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내다보면서도 주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눅13:33)하시며, 뚜벅뚜벅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그 깊은 사랑과 자유를 우리도 배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멘.
"며칠째 계속되는 하강. 그러나 생은 쌍곡선 운동이다. 어딘가에서 하강할 때 또 어딘가에서는 상승한다. 변곡점이 곧 다가오리라. 거기서 나는 새의 날개가 되어 기쁨의 바람을 타고 떠오를 것이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인 <아침의 피아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암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아 함께 지내며 성찰한 삶의 편린이 눈부시다. 하강의 순간 상승의 변곡점을 기다리고, 기쁨의 바람을 타고 떠오르는 장면을 그려보는 것, 생은 이처럼 처연하게 아름답다. 누구나 살기를 원한다. 삶이 버거워 자기를 무화시키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삶에 대한 열망이 감춰져 있다.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말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이 말이 철학적 담론이 되는 것은 그 말 속에 내포된 뜻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할 때 비로소 자기 삶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하게 된다. 생명에 한계가 없다면 간절함 또한 없을 것이고, 결국 권태가 인간을 삼키고 말 것이다. 유한한 시간은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폭군일 때도 있지만, 삶에 다채로운 색을 입히는 좋은 벗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내가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답 없는 질문임을 알기에 사람들은 이런 존재론적인 질문을 애써 외면한 채 삶을 견딘다. 일상이 우리에게 지워준 무게를 견디며 시간을 꾸역꾸역 채워간다. 어떤 이들은 존재론적 질문은 관계론적 질문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존재의 의미는 타자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발현된다는 말일 것이다. 다른 이들의 요구에 응답하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나의 욕망을 내려놓고, 그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음의 생생함을 경험하게 된다. 삶의 의미는 그런 일들을 통해 발생한다.
예수는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 칭했다. 묵시문학적인 전통 속에서의 '인자'는 메시야를 암시하지만, 예수의 인자 선언은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했고,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영광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알고 살았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존재 이유였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우렁 속 같은 우울과 자기 비하에 빠진 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눌리고, 착취당하고, 조롱당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던 이들도 예수와 만나면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슴에 품곤 했다. 지배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통치하기 쉬운 대상은 폭력에 길들여져 지레 공포에 질린 이들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을 일으켜 세움으로 강고한 지배 질서에 틈을 만들고 있었다. 칼과 창으로 무장한 채 지배체제에 대항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지는 않지만, 예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다른 삶을 상상하는 사람들을 기존 질서는 불온하게 바라본다.
어느 날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권력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참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전갈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죽음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한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헤롯의 머리에 쓴 왕관은 이 당당함 앞에서 위세를 잃었다. 상징과 신화와 권세의 가면 속에 숨겨진 허약함을 예수는 꿰뚫어보고 있다. 물론 헤롯은 예수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얼은 죽일 수 없고 굴복시킬 수도 없다. 살아 있는 정신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의 목숨을 거둘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속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폭력은 없다. 예수는 바로 그런 당당함과 숭고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하나의 일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밀려온다. 우리 삶은 '해야 할 많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을 볼 수조차 없다. 그럴 때일수록 시급한 일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가 십자가라 해도 회피하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폭력이 예기되는 상황에서도 가든하게 생명과 평화의 길을 택하는 예수, 우리는 정말 그분을 믿는 것일까?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