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라 불리는 리오넬 메시가 다섯 번째 유러피안 골든슈를 차지했다. 유럽 5대 축구리그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에게 본 상을 시상하는데(각 리그마다 수준차이를 고려하여 골에 가산점을 부여한다) 2018년 메시가 수상함으로써 라이벌 호날두를 제치고(4회 동률이었음) 역대 최다수상자로 우뚝 섰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질리도록 들은 그 문제, 메시와 호날두 중 누가 더 뛰어난가? 재미삼아 이야기하자면 필자는 메시의 압승을 주장한다. "메시와 호날두는 한마디로 비교가 안 된다. 메시는 그냥 메시다! 고유명사다. 호날두는 골을 무척 잘 넣는 선수 중 하나다!"
우리야 서로 싸우지 않지만 네티즌 사이에서는 실제로 싸움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메시와 호날두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팬들은 원수가 되기도 한다. 뒷짐지고 그 광경을 보자면 참 우스운데 사실 그 속에 우리네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우리가 지지고 볶고 하는 일들의 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메시와 호날두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정말 우리의 삶과는 아주 간접적인 의미만을 갖는다. 메시가 골을 넣으면 기분이 좋다든지, 그래서 마치 내가 메시가 된 것 마냥 하루를 승자가 되어 살아간다든지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간접적인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분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다. 그러한 감정을 통해 일상을 매우 잘 보내기도 하고 때론 온통 하루를 망치기도 한다. 축구 스타에 대한 우상화는 우리 삶에 이렇게 간접적이지만 매우 강렬하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박사모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우상화는 여전히 강렬하지만 더 이상 간접적이지만은 않은 형태를 띤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깊게 하지 않겠다.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박사모의 입장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겠다. 필자가 지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박사모의 박근혜 우상화는 더 이상 메시와 호날두에 대한 네티즌들의 싸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접적인 삶의 영역에 침투하는 정치적 의미를 띠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두 우상화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 대상에 나를 동일시한다. 그리고 나의 감정을 그 우상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는 상태로 열어놓고, 이 우상화를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 우상에 대한 감정들은 쉽게 전이된다. 우상 하나가 설정되면 그 대상을 향한 동일한 감정에 전이된 공동체가 형성된다. 축구 스타에 대한 팬심이나 정치인에 대한 팬심이나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팬들은 자신들의 우상에 팬심이 일차적으로 감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팬심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 축구선수는 진짜 축구를 잘한다며, 그 정치인은 진짜 정치를 잘한다며 나름의 평론들, 스탯들, 기사들을 동원하며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우상에 대한 팬덤 현상은 결코 이성적임을 그 본질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하게 감정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상화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더욱 더 깊게 우리 삶에 침투한다. 최근 명성교회에 대한 MBC PD수첩의 취재 결과는 그 교회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김삼환 목사에 대한 우상화를 잘 보여주었다. 교회 곳곳에 설치된 김삼환 목사의 실물 크기 사진들과 그를 우상으로 만드는 많은 자료들, 그러한 장치들을 김삼환 스스로 배치했는지 아니면 팬심으로 똘똘 뭉친 성도들이 직접 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성교회가 작동한 방식이 김삼환에 대한 우상화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도들을 하나의 팬으로 기능하게 했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더해 명성교회는 종교가 가진 힘, 즉 신명(신의 명령)을 김삼환 목사의 설교에 분유(플라톤의 용어로써 형상들이 모상들에 진입하는 것을 일컽는다)시키는 작업에도 성공했다. 이로써 단지 축구의 신, 여신이었던 즉 다수의 신들 중 하나로써 숭배되었던 아이돌들은 기독교의 우상화에 이르러서는 유일신의 명령을 대변하는 유일한 아이돌의 모습까지 띠게 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명성교회가 얄미울 정도로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성도들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자신들이 김삼환 목사를 지지한다고 믿고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팬심의 본질은 그저 감정적이다. 그것이 팬덤 현상의 본질이고, 김삼환 목사는 그것을 기가 막히게 잘 사용한 것이다.
