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스튜디오의 신작 <캡틴 마블>의 흥행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이 영화는 개봉 11일째인 16일 오후 2시 기준 누적관객수 400만을 돌파했다. 또 2주 연속 박스오피스 예매율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캡틴 마블>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여성 슈퍼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타이틀 롤 '캡틴 마블' 역을 맡은 배우 브리 라슨도 개봉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캡틴 마블은 위대한 페미니스트 영화이다. 젊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었다. 라슨의 말처럼, <캡틴 마블>에선 젊은 여성의 심장을 뛰게 할 장면들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이러자 반작용이 일었다. 포털 검색 사이트 평점을 낮게주는, 이른바 '평점 테러'가 횡행했고 일부 남성 성비가 높은 커뮤니티나 소셜 미디어 상에선 영화를 보이콧하겠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해 볼 때, <캡틴 마블>의 질주는 페미 논란이 흥행에 별반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정한 페미니즘 영화인지는 한 번 따져 볼 필요는 있다는 판단이다. 영화는 미 공군 조종사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가 뛰어난 능력을 가진 크리족 여전사 비어스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그린다. 비어스는 자신이 원래 캐럴이었던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비어스가 지구에 불시착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한다.
브리 라슨의 액션연기는 실로 놀랍다. 그는 첫 장면부터 엄청난 힘을 뿜어낸다. 비주얼도 현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드라마는 빈약하기 그지 없다. 비어스가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많이 생략됐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이 대목에서는 마블의 또 다른 슈퍼 히어로 시리즈인 <캡틴 아메리카>가 훌륭한 참고 사례일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슈퍼 히어로가 되기 전앤 뉴욕 브루클린 뒷골목에서 건달에게 얻어터지던 약골이었다. 동네 친구 버키 반스(세바스찬 스탠)만이 병약한 그의 곁을 지켜준다.
그러나 유대인 과학자 아브라함 에스카인 박사는 스티브를 눈여겨 보고, '슈퍼 솔져 프로젝트' 최종 후보자로 그를 낙점한다. 이후 스티브는 버키와 한 팀을 이뤄 혁혁한 공을 세운다. 둘은 40년 넘게 헤어졌다가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편에서 재회하고, 이후 '어벤져스'로 다시 한 팀을 이룬다.
<캡틴 마블>의 경우 캐롤이 유리천장과 같았던 전투기 조종사에 도전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또 동료이자 절친인 마리아 램보(라샤나 린치)와 협력해 악당 욘 로그(주드 로)와 맞선다.
그러나 캐롤이 유리천장을 깨는 과정이나 램보와의 '케미'는 겉핥기식으로 지나간다. 무엇보다 캐롤이 금기에 맞서 전투기 조종사로 인정받기까지의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그렸다면 페미니즘 영화로 더할 나위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평화'
또 하나, <캡틴 마블>은 오는 4월 개봉 예정인 <어벤져스 : 엔드 게임>에서 맹활약을 예고한다.(이는 영화가 끝난 뒤 나오는 쿠키 영상에서 살짝 드러난다) '캡틴 마블'이 지닌 능력은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 맨, 토르 등 기존 슈퍼 히어로 보다 월등해 보인다. 마블 스튜디오 산하 창작 개발부문 스티븐 웨커 부사장도 "캡틴 마블은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영웅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여성 영웅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어벤져스' 세계관의 기저엔 미국을 중심에 둔 힘의 논리가 강하게 흐른다. <캡틴 마블>이 여성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이 같은 세계관은 그대로다. 캐롤이 미 공군 조종사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미국은 전쟁을 벌일 때면 지상군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엄청난 공습을 퍼붓곤 한다. 작전 수행과정에서 해·공군 조종사의 활약은 성패를 좌우할 정도다. 말하자면 캐롤은 공군 조종사로서 미국의 전쟁 논리 최일선에 선 셈이다.
페미니즘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평화주의'다. 남성이 중심이 된 힘의 논리에 맞서 공존과 평화를 외치는 게 페미니즘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캡틴 마블>은 힘을 행사하는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데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영화의 한계를 실감한다.
그럼에도 <캡틴 마블>은 남성 우위의 지배논리를 거침없이 무너뜨리는, 훌륭한 페미니즘 영화임엔 틀림없다. 비록 ‘위대하다'는 브리 라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