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그리스는 예뻤다(1)

유연희 (감신대 외래교수)

편집자 주] 구약학회는 지난 7월 9일부터 16일까지 7박 8일 간 그리스를 탐방했다. 탐방에 동반한 유연희 교수가 여행기를 보내왔다. 유 교수의 납량(納凉) 기행문을 읽으며 지중해 연안을 함께 다녀보자. 기행문은 3회에 걸쳐 연재한다.

구약학회 그리스 여행
(Photo : ⓒ 로뎀여행사 )
▲구약학회의 그리스 탐방 이동 동선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표를 살 때부터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번엔 단체여행이라 그런지 내 여행은 공항에서 시작되었다. 학회가 준비한 7박 8일(7월 9-16일)의 그리스 여행팀 이십여 명, 낯익은 얼굴과 낯선 얼굴이 절반씩 섞여 있었고, 배우자도 몇 분 오셨고, 남녀가 약 절반씩이었다.

여행은 항상 옳다. 밀린 일거리가 그대로 있는데 여행 날짜가 번개처럼 다가왔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는 틀렸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어도, 많은 성과가 없었어도 여행해도 된다. 해야 한다.

공항은 기다림의 공간이다. 시내버스 1분을 못 기다리는 도시인들도 기꺼이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곳이다. 낯선 사이에 대화도 하게 만든다. "요즘 어떤 주제에 관심 있으세요?" "저는 성서 이야기와 여러 겹의 독서 반응에 관심 있어요." "성숙하기 위한 공부는 어떤 걸 하세요?" "어릴 적엔 칭찬 받기 위해 공부하고 학위도 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지만, 성인으로서 새로 짜는 삶은 무엇인가요?" "학교와 교단의 부패나 불합리함을 보며 저는 신학이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논문보다는 책이 대중이 접근하기 쉬워서 얼른얼른 책으로 내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이 여행은 떠들기 좋아하는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연습을 하기에 딱 좋은 기회렷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상대가 무언가 나보다 못한 것을 찾거나 그렇게 상상하고 판단하여 상대를 작게 만들려는 것은 거의 본능이다. '나의 그런 생각들을 빨리 알아차리고 가벼이 지나가게 해야지. 대신 이 사람은 내게 무언가 배움과 깨달음을 줄 스승이라고, 내가 모르는 귀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여행 동안 내가 행복하게 해주어야할 사람, 실은 나의 일부라고 생각해야지.'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하고 나니, 여행에 임하는 내 존재 방식을 창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보탬이 되는 존재, 즐겁게 해주고 칭찬하는 존재로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중 몸이 불편한 회원이 있었는데, 다른 회원이 짐을 미리 택배로 받아 가져왔다. 휠체어를 미는 그 친구, 두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주변에서 말한다. "내 물건 중 가장 예쁜 모자를 그만 두고 왔어요." "나도 모자를 깜빡 두고 왔는데." 사실 우리는 다 무언가를 두고 왔다. 난 토비를 두고 왔다. 내가 없으면 안방에 쉬야를 하는 냥이 녀석이다. 또 내가 없으면 "하늘나라의 평화가 이 땅에 임하는" 경험을 한다는 남편을 두고 왔다. 첫 끼니부터 탄수화물 덩이인 짬뽕을 마누라 잔소리 없이 먹는다니 얼마나 맛있을까. 이참에 나도 그리스에 내 잔소리 재능을 좀 두고 와야 할텐데.

밤새 날아 새벽에 도착한 아부다비 공항. 서너 시간 기다려 아테네 행으로 갈아타야 했다. 공항면세점은 세계적인 브랜드 상품들이 점령해서 어디나 똑같다. 여긴 장난감 가게의 동물인형이 곰이 아니라 낙타인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근데 장난감 가게에서 내가 만행을 저질렀다. 여아 장난감, 남아 장난감 코너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바비 인형류와 자동차류가 차례로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큰 바비 인형을 남자 장난감 선반 한 가운데로 옮겨두고 도망나왔다.