십대 아이돌이나 축구 선수들의 우상화와는 다르게 정치적, 종교적 우상들이 사기꾼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팬들로부터 부당한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돌이나 스포츠 스타들도 정치적으로 팬들을 선동할 수 있지만, 그들의 선동은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의 선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박사모에서의 박근혜, 명성교회에서의 김삼환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팬들의 삶에 침투할 수 있다. 그들의 감정을 부추겨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치인이고 종교인이기에 그들에 대한 우상화는 이제 단순히 취미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우상화는 우리 개인들의 삶을 너머 국가와 종교 자체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물론 박사모나 김삼환에 대한 우상화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국가, 종교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필자는 우상숭배를 자체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메시를 좋아하는 필자의 마음도, 박근혜를 사모하는 박사모의 마음도, 김삼환을 사랑하는 명성교회 성도들도, 각자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필자는 우상들에 대한 감정에 충실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의 감정을 전이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그래서 팬덤을, 정치집단을, 종교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는 이렇게 묻고 싶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왜 나쁜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우리 감정적인 동물인 인간 본연의 습성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 내기 위해 그러한 우상숭배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정치를 바꾸려면, 종교를 바꾸려면, 우리는 박근혜와는 다른 우상을, 김삼환과는 다른 우상을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 우상에 대한 뜨거운 감정을 공유하는 그러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필자는 박사모를 비판하고 싶다. 명성교회를 비판하고 싶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다. 우리는 훨씬 더 감정적이다. 박사모와 명성교회를 이성적으로 비판하는데 힘을 쏟기보다는 박근혜나 김삼환보다 더욱 매력적인 우상을 만들고 싶다. 찾아내고 싶다. 아니 되고 싶다. 그래서 박사모와 명성교회가 얼마나 매력 없는 집단인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 소탐대실하는 그런 우상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아이돌에 열광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느라 온 노력을 다하는 그러한 우상 집단이 아니라 언제든 죽으면 죽으리라 하루를 살아가는 우상 집단을, 전사 집단을 만들어 가고 싶다.
자본가는 돈을 벌기 위해 스타를 만들어 낸다.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영웅을 만들어 낸다. 정치인도 종교인도 모두 자본가를 모방한다. 그런데 왜 운동권은 세상을 그렇게도 변화시키려 노력하면서 스타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코 돈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결국 돈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의 욕심도 더욱 커질 것이다. 돈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돈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우리가 돈을 가질지라도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나의 삶을 더욱 안락하게 하기 위해 그 돈을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 애증의 돈이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매일 울면서 경험하기도 한다.
계속 이렇게 우상 숭배에 대하여 비판만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도 우상을, 신화를, 새로운 예수를 만들어 낼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신명, 십계명에 위반되는 것이라며 그 어떠한 아이돌도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도 황금 송아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다중을 형성해낼 것인가? 김삼환을 비판만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나름대로의 다른 우상을 만들 것인가? 돈은 모든 것을 삼킬 것이라며 무조건 피하고 볼 것인가? 아니면 일단 그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신화를 써볼 것인가?
정답은 없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제 우리도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그동안의 생각을 답습하기보다는 다른 생각들로 나를 풀어놓는 것, 그렇게 그 누구보다도 더 자유로운 우상을 우리가 얻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우상이 우리에게 자유로움의 감정을 전염시켰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자본이 모인다. 이것은 필연이다. [장효진의 횡설수설]은 그러한 우상을 찾아내고 싶다. 그러한 우상이 되고 싶다. 그러한 공동체가 되고 싶다. 2000년 전 예수도, 예수의 공동체도 결국 그러한 우상 공동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예수는 부패한 로마 정치 공동체와 유대 종교 공동체에 맞선 새로운 정치, 종교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우상 만들기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우상 넘어 어디엔가 진상이 있을 것이라는 그 헛된 희망을 버려야만 한다. 예수가 바로 그 진상이라면 우린 모두 다 헛된 우상이 된다. 하지만 예수 자신도 우상이라면 우리 모두는 진실 된 우상들이 된다. 우상이 되자. 예수가 되자. 그러한 우상 공동체, 예수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 함께 하자! 그러면 자신들을 진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리를 죽이려 할 텐데, 쫄지 말자! 우린 더욱 매력적인 우상이 될 수 있고, 더 큰 힘이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실패해봐야 예수같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면 신이 우리를 다시 살릴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사흘 내에 이루어 질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 전능하신 신이 그러한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우리와 같이 그토록 유용한 우상들을 그냥 두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으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글들을 베리타스의 지면을 빌어 자유롭게 써볼 것이다. 말 그대로 [장효진의 횡설수설]을 해볼 것이다. 자유롭고, 그래서 그토록 건전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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