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미스타(Frómista)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ón de los Condes): 5시간 (20.9Km)
일행 중 가장 늦은 출발을 한다. 며칠 전부터 생긴 마음의 질병이 이 몸뚱이를 계속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마음의 독감이 우울이라면, 시기와 질투는 마음에 쌓인 피로일까 아니면 어떤 결핍일까? 적당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묵직한 마음의 피로감이 오늘 출발에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어깨도 여전히 말썽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며 나름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주인이 돌봐주지 않자 많이 서운한 모양이다. 사지(四肢) 사이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통증을 통해 알려준다. 끈이 문제인가 해서 배낭의 끈을 이리저리 조절해봐도 나아지질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황정은 작가의 책 제목처럼 그저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되뇌는 수밖에.
오늘 계획한 거리의 중간 어디쯤 걷고 있을 때였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뒤에 어떤 순례자도, 어떤 표지판도 보이지 않는다. 순례 중엔 가끔 길의 생김새에 따라 길을 잃은 것 같은 순간이 발생하곤 한다. 하지만 잠시 표지판이 없는 구간이었을 뿐, 대체로 좀 더 걷다 보면 표지판이 등장한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다. 불안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꺼내 구글 지도(google map)를 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그때, 전에 읽었던 책 속의 글귀 하나가 생각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던 수필집이었는데, 그 책은 길을 잃는 것도 길을 발견할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밤삼킨별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 김효정은 그녀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긴 하지만, 길을 잃는 것 또한 길을 찾는 방법이라는 걸 우리는 잊고 사는 듯하다. 휴대폰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지만, 모두가 모를 때 나만이 아는 그 길은 오직 경험으로 찾게 되는 것 아닐지.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리고 길을 찾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는 시간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김효정, 『미래에서 기다릴게』, p.223)
많은 사람이 걸었던 길로 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은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갔던 그 길로 똑같이 걷기에도 쉽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다. 세상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보다 어려운 일은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일임을 말이다. 혹자(或者) 중 '해 아래 새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정말 세상엔 사람이 걷지 않은 길이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길은 걸은 사람이 너무 적고 또 오래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런 길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성서>가 말하는 이 '좁은 길'로 걷는 사람과 <월든>의 저자 소로우가 말하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많은 사람이 홀린 듯 가는 그 '넓은 길'은 동맥경화 상태이거나 신기루일 수 있다. 우리는 사람과 일 그리고 자연을 골고루 사랑한 선조들의 정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린 건 아닐까?
어쨌든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일은 두렵고 어렵다.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길은 낸 사람만이 누리게 될 참된 기쁨을 말이다. 물론 나는 이 정도(!)의 각오까진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길을 더 걸어보련다. 길을 잃는 것도 좋은 경험일 듯싶어 휴대폰의 지도 어플을 보지 않고 좀 더 걸어본다.
다행히 불안함 속에 선택한 길이 맞았고 표지판이 가득한 마을에 도착했다. 참된 순례는 길을 잃은 곳에서 다시 길을 발견하는 것일 텐데, 매번 이렇게 길을 잘 찾는 것도 그리 좋은 순례는 아닌 듯하다. 마을 어귀 한 Bar에서 '카페 콘 레체' 한잔과 '크루아상' 하나를 시켜 허기를 달랜다. 기다리다 보니 지나쳐 왔던 나의 벗들이 하나둘씩 등장한다. 잠깐 떨어졌다 만났을 뿐인데 왜 이렇게 반가운 건지 모르겠다.
우리는 안다. 불확실한 그 길을 걸었고 또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이해와 공감의 눈빛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