고린도(코린토스)

아테네 공항에 이른 오후에 도착한 후 전세버스로 서쪽으로 78km 떨어진 고린도로 이동했다. 버스로 긴 시간 이동할 때마다 가이드의 설명이 나왔다. 가이드는, 그리스에서 약 30년을 자녀를 키우며 이웃과 교류하며 산 한국 여성의 주관적인 경험으로 그리스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해 찰지게 들려주었다. 가이드의 걸죽한 입담에 우리는 때로 포복절도했고, 신화와 역사와 현실이 뒤섞여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리스의 특이한 자연환경과 사람살이를 배우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스는 발칸 반도의 최남단에 있고, 위로는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가 있고, 동쪽에 터키가 있다. 남서쪽에는 이오니아해, 남쪽에는 지중해, 동쪽에는 에게해가 있다. 국민의 98%가 그리스인이며, 그리스어를 쓴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겨울과 여름으로 나뉘는 나라. 여름엔 지중해성 고온으로 산과 들이 한국처럼 진녹색이 가득하지 않다. 올리브나무 같은 관목이 많고 다육이 큼직하게 잘 자란다. 산은 국토의 20프로이고, 관목 숲이라 멀리서는 빈 곳이 많이 보인다. 그래도 북쪽에는 소나무 삼림이고, 눈, 비가 내려 벼농사도 짓는다.

그리스는 8년째 IMF 상황이다. 국가는 가난해도 개인은 그렇지 않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리스는 농업과 제조업이 주요 산업이다. 국가 부채로 그렉시트의 위기를 겪었지만 구조조정을 하며 극복하는 중이고, 특히 요즘엔 인구의 세 배인 3200만 명의 관광객이 GDP의 20%를 벌어주므로 경제위기 극복에 큰 도움을 준다. 지방을 다니니 곳곳에 문 닫은 가게들이 많아 경제가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 보인다. 국토(남한의 1.4배)에 비해 인구(1100만)가 적으니(인구밀도 82명/㎢; 한국은 515명/㎢), 수도 아테네(약 400만)만 벗어나면 어디든 널널하다.

색다른 산과 들을 보면서 오니 금방 고린도이다. 오늘은 시간상 고린도 운하와 바울 기념교회(정교회)만 방문한다. 고린도 운하는 지중해와 에개해를 잇는 좁은 운하로서(길이 6km, 넓이 21m, 높이 70m), 19세기 말에 완성되었다. 현재는 산업이 아니라 관광 목적으로 배가 다닌다. 다리 아래로 좁고 깊은 운하가 근사했다.

고린도는 기원전 7, 6세기에 인구 60만이 넘었던 부유한 항구도시였고,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도시국가였다. 성서에는 고린도가 사람이 몰리고, 상업이 성하고, 돈이 넘치고, 타락한 도시라고 묘사되어 있다. 지금은 인구 3만의 지방도시이다. 구 고린도는 1858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또 1928년과 1933년에 각각 지진과 대화재로 파괴되어 다시 재건되었다. 바울은 구 고린도에서 일 년 반 동안 활동했지만 기념교회는 신 고린도에 있다. 바울 기념교회에는 왼쪽에 베드로 사도, 오른쪽에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고, 교회 입구 오른쪽의 대리석 판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8절이 새겨있다. 바울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대주의 정책(45년)에 따라 고린도로 이주한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였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그런 사람들이었고, 바울은 이 부부와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행18:1-4).

우리는 고린도에서 동남쪽 11km에 위치한 겐그리아 항구(케흐리에스)에서 묵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겐그리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롬 16:2). "이렇게 그리스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고 마치려니 아무래도 오늘 내가 우리 일행에 부담을 준 사건을 고백해야 하겠다. 우리 그룹을 즐겁게 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로 여행에 임하겠다고 했는데 하루도 못가서 망했다. 가이드가 고린도의 부패상에 대해 설명할 때 "고린도에 동성연애가 성행했고요, 왜 레위기에도 동성연애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했잖아요"라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저기요, 동성연애가 아니고 동성애이고요, 학계에서는 오늘날의 동성애가 성서의 동성 성행위에 대한 언급과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성서를 그렇게 곧바로 인용해서 현대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버스 안은 순간 모종의 고요가 감돌았다. 불과 한 주 전에 우리 교회의 스무살 남짓의 게이 교인이 자살을 해서 애통하며 화장예배와 납골당안치예배를 집전했던 나로서는 그 순간 튀어나올만한 말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우째, 엄청 보수적인 배경에서 오신 분들도 있는데. 오늘은 일단 자고 보자.

