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6:5-8, 로마서 13:11-14, 마가복음 8:34-38 -
우리는 매일 달력을 보며 삽니다. 오늘이 몇날 며칠인지 점검하며 삽니다. 달력은 영어로 '캘린더'(calendar)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역법'(曆法)이라고 합니다. 천체의 운행을 바탕으로 한 해의 주기적 시기를 밝힌 것이지요. 조선시대에는 자주적인 역법의 사용이 중국으로부터 금지됐었습니다. 역법의 예속은 곧 정치적 예속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통일신라와 고려에서 사용되던 역법도 모두 중국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역법을 처음 제정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입니다. 그 때 펴낸 것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인데, 사실은 이것도 중국력인 <대통력(大統曆)>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양의 달력인 <시헌력(時憲曆)>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는 비로소 그 낡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 즉 화이론(華夷論)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달력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달력을 보며 사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두 개의 달력을 보며 삽니다. 하나는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력'(敎會曆, Church Year)입니다. 즉 '하나님의 달력'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달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력은 대림절(待臨節, Advent)에서 시작합니다. 메시아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교회의 시간은 시작됩니다. 올해의 대림절은 12월 첫 주일이지요. 이후 성탄절을 거쳐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즉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나타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거쳐, 사순절(四旬節, Lent), 즉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40일을 지나 부활절(復活節, Easter)과 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 Pentecost)로 마무리됩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창조절'로 지킵니다.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창조절은 그리스도교 2천 년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지키기 시작한 절기입니다. 창조절의 필요성은 6개월이나 이어지는 성령강림절이 너무 길다는 사실과 교회력에 뜻밖에도 하나님과 관련된 절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반으로 나누어 그 후반부를 창조절로 지키며 성부 하나님을 기리는 것입니다. 창조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기억하고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창조절의 색깔은 숲을 상징하는 녹색입니다.
창조절의 제정에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의 파괴, 기후의 변화, 그리고 무너지는 생태계가 보내는 위기신호를 감지하고 있습니다. 개구리를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화들짝 뛰쳐나가 산다고 하지요. 하지만 미지근한 물에 집어넣고 서서히 끓이면 그 개구리는 위험한 줄도 모르고 헤엄치며 놀다가 물의 온도가 일정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죽고 맙니다. 한 개인이나 조직 그리고 사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가해지는 외부의 충격에는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즉각 대응하지만, 서서히 나빠지는 변화에는 둔감하기만 합니다. 뒤늦게 위기를 알아차려도 너무 늦은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기후변화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 여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111년 만의 폭염이라는 불볕더위는 정말 살인적이었습니다.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서울의 여름은 100년 사이에 94일에서 142일로 거의 두 달 가량이나 길어졌습니다. 한 해의 3분의 1이 여름인 시대가 온 것입니다. 폭염이 심한 해는 혹한도 심하다고 합니다. 그 둘이 한 세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반도에서는 봄과 가을이 점차 사라지고 길고 뜨거운 여름과 지루하고 추운 겨울만이 남을 것 같습니다. 우려되는 사실은 이번 111년 만의 폭염이라는 기록이 앞으로 111년 뒤에 갱신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년부터 매년 갱신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지구 북반구 전체가 말 그대로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우리만 더운 게 아닌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요? 북극권의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었습니다. 그 결과 2만 년 전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한 번도 녹지 않았던 '북극 최후의 빙하'마저 무너졌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면 수십 년 안에 지구의 기후는 이른바 '온난기'에 접어들고 지구는 '온실 지구'가 됩니다.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파리기후협정>의 목표가 달성돼도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없다는 암울한 연구결과까지 나왔습니다. 기후학자들은 지구의 기온이 21세기 말쯤에 가서 산업혁명 때보다 4~5도 정도 오른 뒤 안정화될 것으로 예측합니다. 그 수준이면 재앙입니다. 이 세기가 저물기 전에 우리 중 수십억 명은 죽을 것이고 그나마 견딜 만한 기후가 남아 있는 극지방에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말처럼 "인간에게 착취당해온 지구가 이제 인간에게 복수를 시작한 것"일까요? 그는 오래전부터 지구가 심하게 앓고 있으며 곧 10만 년 동안 지속될지도 모르는 '열병'(熱病)에 걸렸다고 경고했었습니다. 지금은 매우 위중한 시기입니다. 뭔가 과학이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하고 기다리기에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지금은 우리 인간과 지구의 '관계 맺음'에 있어서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5-7절입니다.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 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새번역). 혹 하나님은 오늘도 같은 후회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인간의 무지(無知)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잘났다고 으스대지만 사실은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냇물이 제 몸의 핏줄이요 뒷산의 숲이 제 몸의 허파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산과 물과 푸른 대지와 하늘을, 그리고 거기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을 '남'으로 여기고 또 '남'이니까 함부로 대합니다. 우리 한글에 '나'와 '남'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보면 거기서 이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 '나'를 발음해보십시오. 입 모양은 활짝 열린 상태가 됩니다. 나는 이렇게 열려 있는 동안 '나'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그루의 나무를 향해 나를 열고 있으면 나는 그 나무에게 '나'가 되고 그 나무도 나에게 '나'가 됩니다. 