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멕시코 국경 상황이 사뭇 심상치 않다. 온두라스 등 중미 각국에서 온 '캐러밴' 난민 수백명이 미국 국경을 넘어 들어오자, 미국은 최루 가스로 대응했다. 로이터 통신이 보도한 온두라스 출신 이주민 모녀가 미국 국경수비대가 발사한 최루탄을 피해 도망치는 사진은 현 상황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사진을 찍은 이는 김경훈 기자라고 전한다)
중남미 출신 난민들이 고향을 떠나 미국 입국을 시도하는 건 사실 새삼스러운 문제는 아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향하고, 실제 몇몇은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지금 미국 국경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국제사회에 적지 않은 고민거리를 던진다.
지난 10월 CNN은 미국 세관국경보호국이 멕시코 국경에 설치한 난민캠프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엘살바도르에서 왔다는 한 여성이 인터뷰에 응했다. 이 여성은 범죄조직이 들이닥쳐 아들을 데려가려 했고, 이를 거절하자 2주 동안 감금하고 고문을 가했다고 말했다. 미국으로 온 이유를 묻자 범죄조직의 보복이 무서워서라고 답했다.
이런 사연은 캐러반 난민의 출신국인 온두라스나 엘살바도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마약 카르텔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멕시코나 콜롬비아 시민들 역시 비슷한 문제로 고향을 떠나 미국 밀입국을 시도한 게 지난 역사다.
마약 카르텔, 그리고 CIA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문제를 던지고 싶다. 미국은 캐러밴 난민 문제에 책임은 없는가?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5년작 <시카리오 - 암살자들의 도시>는 이 문제에 답을 줄 훌륭한 텍스트다.
미 연방수사국(FBI) 케이트 요원(에밀리 블런트)은 미국 애리조나 주의 마약조직 근거지 소탕 작전에 나섰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마약조직이 이미 인질들을 살해해 근거지에 암매장한 것이다. 상부 역시 현장을 보고 경악해 한다. 이러자 미 중앙정보부(CIA)가 나서서 '판'을 키운다. 맷 그레이버 요원(조슈 브롤린)이 작전을 진두지휘하기로 하고, 미군 특수요원들로 팀을 꾸린다. 이어 케이트 요원을 차출한다.
팀에 합류한 케이트 요원은 맷 요원의 소개로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를 만난다. 알레한드로의 첫 인상은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배경은 의문투성이다. 케이트 요원은 CIA의 작전에 여러가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지만, 일단 임무수행에 집중하기로 한다.
CIA는 마약 운반 경로 관련 정보를 얻고자 멕시코 연방 교도소에 수감 중인 카르텔 중간보스를 데려오기로 한다. 이에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시우다드 후아레즈로 향한다. 그를 후송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돌아오던 중 카르텔 조직원과는 총격전까지 벌인다. CIA와 카르텔 조직원 끼리 벌이는 총격전은 이 영화의 백미다. 비록 <히트> 등 도심 총격전을 그린 액션영화처럼 강렬함은 떨어지지만, 긴장감만큼은 숨막힐 듯 했다.
케이트는 백주에 벌어진 총격전에 경악한다. 그러나 맷 요원은 가볍게 넘겨 버린다. 한편 알레한드로는 중간 보스를 통해 마약운반 경로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작전은 본격화되고, 미군 특수요원들은 카르텔 조직원들을 '쓸어버린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미군 특수요원들이 요란하게 소탕작전을 벌이는 사이, 알레한드로는 마약 운반 경로로 빠져 나간다. 이어 메데인 카르텔 보스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하고, 그를 제거한다.
이때 알레한드로의 정체가 드러난다. 알레한드로는 콜롬비아 출신으로 마약 사건을 담당하던 검사였다. 이런 사람을 카르텔이 그냥 둘리 없다. 카르텔은 그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고, 알레한드로는 보복에 나선 것이다. 결국 CIA는 알레한드로를 '자객'으로 쓴 셈이다. (이 영화의 제목 '시카리오'는 '자객'이란 뜻이다)
그제사 케이트는 CIA가 자신을 왜 차출했는지 알게된다. 미국 내에서 CIA의 작전은 금지됐고, 부득이한 경우 FBI요원을 참관시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 규정을 충족하고자 케이트를 내세운 것이다. 즉, 처음부터 CIA는 법 따위는 관심 없이 카르텔 보스 제거에만 관심을 기울인 셈이다.
