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간소개] 조울증의 철학적 통찰과 기호학적 상상력

로버트 코링턴, 『바람의 말을 타고: 조울증의 철학 - 조울증과 전일성의 추구』 (Riding the Windhorse: Manic-Depressive Disorder and the Quest for Wholeness), 박일준 역 (서울: 동연, 2018).

조울증의 철학
(Photo : ⓒ Rowman & Littlefield )
▲본서는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철학적 통찰과 기호학적 상상력을 제시한다.

글/ 박일준

우리의 뇌신경을 24시간 가상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노동하는 인지 자본주의의 시대에 우울증은 그 어떤 변이 유전자들과 일탈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우울증, 조울증, 조현증 등과 같은 정신적 질병들이 기호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보편적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때 우리들의 정신적 질병에 대한 이해는 미셸 푸코 이래로 지식-권력이 광인들을 통제하면서 획득한 체계 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그들은 정상인에게 위험한 비정상인들이고, 그들은 언제든지 사고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강서구 PC방 사건의 가해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속에 푸코 시대의 유산은 그대로 남아있는 셈이다. 그래서 본서의 출판은 의미가 깊다. 잠시 역자 서문의 말을 인용하자면,

본서는 단순히 조울증과 그의 진단 그리고 약물치료와 상담에 관한 체험적 수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조울증과 같은 정신적 질병은 약물치료와 정신분석가 혹은 상담가의 상담을 병행하면서 치유해 왔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세계에서 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의 병행만으로는 병의 치유나 경과가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일단 특별히 과도한 증상을 약물로 억제하고, 상담치료가 진행이 되어가도, 환자들이 인생의 의미를 재발견하여 활기 있게 삶을 전개할 원동력을 얻어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본서는 그래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철학적 통찰과 기호학적 상상력을 제시한다. 사실 증상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정상이라고 분류되는 이들도 그들 내면의 기분동요와 상처 그리고 트라우마와 좌절을 안고 살아간다. 정도를 넘지 않아서 그렇지, 모두가 다 어느 정도 정신질환 증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망가져버리고 무너져 내린 내 모습을 반성해 보면서, 우리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일까, 그런 것이 도대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삶의 시간들을 회의하며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본서는 바로 그런 물음에 대한 조울증 환자이자 철학자인 코링턴 교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에서 저자가 언급하듯, "조울증 장애의 파고들을 넘어 바람의 말을 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전일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조울증 장애가 야기하는 여러 난관들을 넘어가는 일은 바로 '바람의 말'을 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바람의 말은 기쁨과 희열의 에너지를 의미하는데, 바람의 말을 탄다는 것은 곧 그 기쁨과 희열의 에너지를 제어한다는 말이다. 바람은 불어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자아를 탈중심화시켜 버리기 십상이다. 그 바람에 휩쓸려 광휘와 희열을 맛보지만, 이내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급격한 추락의 느낌이 깊고 공허하고 무의미한 우울증을 야기한다. 이 바람의 말을 제어하는 일은 단지 약물치료와 상담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곧 삶의 의미의 온전성, 즉 존재의 깊은 슬픔을 극복하고 의미를 회복하는 일이다.