그런데 '나'라고 발음하다가 한번 입을 다물어 보십시오. '남'이 됩니다. 내가 나를 닫으면 '남'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남이 되니까 다른 모든 것도 따라서 남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향해 내가 나를 닫아 버리면 나는 그 나무에게 '남'이 되고 그 나무도 나에게 '남'이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또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은 채로 강물의 흐름을 끊어버리고 울창한 숲을 베어버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강과 산이 '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닫아 자연을 '남'으로, '타자'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느 철학자(김상봉)의 말대로 우리가 관계 안에서 '서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홀로 주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연을 '남'으로 여기지 않고 '나'로 여겼다면 우리들은 저 아름다운 숲과 강과 대지를 그렇게 함부로 파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끊고, 막고, 파내는 것인데 어찌 그리 하겠습니까?
가끔 시골을 여행하다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길을 묻게 되면 묻는 대상은 대부분 어르신들이고, 대답은 늘 '이리로 쭉 가면 된다'는 식입니다. '얼마나 가면 되느냐'고 물으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다보면 '조금'이 아니라 '한참'이고 '쭉'이 아니라 '이리저리'입니다. 시골 노인들의 길 안내는 황당해서 그만 웃음을 자아낼 때가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퍼뜩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시골 어르신들은 '공간' 속에 살고 있고, 나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은 '공간' 속에서 길 안내를 했고, 나는 '시간'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려 들었다는 점입니다. 시골 노인들에게 땅과 공기와 나무 등 모든 공간의 구성요소들은 서로 교감하지만, 나는 '스피드'라는 개념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간성을 잊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공간 속에서 자연과 삶을 건강하게 일치시켰던 우리 선조들의 '공간주의 미학'은 옛 마을에 들어가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동네입구에는 장승과 솟대가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거기를 조금 지나면 일종의 참여미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서낭당 돌탑이 나옵니다. 그 뒤를 다리와 시냇물 그리고 가로수가 이어지고, 타작마당과 정자나무가 나오면 거기가 마을의 광장입니다. 살림집들은 그 뒤로 펼쳐지고, 아담한 동산들이 병풍처럼 감싸 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원래 이렇게 공간 속에서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체험하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간이라는 단 하나의 선만 가지고 사는 현대인들은 '속도주의'에 빠져 스스로 생각의 폭을 제한하고 공간과 자연을 토해낼 뿐 껴안지를 못합니다. 아예 공간을 잊고 삽니다.
하지만 시간도 공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물처럼 얽힌 '관계의 공간'입니다. 같은 시기에 뉴욕에 살았던 어떤 두 사람의 후손들을 조사한 한 연구결과를 보았습니다. 맥스 주크스(Max Jukes)라는 사람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라는 사람과 그 후손들을 비교 연구한 것입니다. 맥스는 신앙인이 아니었고 자녀들에게도 신앙교육을 거부했으며 감옥을 들락거리며 살았습니다. 이후 2백 년 그들의 후손 1,026명을 조사해보니 그 중 300명은 각각 평균 13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으며, 680명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이 가족은 나라의 세금만 축내었지 사회에 베푼 것은 단 한 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후손 929명을 조사해보니 목사가 430명, 대학교수가 86명, 대학총장이 13명, 국회의원이 7명, 그리고 미국 부통령 1명이 나왔습니다. 이 가족이 남긴 책은 모두 75권이고 모두 뛰어난 작품들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한 개인은 결코 어느 한 시점에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 개인은 그가 사는 시대의 가정과 사회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공간'에 그물처럼 얽혀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관계성과 공간성을 깨닫는 자만이, 그러니까 지금 나의 삶이 내 후손들과 그들이 살아갈 사회 및 지구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자만이 비로소 '책임적인 자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인 한 시애틀 추장의 말이 생각납니다. 1854년에 땅을 팔라는 미국 정부의 제안에 대해 두아미쉬-수쿠아미쉬 족의 시애틀 추장이 남긴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당신의 제안을 심사숙고할 것이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그것을 어떻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들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게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한 세기도 훨씬 이전에 오늘 우리의 소위 '문명의 세계'에 깊은 울림과 감동을 던져줍니다. 사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오늘처럼 인간과 자연의 연계성을 망각하고 사람의 생각과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와 경쟁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문화는 매우 예외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시대의 예외성을 인식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너무나 당연시 되는 생각과 문화를 초월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스스로 오만해진 오늘 우리의 산업문명은, 또한 그 속에 안주하며 사는 우리들은 자기 스스로를 비추어볼 거울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평생을 청빈하게 살면서 순수한 시를 읊었던 천상병 시인은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흘 전 고(故) 이수아 성도의 입관예배 설교 때 인용했던 시인데, 오늘 다시 인용해보고 싶습니다. 이수아 성도가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평생을 자유인으로 살았던 시인에게 인생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뛰노는, 멋진 소풍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고 싶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시는 결코 도피적이지 않습니다. 그의 시는 결코 저 세상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귀천>이라는 시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봄나들이 소풍과도 같이 짧은 우리의 이 땅에서의 인생을 깊이, 그리고 아름답게 긍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상병 시인의 시를 생태적 관점에서 확장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지구라는 초록별에 보내진 순례'와 같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 곧 '하나님의 집'(oikos) 안에서 우리는 아주 작고 푸른 지구별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땅을 경작하고 지키며"(창세기 2:15), 서로 돌보고 아끼며 살라고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공동의 기도문'은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발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의 기도문을 제가 번안한 것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이 우주라는 놀라운 집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 광대함과 풍요로움, 그 안에 넘치는 생명의 풍성함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그 일부가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창조의 아침의 장엄함을 보게 하옵소서. 기쁨 가득한 사랑의 노래를 듣게 하시고, 봄날이 숨 쉬는 향기를 맡게 하옵소서. 이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리게 하옵소서. 근심에 빠지거나 정욕으로 눈이 멀어, 길가의 가시나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타오르는데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게 하옵소서."
