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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 그의 이름은 정의입니다 (2)

삶을 위한 신학-신학을 위한 삶

다음은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방한 중 서울신대, 한신대, 연세대 등에서 공개 강연한 발제문이다. 몰트만 박사의 허락을 받아 강의 내용 전문을 싣는다.  

 

▲ 튀빙엔 대학 위르겐 몰트만 교수
3. 예수 그리스도 - 피해자와 가해자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의 계시

피해자 : 우리가 복음서를 펴서 읽으면 그 앞장에서 곧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예수의 처음 시선이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아웃사이더, 그러니까 죄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서 61장 1절의 약속에 따르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든 사람에게 치유를 선포하며,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빛을, 억눌린 사람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약속하십니다.(눅4:18-19) 예수께서 하나님 영의 치유 능력을 병든 사람에게 보이신 것처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의 희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 주십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눅15:2) 여기서 "죄인과 세리"는 부유한 사람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한 사람들,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해 주심을 의미하며, 그 사람들의 사회적 치유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그들의 영적인 감옥을 깨뜨리시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과 연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희생자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하는 사람은 그런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예수가 걸어간 수난의 길은 죄의 희생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속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이 그리스도 찬가에 잘 드러난 것처럼, 그분은 부자유한 종,능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로써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은 연대의 그리스도론(Solidaritat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서가 들려주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포기의 길입니다. 그는 병든 사람들, 악의 희생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으며, 끝내는 당신 스스로 로마 정치 권력의 희생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과 똑같이 - 그 의지까지 없는 처지를 오히려 의미 있는 것으로 보셨고, 이 세상에서 내몰린 처지를 하나님에게서 부름 받은 상황으로 보셨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세상, 의롭다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미래마저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선포하셨습니다. 독일속담에서 "꼴찌"가 개한테 물린다고 하지만[마지막 사람이 불리하다는 뜻],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엎은 예수에 대한 이 세상의 대답입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예수 안에 바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즉 당신처럼 굴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수많은 십자가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권력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걸어간 그 피비린내 나는 길 양편에 늘어선 십자가, 스파르타쿠스의 십자가에서 독일 히틀러 독재의 죽음의 수용소,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군도,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정권의 '실종자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에서 버림받은 상황 속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형제가 되어주셨고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죽음의 감옥에서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잇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분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59세의 오스카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대주교의 회심체험이었습니다. 혼 소브리노(Jon Sobrino)는 이렇게 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통해 그에게 나타나셨다....그는 가난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동포들의 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보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인자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너희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 중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자 가운데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입니다.

가해자 :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주 일찍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가해자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도 이해했습니다. 가해자들은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모델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세상의 죄를 지시는 분... 그분의 상처를 통해 우리의 병을 낫게 하시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사53:5). 이것을 우리는 대속의 그리스도론(Stellvertretung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의를 행하는 우리까지도 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운명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이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롬5:25)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세상 어떤 죄인도 자기 죄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는다면, 그는 모든 자기 존중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비난과 죄에 대한 깨달음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희생자의 눈에서 우리의 죄를 인식하는 순간, 그 죄는 무거운 짐처럼 우리는 내리누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상황이 심각할 경우, 이런 죄의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도대체 죄의 용서라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 누구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거나 과실을 보상할 수 업습니다. 모든 죄는 한 사람을 그의 과거에 붙잡아 매고, 미래를 향한 그의 자유를 강탈합니다. 하나님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대량학살은 계속해서 대량학살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어난 죄의 사실을 풀어 없애시며,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로 만드시고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신다'고 할 때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지시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해자를 죄의 종으로 만드는 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엄청난 사건입니다. 본회퍼가 제대로 말했듯이, 다른 모든 것은 '값싼 은총'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세 단계를 거쳐 일어납니다.

a. 악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그 악을 행한 사람들은 자기의 실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첫 단계는 항상 진리로 진입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가해자들은 언제나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희생자의 오랜 기억에 의지하여야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는 희생자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발견할 때 비로서 자기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b. 두번째 단계는 의식의 전환이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양산하는 지배 체제를 깨뜨리는 것으로, 또 더 이상 가난한 사람과 자연을 희생시켜서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무 의식 없이 죽임과 죽음을 지향하는 삶에서 의식적으로 생명과 정의를 지향하는 삶에 이르는 겁니다.

