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신부를 남수단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15일(현지시간) 남수단 한인회와 남수단 매체 '주바 모니터' 등에 따르면 남수단 교육부는 지난 9월 이 신부의 삶과 업적을 담은 교과서를 발간했고, 이 교과서들을 내년 2월 새 학기에 맞춰 일선 학교에 보급할 예정이다.
이태석 신부를 조명한 내용은 남수단 고등학교 시민생활 교과서에 2페이지에 걸쳐 실렸고,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는 3페이지에 걸쳐 다뤄졌다. 남수단 교과서는 이 신부가 1962년에 태어났을 때부터 학창 시절, 남수단에 오게 된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남수단에서 봉사활동을 이유로 교과서에 소개된 것은 이태석 신부가 처음이었다고 현지 매체는 평가했다.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의 톤즈라는 작은 마을에서 유일한 의사이자 사제로, 또한 교육자로서 8년 가까운 세월을 수단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보듬고 그들과 함께 했다.
이태석 신부는 하루 3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였고 그 중에는 의사인 그를 만나기 위해 100km를 걸어서 찾아온 환자도 있었다. 또한 톤즈 인근의 80여개 마을을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가 순회 진료를 하였다. 그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손수 벽돌을 찍어 12개의 병실을 갖춘 병원을 짓기도 했다.
또한 변변한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케냐에서 선생님들을 모셔와 가르쳤으며 손수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무엇보다 이태석 신부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였다.
그들은 절망의 한복판에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같은 수단사람조차 찾지 않는 한센병환자들의 마을을 찾아 그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뭉개진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맨발로 거친 땅을 밟고 다니느라 상처투성이인 그들의 뭉개진 발을 위해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서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그대로 '아버지(Father)'였다.
톤즈사람들에게 '쫄리(John Lee)' 신부로 불리던 이태석 신부는 2010년 1월 14일 대장암과 간암으로 48세의 짧은 나이로 선종(善終)했다. 그의 죽음을 전해들은 톤즈마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흐느껴 울었다. 눈물 흘리는 것을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서 아파도 울지 않고, 배가 고파도 울지 않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는 톤즈사람들(딩카족)이기에 그들의 흐느낌과 눈물 속에는 이태석 신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녹아있었다.
어느 한센병 환자는 이태석 신부를 가리켜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는 절망의 자리에 앉아있던 그들에게 곧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는 한센병 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손과 발을 어루만져주었던 사람, 그는 곧 하나님이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체 야생동물처럼 들판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셈(수학)을 가르치고 음악을 가르쳐주었던 사람, 그는 그들에게 곧 하나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