이는 곧 철학적 해석의 문제라고 코링턴은 명시한다(25).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의 신경을 거의 24시간 쉴 틈 없이 가상세계의 웹에 접속하여, 클릭하고 자판을 두드리면서, 무수한 기호들을 접하고 만들어내면서 소위 빅 데이터의 창출에 기여한다. 전에는 우리의 노동이란 생각을 배제하는 일이었다. 조립라인에 서서 나사를 조이면서, 다른 생각이 많으면,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생각은 곧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어떤 것을 의미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노동은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감성을, 우리의 느낌을 요구한다. 그것은 곧 우리의 욕망을 추동하며, 이 욕망의 힘을 창조성으로, 유연성으로, 적응성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어떤 조건에서도 뇌 신경세포의 가소성(plasticity)을 활용하여, 창조적 아이디어들과 생각들을 가지고 새로운 기호들을 창출해 내고, 이를 통해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상세계를 유통하는 그 무수한 기호들의 교류는 결국 우리의 신경에 과부하를 일으킨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우리는 네트워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보다 더 자극적으로 쾌(pleasure)를 유발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극들을 찾는다. 오늘날 포르노그라피의 소비가 이토록 엄청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차원 평면의 스크린 위에서 우리의 신경은 2차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즉자적인 쾌의 감각을 충족시킨다. 그리고는 이윽고 우울증이 찾아온다.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마치 도파민이 분출되도록 신경세포를 자극하는 단추를 누르느라, 먹이가 나오는 단추를 누르는 것을 체념하고, 쾌의 느낌이 가져다주는 흥분에 탐닉하다, 결국 아사하고 마는 쥐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정확히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 무수한 기호들의 연쇄 속에서 과부하가 걸린 우리의 신경세포는 자본을 창출할 때의 쾌감과 이윽고 찾아오는 과로로 인한 우울증을 반복하다 결국 존재의 절망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기호를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를 포기하고, 가상의 기호들 속에서 가상의 쾌락을 추구하며, 가상의 자본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우울증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결국 우리는 실재에 이르지 못한다. 기호는 언제나 자신을 넘어선 그 무엇을 가리킨다. 이 기호들의 연쇄의 총체성은 결국 무엇을 가리키기 위함인가? 탈자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기호들은 기호 너머 실재인 자연을 가리킨다. 자연(自然)은 우리의 한자어의 의미를 그대로 따라가자면 'self-so-ing'이다. 즉 자연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유한한 기호 자아를 넘어서는 그 어떤 자아이지만, 이것은 각 개별 자아들의 총합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기표로서의 기호들이 가리킬 수 있는 지평, 즉 소산적 자연, 혹은 '자연화된 자연(nature natured)을 넘어서, 우리의 언어로 표기되지 않는 자연, 즉 능산적 자연, 즉 '자연화하는 자연'(nature naturing)을 가리킨다. 스피노자의 명민함은 바로 자연화된 자연이 기표들을 생산하는 원천이 아니라, 이 기표 너머의 언어와 기표로 직접적으로 표기되지 않는 자연화하는 자연이 기호 발생의 원천임을 명시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언제나 자연이다.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 있는 그 무엇이기에 이 자연은 우리에게 때로 '무'(無 nothingness)로 다가온다. 우리의 기표들의 연쇄를 통한 의미화를 무화시키는 전적인 무의 몸짓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해석은 언제나 기호체계들의 지시체계를 무화시키고, 새로운 기호들의 경계를 구축하여 새롭게 새로운 각도로 사태와 사건들을 조망하려는 노력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 오는 말은 결코 우리의 유한한 언어나 기호 체계 안에 폐쇄되어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탈자적 자연주의의 철학적 관점에서 조증과 우울증은 바로 우리가 지금 현재 담지한 기호체계가 자연의 실재를 의미로 정복했다는 희열과 그 잠깐의 희열은 결국 나의 빈약한 자아가 창출한 망상적 투사였다는 좌절감의 반복일 수 있다. 즉 조울증은 자연의 실재로부터 도래하는 기호를 오독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의 실재로부터 도래하는 의미의 기호들을 올바르게 해독하기만 하면 조울증은 치유되는 것인가? 어쩌면 인간 삶의 진실, 혹은 삶의 진리는 바로 이 오독(misreading)에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사랑은 생리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두뇌 신경세포의 호르몬인 도파민이 분출되면서, 느껴지는 쾌(pleasure)감을 통해 작동한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것은 뇌의 배선된 구조를 따라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한다'는 느낌과 의미는 전적으로 기호를 오독한 것이다. 그것은 그저 뇌의 신경세포 차원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변화를 '사랑이라는 의미'로 우리가 잘못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늘 헛발질인지도 모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자연의 자아가 담지한 본성, 즉 '탈자'(ec-stasy)의 운동을 모방한다. '엑스타시' 즉 '탈자'는 고대 그리스어의 어원적 의미에서 '자신의 자아 바깥에 존재한다 혹은 존립한다'(to be outside of oneself)를 의미한다. 사랑이란 자신의 자아 시스템 내에서 창출되는 호르몬 분비 체계 내의 내적 작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 시스템 바깥으로 나아가, 자신의 시스템으로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타자를 만나고, 포용하고, 그리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쟈크 라캉은 '성관계는 없다'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성이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소통이지만, 우리의 성(sexuality)은 언제나 관계에 이르지 못하고, 나만의 성적 환상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맴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자적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자연의 실재는 우리가 자아의 기존 시스템을 넘어 전적 타자인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전일성(wholeness)의 감각이다. 조증은 우리에게 그런 상태를 가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중독적이다. 하지만 그 가상의 체험은 타자의 실재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 전일성의 가상적 체험 후에 엄습해 오는 우울증에 쉽게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조증과 우울증의 순환반복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닐 수도 있음을 코링턴은 지적한다. 왜 많은 천재들은 조울증을 겪었을까? 조증 상태에서 그들은 남들보다 훨씬 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작업들을 수행했다. 왜? 그 작업이 의미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업적 대부분은 당대의 눈으로 보자면 그리 의미 있는 작업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에너지를 거기다 쏟아 붓느니, 차라리 취업준비에, 공무원 시험 준비에, 인간관계 형성에, 혹은 자기계발에 쏟아 붓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극진한 진리의 실재에 이른다는 일종의 과대망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작업의 성취는 그들에게 진리의 최종적인 실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다시 역자 서문을 인용한다.

