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소재 한 대학교에서 페미니스트 동아리의 지도교수로 지목된 교수가 학교로부터 재임용을 재차 거부당했다. 대전의 한 대학교에서는 총장의 전횡을 비판한 교수들을 직위해제한데다 학교 정상화를 요구하던 동문 목사의 졸업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는 여성 목사안수 등 여성 목회자의 권리 신장을 주장해온 여성 강사를 부당하게 강의에서 배제하고 해고했다. 이 대학들은 모두 기독교를 건학이념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두 대학은 신학대학이기도 하다. 각 대학들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결정을 내렸겠지만, 학교 바깥에서 바라보기에 이 사안들은 거인 골리앗이 소년 다윗을 과도하게 짓밟은 형국을 연상시킨다.
성경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통쾌하게 때려눕히지만 이들 '기독교' 대학들은 자신들이 골리앗임을 공표하고 있다. 마치 골리앗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다윗을 향해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삼상17:43)라고 고함치며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처럼 보인다. 각 사안에 대한 대학들의 대응 방식이 감정적인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귀찮게 대어드는 녀석'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그냥 창으로 시원하게 한방 날려버린 것 같다. 물론, 소수의 주장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 대학들의 처분은 남녀의 평등, 공평한 행정을 요구하는 소수의 목소리를 벼락같은 괴성으로 손 쉽게 압도해버리려 한 권력의 폭력적 표현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가 이념이 될 때 그 자체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사례는 중세교회사가 증명하고 있다. 중세 교회는 기독교왕국(Christendom)의 이념으로 전횡을 일삼았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세습문제도 이것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왕국을 위한 이념이란 허울은 결국 권력의 자가번식을 꾀하는 지배층의 야욕을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이용당하게 되는 것이다. 작금의 사태를 볼 때 상기의 대학들은 이미 체제상 기독교왕국과 같아서 지배권력의 지속을 존재적 현안으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평등과 공평을 요구하는 주장을 도전으로 간주하고 과도한 처벌을 가함으로써 파장을 막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기독교는 건학의 토대가 아니라 운영을 위한 건조한 지침이 되어버린다. 운영에 필요한 만큼만 기독교의 원리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용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던 때에도 제자들에게서 이런 성향이 포착되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베푸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청중을 감화시키는 설교, 그리고 군중과 함께 움직이는 생활신앙의 활력에서 권력을 감지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을 따르지 않는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경유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고자]"(눅9:54) 했다. 권력은 이처럼 그것의 진행을 방해하는 요소에 대해서 거침없고 가차 없는 징벌로써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한다. 소수의 목소리는 그 행로에서 귀찮은 돌부리일 따름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가?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9:50). 예수께서 일반 속담을 들어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정도로 그들의 태도는 비상식적이었던 것이다. 상기의 대학들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면 그것을 들어보고, 만일 잘못된 것이면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6:1) 그것이 스스로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 상식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적어도 그러한 상식을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지(눅17:21) 우리 위에서 군림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작은 자'는 기독교왕국에서는 설 자리가 없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김을 받는 존재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요한을 꾸짖으셨다(눅9:55). 여기서 '꾸짖었다'는 표현은 눈물이 날 정도로 혼을 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