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 이후 곧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가 올 것이란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면서 70년 넘게 이어온 분단의 역사가 남긴 대치상황을 극복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끝나고 있고, 평화의 새로운 역사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강연에서 '그리스도와 평화'란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독교 신학과 관련된 얘기지만 한인교회의 입장에서 관심을 가져볼 만한 평화에 대한 얘기입니다. 특히 한국과 미국에서 대표적인 기독교 평화론을 펼친 두 사람 함석헌과 존 하워드 요더의 사상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평화에 대한 얘기를 한 후, 현재 한인교회에서는 평화에 대한 어떤 얘기들이 오가고 있는지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여러분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평화가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평화주의나 비폭력의 원칙을 실천하면서 산다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평화나 비폭력이 전쟁을 현재진행형으로 이해하는 냉전체제와 맞지 않았고, 남한과 북한의 적대적 대치는 냉전시대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평화주의가 설 자리는 많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그 상황은 기독교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기독교의 특수한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비폭력과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인가 또 그런 자세가 신앙의 본질로 유지되어 왔는가 물으면 답하기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와 세상의 역사가 분리될 수 없었던 서양의 역사에서 전쟁은 언제나 역사의 일부였고 교회도 역사의 현장에서 비껴날 수가 없었지요. 오히려 유럽의 역사에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는 성전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종교개혁 이후 많은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고 그 주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평화보다 전쟁에 익숙한 역사에서 당연히 평화는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도 20세기 이전엔 많지 않았습니다. 그건 기독교 역사에서도 큰 틀에서 보면 마찬가지였는데,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던 16세기 유럽에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실천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는 재세례파라 불리던 신앙인들의 운동이었습니다. (흔히 기독교에서 평화주의자하면 중세기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떠올리는데, 실제 그가 어떤 평화주의자였는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가 주장한 평화주의의 본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게 사실입니다).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평화론자 함석헌 선생에 대한 얘기를 잠시 드리겠습니다. 함석헌은 1970년 하워드 브린턴이 쓴 Friends for 300 Years란 책을 번역해 <퀘이커 300년>이란 책으로 출간합니다. 그 서문의 일부를 좀 길어도 함께 읽고자 합니다.
처음에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한 것은 나 스스로 퀘이커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퀘이커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1947년부터입니다. 그해 3월 나는 이북에서 공산주의의 사납게 구는 것을 못 견디어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아직도 군정 밑에 있어서,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 않은 가슴을 안고 새 역사의 나갈 방향을 더듬고 있는 때였습니다. 간 곳마다 활발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 서울에 온지 얼마 아니 되어, 지금은 이 땅 위에 있지 않은 현동완 선생이 주장해 하시는 목요 모임에 나갔는데 그 때 그는 미국 여행을 마치고 갓 돌아온 뒤였기 때문에 여행 선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에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 특히 양심적 병역 거부(良心的 兵役 拒否)에 대한 말을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나서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그 뜻을 이해하고 정말 종교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 분명하면 군대복무를 면제하고 대신 다른 평화적인 사업으로 돌려주는 법령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때까지 기독교에서 자랐으면서도 전쟁은 온전히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전쟁은 당연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무교회에서조차도 전쟁 반대를 힘써 부르짖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치무라 선생이 러일전쟁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쳤지, 감히 국가에 대해 항쟁하는 사회적 역사적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것을 칭찬하고, 성령을 받아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데 그쳤지, 아무도 나도 그래야 한다 하고 실천의 태도로 나간다든지, 우리도 그렇게 할 의무가 있지 않으냐 하고 용감히 주장하거나 권면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그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에 서양 책을 더러 읽노라면 퀘이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수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테두리 널따란 모자에 허술한 옷을 입고 좀 괴상한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괴상한 사람이 괴상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서문을 읽으면서 두 가지 내용에 관심이 갔습니다. 하나는 구한말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가 평화주의를 주장하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함석헌 선생이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병역을 거부하고 비폭력의 원칙을 믿음으로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읽으며 한국 개신교의 신앙적 뿌리는 무엇이었는지 잠시나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함석헌이 그때 퀘이커 신앙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국 기독교와 퀘이커들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었을지 또 함석헌의 사상은 어떻게 변했을지 혼자 궁금해집니다. 