'천재'(genius)는 비범하고 명민하며 영특한 정신적 능력을 지닌 이로 추앙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일반에게 상상된다. 생물학적으로 매 세대마다 변이를 만들어내는 자연선택의 기제는 우리가 정상으로 간주하는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를 끊임없이 창출해 낸다. 그러한 부류 중 생물학적으로 실험적인 존재가 바로 '천재 현상'의 범주에 드는 개체들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인간 종 전체로 보자면 이들의 특출한 능력을 통해 문화와 문명은 진일보해 나간다. 이들의 고난과 좌절과 상처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개별적으로 보자면, 천재의 삶은 많은 경우 비극일 수 있다. 이 삶이 의미 있고 보람차게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이 개체가 속한 전체 집단을 함께 고려하는 경우이다. 최근 진화생물학은 집단 선택(group selection)이 개체 선택에 위반되는 부적합한 기제가 아니라, 개체 선택과 유전자 선택과 더불어 자연선택의 핵심적 기능임을 밝히고 있다. 이 다차원적 선택의 기제를 통해 유기체 생물 종은 '이타주의적 행동들'의 진화를 이루어나간다. 이타주의적 행동이란 개체 자신에게는 손해가 되거나 비극이지만, 집단 전체 혹은 종 전체에게는 유익이 되는 행동들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집단은 이타주의적 행동들을 물려나가거나 학습해 나가도록 하는 생물학적 기제들을 갖고 있다. 이타주의의 진화를 다차원 선택의 관점에서 해석해 나아가는 최근의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천재 현상과 조울증이라는 고난은 상관관계가 있으며, 인간 종 전체적으로 의미연관성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보기에 유익하거나 뛰어난 변이들, 즉 천재들뿐만이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있는 개인들을 이타주의의 진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다. 즉 정상이라고 구별되는 범위 바깥의 비정상적 혹은 일탈적 개인들은 모두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인류 종 전체의 발전을 위해 자연선택이 작동한 결과이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 눈에 보기에 인류에게 이롭든 이롭지 않든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희생과 고통을 종 전체의 관점에서 보살펴주고 공감하며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들의 고통은 결국 우리들의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 자연선택의 불가피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특별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적들을 베풀지 않았던가.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회적으로 약자 혹은 장애우로 분류되는 이들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과 정신건강, 신학과 정신건강 혹은 종교철학과 정신건강에 대한 거창한 상상력이 발동한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성찰해 볼 때인 것 같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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