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 (5)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편집자 주]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앙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충성스러운 봉사와 헌신적인 사역이 인간적인 노력이나 야심이나 열심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면 성령뱁티즘과 성령충만은 어떻게 다른가?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7. 흔들림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김승진
(Photo : ⓒ 침례교신학대학교)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일곱 번째로, 성령충만한 성도는 흔들림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인생살이를 배의 뱃사공이 바다를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바다는 항상 잠잠하지만은 않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험악한 인생의 풍랑이 불어 닥칠 때가 없지 않다. 그리스도인도 실수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고 시험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도 있다. 그러할 때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인지, 천국이 기다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깨우침으로 인해 자신을 추스르며 구원받은 확신을 회복할 수 있다.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을 되뇔 수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을 심어주는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요일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5:12-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게 되고, 자신이 받은 구원이 결코 상실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한번 구원받았으면 언제나 구원받은 것"(Once Saved, Always Saved)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8. 기도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중보를 입게 된다

여덟 번째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기도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중보를 입게 된다. 전지하신(omniscient)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필요 그리고 기도의 제목들을 다 알고 계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기도생활을 게을리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롬 8:32).

성령충만하여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향해 성령께서는 기꺼이 그의 필요들을 채워주신다. 설사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도드리지 못한 내용들에 대해서도, 성령은 안타까워하시고 그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간구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도 해주시고, 설사 그가 간구하지 못한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신 탄식하며 중보(중보기도)를 해 주기도 하신다.

9. 인격과 성품이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아홉 번째로, 성령충만한 성도는 그 인격과 성품이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이 말은 성령충만하지 않은 상태가 있을 수도 있고, 성령을 근심시킬 때도 있고, 마치 성령이 소멸된 것처럼 느낄 만큼 성령의 활동이 쇠잔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한시 바삐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회복하여야 한다. 성령을 이미 인격적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즉 성령뱁티즘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결코 성령은 떠나지도 않으시고 사라지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하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성령충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적극적으로 닮아가는 영적인 상태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성령을 받을 때 이미 성령의 작은 열매는 맺히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되면 성령의 열매(karpos)가 더 크게 자라고 무르익어 아름다운 맛을 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거나 죄를 범하거나 각종 육체의 일에 탐닉해 있으면, 성령의 열매는 자라지도 못하고 무르익지도 못하고 제대로 맛을 내지도 못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악들" 중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롬 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갈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엡 5:3-7)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로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골 3:5-6, 8-9a)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러한 옛 사람의 악한 습관과 범죄와 육체의 일들을 인간의 결심과 의지와 분투 노력으로 극복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각종 중독(섹스 중독, 불량영상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및 담배 중독, 스포츠 중독, 일 중독 등)을 이겨내는 것 역시 너무나 힘든 일이다. 오직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만이, 마치 야산에 쌓인 눈이 따뜻한 훈풍(봄바람)에 소리 없이 녹아내리듯이 이러한 것들은 언젠가는 서서히 사그라질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의 열매는 아름답게 영글게 되고 맛있는 과일로 결실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열매"라는 단어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포도송이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한 송이 포도열매에 여러 개의 포도알들이 달려 있는데, 각 포도알이 다양하고 독특한 맛을 낸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고 있는데, 하나의 열매에 아홉 가지의 맛들이 깃들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2:22-23).

열매의 아홉 가지 속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격과 성품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충만은 "예수닮기"(imitation of Jesus)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된다:

(엡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가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을 그 어떠한 세력도 방해하거나 차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상태를 견지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이 없이 연합된 상태에 있게 되고,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자연스럽게 더욱 알차게 무르익어 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견지하면 맛있고 탐스러운 성령의 열매가 그의 인격과 성품 속에 풍성하게 맺히게 된다.