라우쉔부쉬는 길가의 가시나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타오른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영광이 이 우주 밖에서 따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 안에 깃들어 환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성의 소유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로마서 1:20)고 말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고린도전서 15:28)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심"(골로새서 3:11)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감수성'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거룩하고 신비롭게 볼 줄 아는 영적인 눈입니다.
성례전(聖禮典, sacrament) 혹은 성사(聖事)이란 말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전달되는 기독교의 예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물질이, 자연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적인 권능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찬용 빵과 포도주만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만물이 거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만이, 시온만이,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몸만이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우주만물이, 천하(누가복음 2:1)가, 세상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온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거하십니다. 이스라엘 후기에 발달한 '쉐키나'(schekina) 전통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격적 형태로 창조 안에 거하시며 당신의 집에 사는 모든 것에 생명의 능력을 부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성부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영성과 신앙의 감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인간과 지구 사이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어울림'을 다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을 때, 즉 모든 것을 '나'로 만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이 됩니다. 상대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것을 향해 닫힌 '남'이 되면 우리는 죽은 자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사이에 본래부터 존재해온 '근원적인 유대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생명의 공간' 안에서 모든 것에 열린 '나'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그리고 그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생명의 일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사하고 축하해야 합니다.
성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때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때'는 '카이로스'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서는 시간과 때를 가리키는 말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두 가지로 구분해 사용합니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직선적인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그것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은총의 시간, 회심의 시간, 변화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크로노스처럼 직선적이거나 평면적이지 않습니다. 입체적이고 공간적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끊어져 있지 않고, 그것들이 하나의 공간 안에 동시적으로 존재합니다.
이 카이로스가 바로 영어의 "crisis"의 어원입니다. 그러니까 "때가 악하다"는 말은 '지금이 위기의 시간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위기는 단지 파멸로 향하는 위험만이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은총과 회심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마치 한자의 '위기'(危機)라는 말 안에 '위험'과 '기회' 두 가지가 동시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기후변화로 인한 총체적 생명의 위기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1-14).
어떤 사람이 추운 겨울 길거리를 지나다가 한 어린 소녀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추위에 떨며 동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항의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정말 전능한 신이라면 무언가 대책을 세워놓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니 한동안 할 말을 잊으셨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아주 문득 말입니다. '나는 틀림없이 대책을 세워 놓았는데 무슨 말이냐? 나는 너를 만들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책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기후가 변하고 하나님의 집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책입니다.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은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지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창세기 6:8)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그 한 사람 때문에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멸망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대책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노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든', 그런 하나님의 대안으로, 희망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201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