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은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다. 7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천일야화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부터 내전에 휩싸여 있다.
사실 예멘은 생소했던 나라다. 지난 5월 내전을 피해 549명의 난민이 제주도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더구나 아직 우리나라는 난민에 익숙하지 않다. 정부차원의 난민 인정은 인색하기 그지없다. 1992년 우리나라가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아래 난민협약) 가입 이후 9년만인 2001년에 비로소 1호 난민이 나왔다. 2012년 아시아에서 우리나라가 처음 난민법을 제정했지만 2018년 5월까지 난민 인정률은 4.1%에 불과하다.
난민을 보는 시선은 참으로 야박하기 그지없다. 온갖 가짜 뉴스가 판을 쳤고, 보수 개신교계의 '입'을 자처하는 한국교회언론회는 예멘 난민에게 테러리스트 이미지를 씌우는 논평을 냈다. 개신교인들이 예멘 난민 반대에 앞장서는 건 슬프지만 사실이다. 반면 인도주의에 따라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논란은 급기야 지난 달 30일엔 난민 수용 여부를 둘러싼 찬반집회로까지 이어졌다.
예멘 난민 수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지만, 정작 예멘은 어떤 나라이고,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마 이런 무지가 편견을 조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질곡의 예멘 현대사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오게 된 근본원인은 2015년부터 시작된 예멘 내전이다. 그런데 내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현대사를 되짚어 보면, 예멘 내전은 보다 일찍 씨앗이 뿌려졌다는 판단이다.
1990년 이전까지 예멘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1839년 영국, 그리고 10년 뒤인 1849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각각 남부와 북부를 점령하면서 예멘의 분단은 시작됐다. 남북 분단이 20세기 냉전의 산물이라면, 예멘의 분단은 19세기 강대국 정치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분단 이후 남북 예멘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국제분쟁전문기자로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이라크 등을 누빈 정문태 기자는 자신의 책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 취재 기록>에서 남북 예멘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한다.
"북예멘에서는 1962년 민족주의를 내건 압둘라 알살랄이 쿠데타로 마지막 왕이라 부를 만한 종교지도자 이맘 무함마드를 살해하고 예멘아랍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북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뒤를 받친 왕당파와 이집트가 도운 공화파로 갈려 내전과 군사쿠데타로 유혈전복을 거듭한 끝에 1978년 쿠데타로 등장한 살레가 통일 때까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했다. 한편 영국 식민통치를 받았던 남예멘에서는 독립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르크수주의 민족전선의 카탄 모하메드 알사하비가 초대 대통령으로 예멘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이어 1969년 예멘사회주의당이 집권한 남예멘은 국호를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바꿨다."
남북은 1971년과 1978년 두 번의 전쟁을 거쳤다. 그러다 1990년 당시 북예멘 대통령이었던 알리 압둘라 살레를 대통령으로, 그리고 알레 살렘 알베이드 남예멘 대통령을 부통령으로 하는 통일예멘공화국을 선포했다. 예멘 통일은 독일식 흡수통일이 아닌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통일 예멘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3년 부통령 알베이드가 불평등을 이유로 통일수도 사나에서 아덴으로 철수한 것이다. 대통령 살레는 군사력을 동원해 남예멘을 공격했다.
이에 앞서 1991년 걸프전 당시 예멘은 이라크를 지지했다. 또 미국에 공군 기지를 제공한 사우디아라비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러자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에서 일하던 예멘 노동자 5000여 명을 쫓아 버렸다. 국제사회도 예멘을 백안시했다.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동자 귀국 조치로 인해 예멘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이런 불안이 결국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예멘 전쟁은 1994년 7월 북부의 승리로 끝났고, 살레 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들어갔다. 2011년 아랍에 불어닥친 이른바 '아랍의 봄'은 예멘에 또 한 번의 폭풍을 몰고 왔다. 아랍의 봄은 튀지니, 이집트, 리비아 등 중동 지역의 장기집권 세력들을 무너뜨렸다. 예멘의 살레 역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2013년 2월 사임했다.
장기집권 무너지니 내전 소용돌이로
살레 사임은 또 다른 불안을 불러왔다. 살레 사임 이후 선거를 통해 하디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러다 2014년 9월 예멘 북부를 장악한 후티 반군이 하디 정부를 공격했다. 후티 반군은 시아파 종교-정치운동에서 출발했다가 미국·사우디 등 외세에 반발해 무장세력으로 확장해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시아파 종주국을 자처하는 이란은 후티 반군을 배후지원하고 있다.
한편 아랍의 봄 당시 퇴임한 살레는 후티 반군을 등에 업고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살레는 후티 반군에게 사살당했다.
예멘 사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입하면서 국제전 양상으로 번져 나갔다.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한 아랍 동맹군이 예멘 내전에 개입한 것이다.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의 개입은 시아파 이란과의 세력 대립 양상도 띠었다.
미국·영국 등이 주도하는 국제사회는 예멘 사태에 미온적이다. 중동의 강력한 우군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자신들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핵 문제로 갈등 중인 이란과 전쟁을 벌이는 걸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멘 내전은 중동 지역이 안고 있는 모순의 축소판이다. 다만 예멘이 산유국이 아니고,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입했기에 국제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예멘 사태는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간 통일 담론에서 주로 거론되는 모델은 독일식 흡수통일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독일보다 정세가 훨씬 복잡하다. 이런 이유로 예멘의 불행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오랜 독재정치와 4년 가까이 이어지는 내전으로 인해 예멘 국민들은 자의반 타의반 고향을 등지고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는 상황이다. 예멘 난민들의 처지는 국토가 외세에 의해 두 동강 나고, 또 얼마 되지 않아 동족끼리 전쟁을 치르며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지난 날 우리의 모습과 겹친다.
난 우리 정부가 예멘 난민들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가지길 바란다. 거창한 인도주의나 특정 종교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다. 예멘 국민들은 가깝게는 2014년, 멀게는 1990년부터 이어진 신산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평범한 이들이 겪은 경험은 우리에게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리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한 마디 더 적는다. 개신교 일부가 이들을 홀대하는 건 참으로 무지하고 참으로 반그리스도적이다.
덧붙이는 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신청허가 폐지/개헌' 청원에 3일 오후 4시 기준 60만 478명이 서명을 마쳤다. 청원 답변 기준인 20만명을 넘었기 때문에 청와대는 난민법과 관련한 입장을 밝힐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