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족쇄와 사슬

2018년 6월 3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시2:1-12

[어찌하여 뭇 나라가 술렁거리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전선을 펼치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함께 꾸며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 내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마침내 주님께서 분을 내고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호령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산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나 이제 주님께서 내리실 칙령을 선포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네가 그들을 철퇴로 부수며,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왕들아, 지혜롭게 행동하여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경고하는 이 말을 받아들여라.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진노하실 것이니, 너희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할 것이다. 그의 진노하심이 지체없이 너희에게 이를 것이다.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설교문

*이중적 책임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입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는 우리 민족 위에 평강의 복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시편 1편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면 시편 2편은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시편 1편과 2편을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을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복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 혹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타자에게 무덤을 안겨주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타자의 생명을 위축시키거나 병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고 보내주신 이웃들을 목적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 삼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를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인간 소외가 일어나는 겁니다. 죄인 혹은 오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시하거나 고의적으로 훼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자기 확장욕에서 비롯된 죄는 오히려 부자유를 가져옵니다. 죄를 짓고 나면 우리 몸과 마음은 마치 거미줄에 얽힌 것처럼 불쾌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요8:32)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영혼만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과 동고동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는 악의 씨앗 혹은 가능성이 심겨져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악은 매혹적입니다. 사람을 잡아당기는 힘이 큽니다. 이런 악의 경향성을 잘 알기에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확실히 인간은 저 자신의 원수", "저 자신의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비관적인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무 데나 뿌려도 악(惡)의 씨는 거의 틀림없이 싹을 틔운다. 반대로 정말 어쩌다 갖게 되는 작으나마 선(善)의 씨가 짓눌려 죽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대단한 행운, 비상한 천운이 따라야 한다."(조르주 베느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정영란 옮김, 민음사, 2017년 10월 10일, p.146)

선을 행하며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꾸만 주저앉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는 일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해야 합니다. 시인은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 말합니다. 땅만 바라보던 우리 눈을 들어 자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촛불이 바람에 일렁이면서도 수직의 중심을 찾아가듯이 하늘의 뜻으로 우리를 채워야 합니다.

* 세상 현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겨우 자기 앞가림이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세상에서 구현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불관언하면서 자기들은 저 높은 차원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지적하고 거기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고, 반성경적 사고입니다. 공공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사로운 자기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가 '이디오테스idiotes'입니다. 백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이디엇idiot'은 바로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입니다. 머리 나쁜 사람이 바보가 아니라, 오직 자기 문제에만 골똘한 사람이 바보입니다.

공공성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기원전 431년 경에 벌어진 스파르타와의 첫 전투에서 많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아테네는 그 전몰자들을 국장(國葬)의 예로 추모합니다. 천막을 치고, 죽은 자의 뼈를 3일간 안치하고, 친지들은 제물을 가져와 묘지로 행진했습니다. 정중하게 뼈를 매장한 후 아테네시의 지명을 받은 페리클레스가 국장 연설을 합니다. 그는 전몰자들에게 어울리는 찬사를 바치는 한편 아테네라는 도시 국가에 대한 긍지 높은 연설을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을 들어보시지요.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범우사, 박광순 역, p.175)

아테네는 아름다움과 지혜로움을 추구하는 국가이지만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자기가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시민들의 합의로 이루는 민주주의적인 질서를 추구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또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에 의한 통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자비와 인내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출34:6). 제1성서에서 자주 마주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홀로 서기 어려운 약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이 기를 펴고 살도록 돕는 사랑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은 자기 힘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통치에 등을 돌리곤 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 역사의 주인

"어찌하여 뭇 나라가 술렁거리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전선을 펼치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함께 꾸며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시2:1-3)

이 짧은 구절 속에 '어찌하여'라는 부사가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래선 안 된다'는 뜻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대목을 종주국의 왕이 서거한 후에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전에 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봉신국의 통치자들이 반란을 꾀하는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 대목은 권력에 취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력들에 대한 고발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권력에 맛들인 이들은 늘 자기 자신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전능자라도 된 것 같은 착각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위임된 권한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직 대법원장과 법원 행정처가 사법 거래를 시도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통탄할 일입니다. 법조차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는 게 현실이라면 불신 사회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의 시인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들 좋은 대로 처신하는 이들을 보며 하나님은 웃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웃음은 곧 진노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폐위시키고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새로운 왕을 세우십니다.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산에 '나의 왕'을 세웠다". 이 짧은 구절에 '나'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두고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역시 '나'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불편하신 분들이 있다면 딸이라 읽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통치를 수행할 사람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지 마십시오.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부르심 받은 이들이 누리게 될 영화로움은 바로 주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 기억하시는지요? 그 통치는 우리 좋을 대로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은 아들이신 예수님께 품부된 다스림의 목적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 영생은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그분들과 깊은 심정적 일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영생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대하는 것입니다.

* 조심스럽게 나아가라

세상은 진보하고 있나요? 진보를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본다면 비록 더딜망정 세상은 분명 진보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진보를 가로막는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진보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면서 마구 치고 나가는 게 아닙니다. 장일순 선생님은 진보를 '따뜻하게 감싸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깊이 동의합니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진짜 진보가 아닙니다. 사람과 생명을 귀히 여기고 아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은 정말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인은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시2:11) 두려움과 떨림이야말로 무릇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부름 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옛글[書經] 가운데 무릇 다스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리키는 대목이 있습니다.

"매사 두려운 듯(척약惕若) 마음을 삼간다. 늘 조심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 썩은 새끼로 수레를 모는 것처럼(어후삭馭朽索), 마른 가지를 붙들고 높은 데로 오르는 사람처럼(반고지攀枯枝) 전전긍긍한다. 잘나갈 때는 물러설 때를 염두에 두고, 편안하다 싶으면 곧 위기가 닥칠 듯이 살피고 또 살핀다. 그래야 어려운 때를 당해도 문제없이 건너갈 수 있다."(정민, [석복惜福], 김영사, 2018년 3월 9일, p.31)

이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금의 국제관계에서는 이런 조심스러움이 없습니다. 윽박지르기와 밀어붙이기가 성행합니다. 으쓱거림과 우쭐거림이 횡행합니다. 그런 힘의 논리가 당장은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말을 기억하시나요? 그는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의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믿는 이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빈부 격차는 심화되고 있고, 성장은 둔화되고 있으며, 공동체 의식도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국제 관계도 전통적인 신의가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자못 심각할 정도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지도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인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길을 물어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여도 참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선택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퇴락(頹落)하지 않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는 한편, 그 말씀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진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그 꿈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꿈에 동참하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지수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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