c. 가해자가 자기 스스로 일으킨 피해를 없애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오직 그 때 가해자도 마침내 희생자들과의 새로운 친교, 정의롭기 때문에 새로운 친교의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복"(Wiedergutmachung)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아무것도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좋아질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해자를 죄의 권세와 죄책의 짐으로부터 해방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가해자를 반드시 희생자의 면전에서 해방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가해자에게 화해를 제안할 수 이는 오직 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자 편에 계시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적인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면, 그들은 함께 이 죽음의 세력을 만들어 낸 죽음의 혼돈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희생자의 칭의는 가해자의 칭의에 앞서며, 그들은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 새로운 창조, 생명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4.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비전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어떤 것을 기대합니까? 전통적으로는 보상과 형벌, 천국과 지옥, 착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 것을 생각합니다. 맡습니까? 시편 96편 말씀을 한번 들어봅시다.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주님은 정희로 땅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여기서는 보상과 형벌에 대해서 전혀 얘기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언급은 마지막 줄에만 나오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심은 땅입니다. 창세기 1장 24절에 나오는 것처럼 식물과 동물을 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때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의 치유입니다.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 사이의 모든 파괴된 관계가 바로 잡혀야 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고발과 변호와 선고가 있는 법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바로 잡는 것,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리를 찾아주어, 모두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하며 숲의 모든 나무들도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정의로 땅을 심판하시러 오실 때' 자연은 활짝 피어나 새로운 산물을 내고 하나님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 공동체를 감싸게 됩니다. 모든 것은 썩지 않은 새로운 형체로 변하고 창조주의 영원한 생명력에 참여하니, 이는 그가 '오셔서' 그분의 피조 세계에 영원히 머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하나님의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을 정의로 재판'할 뿐만 아니라(11:4) 이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의 평화를 안겨 주십니다.(11:6-11) 그렇기 때문에 성탄의 이야기에서 천사는 땅과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호의'(눅2:14) 천사들은 땅에는 평화를,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호의를 선포합니다.

바울서신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시고, 가해자들을 바로 잡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통일'(엡1:10)과 '온 우주의 화해'(골1:20)를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우주적 그리스도론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정의로 땅을 심판하셔서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로운 땅'이 생겨날 것입니다(벧후3:13).

이 희망은 혼란스러운 자연의 힘이 인간 세계에 일으킨 파괴, 즉 쓰나미, 싸이클론,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그런 파괴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재해를 통해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오실 것이니 그는 땅을 정의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땅의 심판과는 달느 모습으로 하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이 인간의 세상에 가져온 모든 쓰레기를 치우는 최후의 심판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악의 세상은 해체되고, 죽음의 제국은 끝장나고, 지옥은 파괴됩니다. 그분의 심판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서는 진멸의 NO(아니)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빛나는 YES(그래)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오늘 여기서 죄의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죄의 가해자를 바로잡는 일로 시작된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통한 죄의 극복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지향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으로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희생자로 만드는 힘,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력을 하나님께서 파멸하실 것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칭의가 일어날 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칭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면서 죄와 죽음을 몰아내십니다. 죄와 죽음은 그분의 피조물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는 '강자의 권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누가 재판관이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신약성서에서 그 심판은 '인자의 날'입니다. 그런데 인자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오신 분이십니다(눅19:10, 마8:11). 잃어버린 것 가운데 그분이 찾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보복하고 앙갚음하는 분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죄와 죽음과 지옥을 이기고 부활한 승리자로 오실까요? 요한계시록 1장 18절은 그 분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열쇠를 가지고 무엇을 하실까요? 분명히 뭔가 잠겨 있던 것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으로,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로 모든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어떤 정의로 심판하실까요? 그분이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를 대할 때 쓰셨던 정의 이외에 다른 어떤 정의로 심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안하면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실 심판관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입니다. 이 말은 이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분은 이 세상의 고난을 몸소 겪으셨고 이 세상의 죄를 지셨던 분이라는 뜻입니다. 희생자의 권리를 지켜주시고 가해자를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은 어떤 복적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전통은 보상과 형벌의 문제를 대대적으로 결산하는 날에 관해 이야기했고, 결국은 그것이 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정의가 하늘이든 땅에서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누르고 이기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죄와 죽음에 기여하는 결산(Abrechnung)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에 기여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것 바로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이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 영원한 새 창조는 정의에 기초하여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여러 이미지나 관념으로 묘사하면서도 오직 이 세상의 과거만을 볼 뿐 그 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실수입니다.

최후의 심판과 모든 것의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의 새로운 날 아침에 정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시편 96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땅이 기뻐 외치고 들판이 환호하며 나무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한다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공의의 상량식(上梁式, Richtfest)을 고대하며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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