천국과는 너무 멀고, 미국과는 너무 가까운
CIA의 비밀공작이 캐러밴 난민과 무슨 상관일까? 중남미 주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미국으로 향한 이유는 가난과 치안불안이다. 특히 중남미 각국의 치안불안은 심각한 수준이다. 앞서 적은 엘살바도르 출신 난민 여성의 증언처럼 마약 카르텔이 사실상 치안을 접수(?)한 실정이다.
영화 <시카리오>의 무대가 됐던 멕시코의 시우다드 후아레즈에서도 매일 같이 납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경찰력이 존재하기는 하나 경찰 역시 조직원에게 살해되거나, 아니면 매수되기 일쑤다. <시카리오>에서도 알레한드로는 케이트 요원에게 "멕시코 경찰을 믿지마. 돈 받은 놈들이 한 둘이 아냐"라고 충고한다.(지난 24일 오후 KBS 시사 프로그램 <특파원 보고 - 세계는 지금>에서 시우다드 후아레즈의 치안 상황을 보도했다)
시우다드 후아레즈가 이렇게 범죄도시로 전락한 건 시대 변화 때문이다. 이전엔 해상을 통해 마약이 들어왔지만, 9.11테러 이후 미국의 해안경비가 강화되면서 육로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우다드 후아레즈는 미국 국경도시 엘 파소로 바로 통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엔 마약 카르텔이 창궐한 것이다.
그럼 왜 남미는 이렇게 치안이 불안할까? 남미는 오랜 군부독재에 시달렸다. 그리고 미국은 군부 정권을 배후 지원했다. 때론 군부를 사주해 국민투표로 들어선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기까지 했다. 1972년 칠레 군부 쿠데타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은 다른 한편으로 마약 카르텔을 관리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미국은 사회주의 사상이 농민 등 빈곤층에 침투하는 걸 우려했다. 실제 아르헨티나 출신의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는 가난한 농민들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혁명적 계급이라고 보았다.
미국은 농민이 사회주의에 의식화 되느니, 마약 카르텔 농장에서 일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에 미국은 카르텔 보스들을 관리하는 한편, 멕시코·콜롬비아 등지에서 생산된 헤로인과 코카인의 미국 시장 유입을 일정 수준 눈감아줬다.
단, 미국은 카르텔의 힘이 지나치게 커져 통제를 벗어날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제압했다. 영화 <시카리오>에서도 CIA는 미군 특수요원들을 투입해 카르텔 소탕에 나선다.
이제 남미 군부정권은 몰락했다. 1999년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당선을 시작으로 남미는 차례로 좌파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좌파 민주정권은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다. 특히 차베스 사망 이후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은 말 그대로 급전직하했다. 이 와중에 공공치안은 붕괴했고, 이 공백을 마약 카르텔이 차지한 것이다.
반면 미국은 오로지 '덩어리' 큰 보스들 단속에만 집중할 뿐 중남미 국가들의 치안불안은 관심 밖이다. 영화 <시카리오>에서도 CIA가 중간 보스를 미국으로 데려오자 시우다드 후아레즈는 일대 혼란에 빠져든다. 그러나 미군 병사들은 그 광경을 멀리서만 바라볼 뿐이다. (미국 국경도시 엘 파소는 시우다드 후아레즈를 마주보며,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미국은 중남미 캐러밴 사태에 책임이 없는가? 분명 책임 있다. 미국이 이민자가 세운 나라라는 해묵은 건국이념만은 아니다. 미국은 중남미가 '뒷마당'이라며 군사정권과 마약 카르텔을 키웠고, 주민들의 민주적 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향을 떠나 미국 국경까지 다다른 난민들은 생활고와 불안한 치안에 시달리다 못해 난민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남쪽 국경 폐쇄로 맞서는 중이다.
남미는 천국과는 너무 멀지만 미국과는 너무 가깝다. 그리고 남미의 불행은 미국과 너무 가까운 데서 비롯됐다. 이들의 불행은 시대가 바뀌어도 진행형이다.
하느님이시여, 캐러밴 난민들을 축복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