고린도에서의 둘째 날이다. 그리스에서의 아침 식사는 처음인데, 나는 지중해식 아침 뷔페가 너무 좋아서 매끼 그렇게 먹고 싶었다. 식사 후 곧장 고린도 유적지로 향했다. 유적지는 해발 575미터의 아크로코린트 돌산의 성채 아래에 있었다. 도리아식 아폴론 신전(기원전 6세기)의 남은 기둥(원래 38개 중) 7개와, 헤라 신전, 옥타비안 신전, 페레 샘, 극장, 별장, 상점, 목욕탕, 그릇 만드는 곳, 체력 단련장, 개선문, 도시 중심부에서 항구까지 돌로 포장한 도로, 바울이 재판받던 비마 터(행 18:12-17)가 있었다. 옆 박물관에는 얼굴 없는 조각상들을 비롯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회당이라는 말이 새겨진 대리석 조각, 메노라 셋이 부조된 조각을 보며 고린도까지 와서 유대교를 간직한 사람들과 불원천리 찾아와 그들에게 예수에 대해 가르친 바울에 대해 한동안 생각했다.

올림피아

우리는 다시 서쪽으로 두 시간쯤 달려서 고대 올림픽이 열린 작은 산간도시 올림피아에 갔다. 세계문화유산((1989년에 등재)인 올림피아는 독일 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올림피아는 델피와 더불어 도시국가가 아니라 성소였다. 유적지에는 제우스 신전과 보물창고들, 페이디아스의 공방, 레오니데온(4세기에 건축가 레오니데스가 지은 숙박시설), 필립페이온(기원전 4세기에 필립 2세가 세우고 아들 알렉산더가 완성한 이오니아식 원형 건물), 헤라 신전 등 고대 건축의 걸작들이 밀집한 곳이고, 체육관, 짐나지움의 죽 늘어선 기둥들, 경기장, 크로니오스 언덕 등이 있다.

기원전 10세기에 올림피아는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기는 기원전 800년경부터 그리스 세계로부터 많은 참가자가 모여 정기적으로 신에게 바쳐지는 행사가 되었다. 제우스상은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황금과 상아로 장식하여 신전에 안치했는데, 고대 올림픽이 중단된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가 기원전 5세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을 모신 헤라 신전이 형태가 가장 많이 남아 있어서 현대 올림픽의 성화 채화는 이 신전 앞에서 한다. 누군가 올리브 가지를 엮어 관을 만들어서 우리는 돌려가며 머리에 쓰고 사진을 찍었다. 운동장은 길이 192미터, 폭 28미터의 직사각형이었다. 이 더운 햇살아래 몇 사람이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뛰었다. 2500년을 넘어 같은 운동장에서 뛰는 사람들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근처의 아르키메데스 박물관에서 유물 전시도 보았다.

우리는 다시 아테네로 서너 시간 달렸다. 가이드는 어떤 침례교 교역자 성지순례 팀에게서 '교역자 이동 중 퀴즈'라고 하는 귀한 문건을 얻었다며 우리에게 퀴즈를 알아맞히라고 했다. 출산을 장려하는 한국정부가 싫어하는 속담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찬송가는? 세상에서 가장 야한 닭은? 다른 문제는 기억이 나지 않고, 이건 내가 다 맞춘 것인데, 상품이 있었다면 더 실적이 좋았을 것 같다. 답은 '무자식 상팔자, 열받아(바다), 썰렁해, 예수가 내게 계시니 시험이(시어머) 오나 겁 없네, 홀딱'이다.

저녁으로 한식을 먹었다. 가이드는 우리가 한식에 열광하지 않는 이상한 한국팀이라고 했다. 외국서 오래 산 사람들이 많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피레우스 항에서 야간 페리를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배는 35,000톤에 700개의 침대, 1500명을 수용하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식당, 카페 등이 있는 정기선이다. 단체할인 가격이 65유로였는데, 침대칸이 아닌 대합실에서 앉아가는 경우 15유로라고 한다. 욕실과 옷장이 딸린 침대 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고, 밤 10시에 출발해서 아침 6시에 도착하는 배였다. 갑판의 카페가 늦은 밤에 문을 닫을 때까지 우리 몇 사람은 강한 바닷바람을 쐬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무슨 얘기였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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