다른 하나는 괴상한 복장의 퀘이커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났던 길손 모양으로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왠지 계속 눈길이 가는 문장입니다. 어둑한 빛 밑에서 자꾸 말을 건네 오는 길손의 형상. 누구에게나 그런 형상의 길손이 있지 않은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무튼 퀘이커들을 통해 발견한 평화주의 신앙은 함석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평화론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함석헌 선생은 17세기에 시작한 퀘이커주의를 통해 지금도 건재한 기독교 평화주의의 전통과 만났지만, 그 역사를 좀더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보다 100년 전 종교개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Anabaptists)로 불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톨릭교회와 루터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를 심하게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16세기 초반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고, 예수를 따른다는 건 그리스도의 비폭력과 평화주의 정신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라 믿게 됩니다. 이 사실이 별로 특별한 것으로 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거의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반영하는 신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런 신앙을 갖게 된 동기가 흥미롭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진정으로 따르자고 했던 게 그런 결과를 갖고 온 것이지요. 아시겠지만 루터의 핵심적인 사상 두 가지를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오직 성경만을' 따른다는 가르침과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였습니다. 루터의 개혁정신은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에겐 시대의 정신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정신을 실천하자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당시 스위스에 츠빙글리(Zwingli)라는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던 신부가 있었는데, 그 지역의 젊은이들이 그 밑에 모여 같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루터의 말대로 성경을 직접 읽는 일도 실천했고요. 요즘 생각하면 교인들이 모여 함께 성경을 읽는다는 게 특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얘기가 아니지만, 당시로선 큰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 유럽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권력이었지요. 따라서 국민이 되는 것과 교인이 되는 것은 같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마땅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리를 믿는 것이었고, 그 교리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교리는 서양의 중세기를 거치면서 복잡해졌는데, 일반 사람들에게 그 교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대가를 지불한 것처럼 자신도 그 값을 어떻게라도 치러야 하는 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논리로 중세 말기에 등장한 게 면죄부라는 것이었지요. 아무튼 구원의 확신만이 중요한 상황에서, 성경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등장해 그 교리가 틀렸다고 한 것이지요. '성경'과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의 주장은 그 시대에 대한 충격적인 도전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구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없으니, 루터의 개혁이 옳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재세례파라 불리게 된 청년들도 성경을 스스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성경을 통해 특별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구원을 위한 새로운 성서적 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 - 그의 삶, 그의 행적, 그의 가르침 - 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게 되고 이를 그들의 신앙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루터가 사도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 같이, 그 시대 종교개혁자들은 바울을 좋아했고 또 그의 서신을 많이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이들은 바울이 아니라 예수를 성경의 중심으로 보게 됩니다. 특히 '산상수훈'을 예수의 본질적인 가르침으로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게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보다 예수가 우선이었고, '오직 성경'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들이 발견한 예수는 무엇보다 비폭력과 평화를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에까지 가셨다고 보게 되었고요. 하지만 그들의 주장 중에 당시 권력층이 주목한 것은 '세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아세례를 허용하지 않았고, 세례는 믿음의 징표이기 때문에 믿음을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회의 입장에서 그것은 세례를 두 번 받는 '재세례'를 의미했기에 수용할 수 없었지요. 더 큰 이유는 아마도 세례증서가 출생신고의 역할을 하던 시기에 갓 태어난 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다는 건 큰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 것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교회는 신앙에 의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믿었지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을 원칙으로 삼는 국가의 사업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게되면서, 그들은 "재세례파"란 멍에가 씌어져 핍박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를 좋아하니 세례를 한 번 더 받으면 어떠냐 하는 조롱과 함께 수장당하기도 했고, 화형에 처해지는 경우도 많았지요.
