인간 존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이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인간의 고난과 혼란의 한 복판에 뛰어드셨습니다. 세례는 단순한 의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나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세례는 고난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청했을 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10:37-38) 되물으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아직은 그 불이 붙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눅12:50). 주님의 세례, 그것은 다른 이들의 가슴 속에 하늘의 불을 붙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애린의 마음으로 대하고,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 세상을 열기 위해 주님은 진력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울려온 '좋아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세례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영국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로완 윌리암스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 가운데 온전히 성숙하여 하나님의 아들딸로 불리게 되는 것"(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김기철 옮김, 복 있는 사람, 2015년 7월 15일, p.26)이라고 간명하게 대답합니다.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사귐 속에 동참한다는 뜻인 동시에, 죽음을 이미 이겨낸 존재로서 이 땅에서 자유인으로 산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됩니다.
*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위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성령을 향해 자기를 열고 살아야 합니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공들이 바람을 향해 돛을 펴는 것처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을 향해 몸과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영광과 기쁨의 자리로만 이끌지 않습니다. 마가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를 성령이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시련 속으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악한 영은 언제나 우리에게 부드럽고 달콤한 말만 들려줍니다. 하지만 성령은 가끔 안일한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혼란 속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더 큰 사람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6-18)라는 구절을 잘 압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나오는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살전5:19)라는 구절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라야 불의한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갑질, 혐오, 멸시, 차별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최근 강남의 한 아파트 경비원 90여명이 집단으로 해고당했습니다. 용역회사에 고용이 승계된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편익을 추구하느라 공생의 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불의한 현실을 보고 의분을 느낍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납니다. 사울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또한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의지가지없는 신세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으뜸가는 특색을 저는 '아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아끼고, 자연과 사물을 아낍니다. 어느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안에 머물고 있는 하나님의 영을 보았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구현된 존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없이 자기를 낮추고 예수를 높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혼돈과 공허와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셨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초입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신뢰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