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사건이 공론의 장으로 나올 때 마다, 빠짐 없이 등장하는 키워드는 서북청년회(서청)다. 이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근본주의 성향이 아주 강했던 장로교단에 속한 개신교인이었다.
이들은 경찰과 합세해 도민들의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한국전쟁 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이들이 "경찰보다도 더 강하게 경찰력을 행사했으며, 그들의 잔인한 행태는 주민들의 분노를 초래했다"고 적었다.
지난 14일과 15일 양일간 제주4.3사건 70주년에 발맞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아래 정평위)와 제주 NCC가 공동으로 '2018 부활절 맞이 제주4.3 평화기행'(아래 평화기행)을 진행했다. 70명으로 꾸려진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제주4.3 평화공원, 너븐숭이 기념관, 의귀마을, 섯알오름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그러나 제주 4.3 당시 서청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평화기행은 요식행위에 그칠 뿐이다. 다행히 참가자들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에 개신교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수용했다.
먼저 서청과 개신교의 연관성을 이해하려면 두 개의 키워드를 소환해야 한다. 바로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다. 서청과 한 목사, 그리고 그가 시무하던 영락교회와의 유착관계는 줄곧 논란이 일어왔다.
한 목사는 생전에 서청이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축이 됐다고 한 적이 있었다. 작가 김병희가 쓴 <한경직 목사>엔 한 목사의 발언이 실려 있다. 그 발언은 이랬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서청-한경직 목사-영락교회로 이어지는 유착을 입증할 자료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서청 회원이 군·경으로 진출했으며, 영락교회가 서청 회원들의 신분세탁에 일조했다는 건 최근 연구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역사 연구자인 강성호는 자신의 책 <한국 기독교 흑역사>에서 "최근 연구에 의하면 1965년에 영락교회 집사가 된 박용범은 제주4.3 사건 직후 서귀포 경찰서 형사로 부임한 적이 있었고, 1970년에 영락교회 집사가 된 홍형균은 제주도에 경찰로 파견되어 제주도 방언을 통역했다고 한다"고 적었다.
영락교회의 그림자는 한국전쟁으로 까지 이어진다. 제주4.3은 1949년에 이르러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엔 또 다시 학살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이승만 정권은 '예비검속'이란 미명하에 재차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예비검속은 제주시, 성산포, 모슬포에서 이뤄졌다. 이 가운데 모슬포 섯알오름에서는 250여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섯알오름 학살에도 개신교의 그림자가
섯알오름 학살은 제주에 주둔했던 해병대가 자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지휘관은 김윤근과 김동하였는데, 이들은 훗날 5.16군사쿠데타에도 이름을 올린다. 다시 역사연구자 강성호의 <한국 기독교 흑역사>를 참고해 보자.
"5.16 주도세력 중 해병여단을 지휘했던 김윤근과 김동하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부대를 지휘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지휘한 해병부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 모슬포에서 약 220여 명이 되는 도민들을 집단 총살했다.(다른 기록에 의하면 252명이라고도 한다) 이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를 나온 박정희의 후배이자 영락교회의 교인인 김윤근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중략) 학살 명령을 내린 김윤근은 1984년 미국 시드니 영락교회에서 장로가 된 바 있으며, 그의 장녀 결혼식에 한경직 목사가 주례를 서기도 했다."
15일 평화행진 참가자들은 섯알오름을 찾았다. 원래 이날 참가자들은 섯알오름과 알뜨르 비행장을 순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내리는 강한 빗줄기 때문에 순례 일정은 취소됐다.
참가자들 상당수는 목회자들이었다. 한경직 목사와 같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아래 예장통합) 소속 목회자들도 많았다. 이들이 4.3과 한 목사·영락교회의 유착관계에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예장통합 소속 목회자들은 한결같이 서청이 저지른 만행에 개탄해 했다. 그러나 예장통합 교단,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죄책고백을 할 가능성은 낮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아래 예장통합 목회자들의 목소리를 옮긴다.
"수년 전 관련 논문을 통해 제주4.3에 개신교가 개입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충격을 받았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이곳에 왔다. 이제까지 한국교회 전반이 4.3을 돌아보는 데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이번 평화기행이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제주도민들에게 4.3 당시 서청이 저지른 만행에 사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A 목회자
"일찍부터 4.3에 관심이 많았다. 서청이 잔혹행위를 저지른 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예장통합이나 한국교회 전체가 서청의 잔혹행위에 사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해자들이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이게 교회의 현실이다." - B 목회자
이런 목소리에 대해 NCCK 정평위 최형묵 부위원장은 "한국교회가 공산주의자의 손에 목사가 죽임을 당했다는 식의 순교 서사는 많으나 4.3 처럼 가해자로서의 서사에는 인색했다"며 "제주4.3 70주기를 맞아 한국교회가 진실을 인정하고 죄책고백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다"는 뜻을 밝혔다.
반면 4.3유족들은 개신교 단체의 방문만으로도 감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14일 북촌 학살사건 생존자인 고완순씨는 너븐숭이 기념관을 찾은 평화기행 참가자들에게 "그간 제주 주민들은 연좌제에 걸려 70년 세월 동안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했다"며 "여러분들이 4.3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15일 의귀마을 희생자 유족회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양봉천 문화해설사는 "서청을 악마화하지는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이어 "한국교회가 4.3을 외면하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대해 아래와 같은 입장을 전해왔다.
"1948년 여수반란 당시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원수를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의 사례가 얼마나 귀감이 되었나? 제주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까지 (한국교회가) 먼저 손내밀어 주기 바랄까? 먼저 손내미는 게 빠르지 않겠나?"
덧붙이는 글]
평화행진을 공동 주관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는 오는 28일 제주를 방문해 제주4.3평화재단과 분단상처 치유·평화교육 지원 등을 뼈대로 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