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길] Day 6. 해야 할 숙제를 잊더라도

글·이재훈 목사(쓰임교회 담임)

에스테야(Estella)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5시간 (2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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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산티아고의 상징은 가리비다. 그 모양에서도 드러나듯이 가리비의 의미는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이다. 앞서 가는 친구가 뒤에 오는 친구 ‘ANNA’를 위해 메모와 함께 선크림을 두고 갔다. 헤어져도 만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산티아고이다. 하루의 순례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오늘 모자를 잃어버렸다며 슬퍼하고 계신다. "어?"하며 오늘 길 위에서 주운 모자 하나를 보였더니 "자신의 모자가 맞다"며 서로 세상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모든 길은 하나로 통했다.

처음 오는 곳인데? 에스테야를 벗어나자마자 낯설지 않은 장소가 나타났다.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와인과 생수를 나눠주는 수도꼭지가 등장했다.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곳도 까미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기념적인 장소 중 하나이다.

첫 순례이기에 길목마다 무엇이 나타날지 다 알 순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다 알 필요도 없는 법이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 산티아고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순례자들에게 와인과 생수를 제공하는 수도꼭지와 마주쳤다. 이름 하여 '이라체(Irache) 와인 양조장.' 양조장은 수도원 내에 있는데, 중세 수도원 내부에 있던 순례자 병원에서 빵과 와인을 무료로 나눠주던 풍습을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라고 한다.

물론 와인과 생수는 공짜다. 하지만 와인은 하루에 100L만 제공된다고 하니 욕심내선 안 될 일이다. 일찍 출발한 순례자들이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 도착한다면 맛난 스페인 와인을 목젖까지 채워 넣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러기엔 어제부터 이어진 컨디션이 영 별로다. 그래도 그냥 발걸음을 돌리자니 후회할 것 같아 죄 없는 수도꼭지만 이리저리 돌려본다. 눈으로 와인을 목젖까지 채우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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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여기가 ‘이라체(Irache) 와인 양조장’이다. 뭔가 중세적인 느낌이 나지 않는가? 이곳에서 와인과 생수로 목을 듬뿍 적시길 추천한다. 단, 와인은 하루에 100L만 제공되는 건 잊지 마시고.

여전히 낯선 이국의 정취와 새로운 시도에 놀란 몸 때문에 한국부터 짊어져 온 질문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순례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다되어가지만 아직까지 까미노가 건네는 삶의 교훈은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래도 희미하게 건진 생각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생각'과 '행동'의 연관성이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오랜 숙고 끝에 채로 거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다. 일단 오래 생각한다는 게 쉽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성급함은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기에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친 행동은 정말 가치 있는 시도이다. 시간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기에 말이다.

헌데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생각과 행동의 간극을 좁혀 원하는 바를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도 때론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물론 맥락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봄직 하지 않은가? 만일 예열하는 시간을 단축시켜 하고자 하는 바 혹은 되고자 하는 나를 위한 어떤 시도를 한다면, 평소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의 절반 정도는 줄어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몸'의 훈련이 필요하다. 몸이 변해야 가능한 일이다. 생각은 우리의 몸을 계속해서 속여 왔다. 우리는 자주 '공부해야지', '운동해야지', '청소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는 참 우스운 상황을 겪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정말 스웩(swag) 넘치는 인간상은 옳다 여기는 바를 예열 없이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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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대한민국 산에 가면 다양한 돌탑을 만날 수 있지만, 순례자의 길 곳곳에는 돌탑 대신 이런 인사말의 돌 뭉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순례의 축복語, “Buen camino!”

이야기가 좀 무거워졌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걷거나 휴식을 취할 때, 길 위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는 순간에도 순례의 목적을 떠올리는 것이 내 한 몸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말이다.

그래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례의 의미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의식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 이것이 공부의 참된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바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습'과 '훈련'이다. 실패해도 계속해 보는 것, 반복을 쌓아 이전의 묵은 때를 벗겨내는 작업이 필요하겠다.

페터 제발트의 책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에서는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좀 심오한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책에서는 아빌라의 수녀 데레사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무언가 분명한 것을 원하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비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신비주의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면 신비주의적 토대 없이 위대한 꽃을 피울 수 있는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비주의를 배제한 행동은 무모한 행동주의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문학의숲, p.263)

사유하며 행동하고 행동하며 사유하는 것! 사유와 행동의 조화, 이것이 인간미를 잃지 않는 가장 좋은 지름길 아닐까?

까미노를 걸으며 찾고자 하는 삶의 지혜가 순례자들이 내딛는 크고 작은 발걸음 속에서 자연스레 발견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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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산티아고의 매력 중 하나는 이런 소도시 하나하나를 훑고 지나가는 것 아닐까? 안내책자에도 나오지 않은, 참 현지인들의 소소한 일상이 묻어나는 곳을 걷는다는 건 또 하나의 축복이다.

#. 순례 Tip: 에스테야를 막 벗어나면 '이라체(Irache) 와인 양조장'을 만날 수 있다. 미리 빈 페트병이나 텀블러를 준비해도 좋다. 목만 축일 거면 한잔의 컵만 있으면 충분함. 잠시 언급했지만, 이 양조장은 수도원 내부에 있으며 중세 순례자 병원에서 빵과 와인을 무료로 나눠주던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사람들이 와인을 신석기부터 마시기 시작했다고 하니 와인의 역사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와인은 영어로 'wine'이지만 스페인에서는 'vino'라고 부른다. 와인은 '신의 물방울'이라 불릴 정도로 건강에 좋다고 알려졌고 실제로 와인에는 무기질, 비타민 등의 영양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수도꼭지 옆 붉은 간판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순례자여, 힘과 생명력을 가지고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다면 이 포도주 한 모금을 마시고 가라!" 자, 모두 이라체 와인 양조장에서 충분히 목을 적신 후 콤포스텔라에서 만나자.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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