V. 나가면서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성경구절은 한 밤 중에 영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은밀히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도리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다. 사람이 어떻게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여기서 "물"을 세례나 침례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죄를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을 세례나 침례로 해석하면, 뱁티즘 의식 자체에 죄사함과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될 소지가 생긴다. 뱁티즘중생설(Baptismal Regeneration, 뱁티즘을 받으면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된다는 주장-필자 주)이 될 수도 있고, 일종의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 성직자의 기도와 축사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실제로 변한다거나,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 속에 육체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임하기 때문에, 성례 자체에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능력이 있어서 죄사함을 주고 구원을 준다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직접적인 통로가 된다는 주장-필자 주)가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뱁티즘중생설이나 성례전주의는 신약성서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본다. 뱁티즘이나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고, 나도 역시 믿음으로 그 분과 함께 연합하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산다고 하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이지, 뱁티즘(Baptism, 세례, 침례)이나 주의 만찬(Lord's Supper, 성만찬)에 참예함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것은 바로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나기 위해서도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지만, 거듭난 후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성화를 위해서도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하심(illumination)과 도우심(assistance)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과 명령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교훈과 명령들을 순종하고 생활 속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할 때 성경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성서 기자들(writers)에게 영감을 불어 넣으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의 저자(author)는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딤후 3:16 참조).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엡 5:18)은 곧 말씀충만(골 3:16)이기도 하다.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그를 지배하고 통치하시는 상태로 정의한다면,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의 주님되심(주권, Lordship)이 인정되고 있는 상태로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성령충만은 내 삶의 모든 영역들의 방 열쇠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My Lord)으로 영접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내 마음과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그 분께 소유권과 관리권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열쇠들의 꾸러미를 통째로 새 주인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손님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인으로 모셔 들여서, 내 삶의 모든 방들에서 그 분이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인 것이다.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쇠꾸러미 전체를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고 그 중에서 일부의 열쇠를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거나 감추어 두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께 내 삶의 소유권과 관리권을 온전히 드려서 그 분의 뜻과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것, 다시 말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주의 계통이나 후속이론(두 번째 축복이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구원받은 후 특별한 계기를 통해 "성령뱁티즘을 받음으로" 능력이나 권능의 성령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즉 성령을 받고 성령뱁티즘을 받았을 때) 이미 받았던 성령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에서 능력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체험했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가운데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 그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능력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한 죄인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처럼 큰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복음 그 자체가 기적을 낳는 능력인 것이다.

십자가가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는 교만한 자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렇게 경고하였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19-20). 말씀충만하고 성령충만할 때 그리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divine power)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시시때때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해 보아야 하겠다:

"나는 지금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가?"

"나는 지금 내가 나의 주인이지는 않은가?"

"나는 지금 정녕 나의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신가?"

"나는 지금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통치를 받고 있는가?"

"나는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 삶을 전폭적으로 맡기고 있는가?"

"내 마음 속에 성령께서 미워하시는 죄는 없는가?"

"나에게 습관적으로 타성적으로 반복적으로 범하고 있는 죄는 없는가?"

"나에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는가?"

"나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는가?"

"나로 인하여 성령께서 근심하고 계시지는 않은가?"

"나는 연기함이 없이 유보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성령의 일깨우심과 인도하심에 영적으로 민감해 있는가?"

"나는 성령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굴복하고 있는가?"

"나는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지금 중대한 결정을 앞에 두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가?"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명령문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런데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명령문이다. 그것도 현재시제의 명령문이다. 이 말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고,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성령의 거룩한 속성이 그리스도인의 마음 곳곳에 편만하게 스며들게 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을 다양하게 받았다고 해서 성령충만(Spirit Filling)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들 그 자체는 성령충만이나 신앙성숙의 척도가 아니다. 은사들이 풍성하다고 해서 무르익은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성령충만이 성숙한 신앙을 갖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동시에 아름답고 맛있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업적들을 남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격과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지속적인 성령충만이 그리스도인을 "작은 예수"(a 'little Jesus')가 되게 하는 것이다. (끝)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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