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신앙생활 (6)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철학박사)

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서를 어떻게 대할 것이며, 특히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율법은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율법, 특히 도덕적 율법들(Moral Laws)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규범(Norm)인가? 십계명과 십일조 헌금 등의 율법들은 복음의 시대에도 계속해서 유효한 것인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한다. 글의 내용은 6부로 나누어 전재된다.

VII.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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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침신대)
▲김승진 교수(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성령의 강림(행 2장)으로 율법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고 복음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교회는 신약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교회생활을 위한 신학과 신앙도 기본적으로 신약성서적이어야 합니다. 구·신약 66권의 성경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구약은 옛 약속(Old Testament)이고 신약은 새 약속(New Testament)입니다. 교회는 새 약속에 근거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는 유대교 신앙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공동체였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두루뭉술 혼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약의 통치형태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정치, 즉 "신정정치"(神政政治, Theocracy)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민족공동체 그 자체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육체적 이스라엘(Physical Israel)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Spiritual Israel)입니다. "육체적 이스라엘 민족"(Nation as Physical Israel)이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들(Physical Descendants)이라면,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Church as Spiritual Israel, 새 이스라엘 New Israel)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Spiritual Descendants)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적인 출생을 한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신약성서 시대의 초대교회들은 세속적인 국가권력과는 무관한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Spiritual Body of Christ)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나 안디옥교회 등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교회들은 그 도시의 시교(市敎)나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아니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은 순수한 신자들의 공동체(Community of Believers)였습니다.

성령시대와 교회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적 혹은 율법적 신앙생활이 아니라 신약적 혹은 복음적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교회생활에서 구약적인 행습들이 무의식적으로 적지 않게 잔존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적지 않은 교회지도자들이 교회건물(Church Building)을 "성전"(Temple)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당"이나 "예배당"이 보다 바람직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성전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터전으로서 존재했었고,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임재해 있는 신자들과 신자 각자의 몸이 성전입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또 많은 경우에 "교회"라는 용어와 "교회당"이라는 용어가 구별됨이 없이 마구 혼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약성서에는 교회당이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 혹은 교제"(Believers' Community or Fellowship)를 의미했지, 교회당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가정이나 동굴이나 카타콤(지하묘지)에서 은밀하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모임을 가졌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될 때까지(AD 313), 그들은 혹독한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에 교회당 건물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또한 교회를 "제단"(祭壇, Altar)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척 구약적입니다.

구약 레위인 제사장들이 성의(聖衣, Priestly Gown)을 입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신부들이나 어떤 개신교회들의 목사들이 예배 시에 성의를 즐겨 입는 것을 보는데, 자칫 성도들에게 신부나 목사만 "제사장"이라는 선입관이나 인식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성가대원들이 착용하는 가운은 조화와 화합의 의미를 함유하기 때문에 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믿은 모든 신자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5, 9, 계 1:6, 5:10, 20:6)이지 않습니까? 목회자들은 물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차별 없이 "제사장들"(Priests)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물들"(Sacrifices)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만 성도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옷차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벧전 2:5, 9)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또 한국교회에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성직자나 담임목사에게 지나치게 의존케 하는 신앙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보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단독자로 그리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인격자로 설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신약성서는 "대리종교"(代理宗敎 Proxy Religion)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individually), 평등하게(equally), 직접(directly)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국교체제의 교회를 거부하는 자유교회 전통 속에 있는 교회들(메노나이트교회, 침례교회, 성서침례교회, 그리스도의교회, 크리스천교회, 제자교회 등)에서는 "유아세례"(Infant Baptism, Pedo-baptism)를 행하지 않습니다. 신자, 즉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만 뱁티즘을 베풉니다. 이를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 Credo-baptism)이라고 부릅니다. 유아세례(희랍정교회를 비롯한 정교회에서는 유아침례를 행한다고 합니다)는 대표적인 대리종교의 한 예입니다.

부모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부모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이 유아세례입니다. 뱁티즘 의식 자체에 죄사함과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든지(성례전주의, Sacramentalism), 구약의 할례가 신약에서는 유아세례가 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나 설명은 신약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교회는 예수님을 믿어서 영적인 출생을 한 자들(중생한 자들, 거듭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할례가 육체적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면, 영적 이스라엘(교회)로 들어가는 관문은 유아세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거듭남, 즉 중생, 다르게 표현하면 영적인 출생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는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죄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는지 전혀 모릅니다. 신앙고백을 할 수도 없습니다.

목사의 자녀로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체험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자녀는 여전히 구원받아야 할 죄인(불신자)인 것입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 뱁티즘이 베풀어졌다는 기록이나 베풀어야 한다는 명령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유아세례는 국교체제의 전통 속에 있던 기독교회들(로마가톨릭교회, 정교회, 루터교회, 장로교회를 비롯한 개혁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등)에서 교회와 국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모는 국가의 행정관청에 "호적신고"(출생신고)를 함과 동시에, 행정기구에 따라 편성된 교구교회(Parish Church)에서 유아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교적신고"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았고 거듭 났고 영적인 출생을 했음을 고백하는 의식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뱁티즘입니다. 침례교회에서는 내용 면에서는 신자의 뱁티즘을, 형식 면에서는 침례(침수례, Immersion Baptism, 개역개정판 침례교인용 성경에는 '침례'로 번역·표기되어 있음-필자 주)를 행합니다. 구약의 할례가 신약에서 유아세례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율법적이고 구약적입니다. 유대인 부모로부터의 "육체적 출생"에 근거하여 할례를 받는 것이나 그리스도인 부모로부터의 "육체적 출생"에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받는 것은 무척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의하면 뱁티즘은 "영적 출생"(Spiritual Birth)에 근거하여 신자에게 베푸는 의식입니다. 성서적인 뱁티즘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성서적인 뱁티즘은 내면적인, 비가시적인, 영적인 체험을 외면적으로, 가시적으로,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Biblical Baptism is an outer, visible, physical expression of an inner, invisible, spiritual experience). "내면적인, 비가시적인, 영적인 체험"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뱁티즘은 전혀 의미 없는 것입니다.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없지 않습니까? 할례는 아들로 태어난 갓난아기에게 난 지 8일만에 베푸는 의식이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유아세례도 아들(남자 아기나 아이)에게만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뱁티즘 자체는 죄를 사해 주거나 구원을 받게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유아세례는 율법과 복음을 뒤섞는 것이 아닐까요?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가 된 자에게-필자 주)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골 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영적인 할례,' Spiritual Circumcision-필자 주)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the circumcision done by Christ, 예수님을 믿음으로 옛 사람의 속성이 베임을 당한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필자 주)니라.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적인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을 법제화한 것입니다. 최저수준을 요구하는 법이 율법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최저수준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새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입니다. 복음적인 신앙생활은 사랑의 삶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것에 만족하거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삶도 율법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은 신자는,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수입의 십분의 일 이상을 드렸다고 하더라도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 39)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는 동기로 헌금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헌신의 동기여야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매일 매순간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사는 삶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성령충만한 삶이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의 주인이 된 삶입니다. 필자를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갚을 길 없는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리며, 성령충만한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해 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지금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요 복음의 시대입니다. (끝)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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