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유럽의 여러 지역에 재세례파 공동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 이름을 따서 공동체의 명칭이 결정되기도 했는데,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종파는 메노나이트(Mennonites)와 아미쉬(Amish)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시카고에서 1시간 반 떨어진 인디애나 에카르트 지역은 이 두 종파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일 겁니다. 아마도 메노나이트들보단 아직도 마차를 타고 다니는 아미쉬들이 더 많이 알려진 것 같은데 그 지역을 지나갈 때면 현대 기독교에서 느끼지 못하는 숭고함을 느끼게 됩니다. 인디애나 그 지역에 있는 메노나이트 들이 설립한 고션대학은 오래 전에 이런 결정을 합니다. 대학 야구경기를 시작하기 전 모두 기립해 미국 국가를 부르는 관행에 더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는데, 그 지역에서 큰 논란이 되었었죠. 당시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도 퀘이커들과 이 두 종파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시작한 역사가 다르지만 모두 비폭력 평화주의를 신앙의 원칙으로 삼고 국가에서부터 분리 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메노나이트나 아미쉬들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동기도 이미 미국에서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하고 있던 퀘이커들이 그들을 초청했기 때문이고, 아미쉬들이 지금도 입는 의복은 그들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퀘이커들이 입던 스타일의 옷이라 합니다.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만 취한다는 simplicity의 정신은 현대문명을 거부하는 아미쉬들의 신앙과 삶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메노나이트나 퀘이커들이 지금도 추구하는 신앙의 가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 사이에 신앙적인 차이도 있지만, 오늘 강연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한 평화주의 원칙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비폭력 평화주의 신앙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살아온 퀘이커, 메노나이트, 아미쉬들에 대해 말씀드리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비폭력 평화주의에 대한 기독교적인 배경을 설명하자는 의도도 있고,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1927-1997)라는 미국의 평화주의 신학자를 소개하자는 의도도 있습니다. 요더는 인디애나 에카르트 지역에 있는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던 신학자였는데, 메노나이트, 재세례파의 평화주의 원칙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미국의 주류 신학계에 큰 도전과 각성의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재세례파 신앙인들은 처음부터 교리에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교리를 내세운 교권으로부터 핍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지요. 그 결과 교리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교리를 가르치는 신학교육에도 집중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내세울만한 신학의 전통도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 신학의 역사에서 주목받는 일도 거의 없었지요. 한때 아미쉬들이 미국의 의무교육 제도를 거부하면서 벌어진 법정소송이 사회적인 논란이 된 적은 있었는데, 그것을 신학의 문제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역사를 바꾼 게 요더라는 신학자였고,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1972년에 출판된 <예수의 정치 The Politics of Jesus>란 책으로, 지금은 20세기 신학의 고전이라 취급받고 있습니다.
사실 비폭력 평화주의의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서 그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후반 서양이 세상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면서 이제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인간의 힘으로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완성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과 함께 등장한 낙관주의였지요. 그런 이상적인 평화주의에 도전한 게 미국의 신학자가 바로 라인홀드 니버였습니다. 그는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랑이나 평화는 이상의 가치로 삼을 수는 있어도 현실을 살아가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지요. 기독교 평화주의를 이단이라고까지 하면서 지속적으로 비판한 니버는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요 신학자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베트남 전쟁 이후 쇠락하던 그의 명성이 2003년 미국이 이락을 침공할 때 다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그 전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니버의 신학에서 그 근거를 찾았고, 반대하던 사람들은 이를 니버의 신학에 대한 오해라 항변했지요. 당시 오바마 대통령도 니버의 현실주의 정치철학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니버는 실제 미국에 대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미국 역사의 의미를 신학의 언어로 설명하기도 했고, 2차 대전 이후 군사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왜 군사적 힘을 유지하고 사용해야 하는지를 현실과 초월 또는 추상적인 언어로 풀어내기도 했습니다. 요더의 신학은 바로 이런 니버의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합니다.
요더의 논리는 자유주의 신학과 같이 인간이 평화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정도로 성장했으니 평화를 이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비폭력 평화주의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재세례파의 오랜 주장을 20세기의 상황에서 새롭게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니버에 대한 그의 비판을 저는 지금도 정당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더는 예수의 가르침이 너무 이상적이라 현실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비판했고, 예수의 윤리는 하늘나라가 곧 다가온다는 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윤리가 아니라 한시적인 종말론의 윤리였다는 입장을 비판했습니다. 요더는 니버가 예수가 십자가를 진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죄인들이 모여 개개인보다 교회란 공동체를 통해 더 나은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했던 교회의 본질을 몰랐다 비판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고 넘어가지만 요더의 니버비판이 미국신학의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재세례파 신앙이 그러했듯이 요더는 예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예수의 정치>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누가복음을 통해 설명해주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예수는 어떻게 믿으라고 가르친 선생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선생이었지요. 십자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구체적으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었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를 실천할 것을 요구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중심에 비폭력과 평화주의의 원칙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인디애나 에카르트 지역을 시카고의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좀 있다고 하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삽니다. 한국에서 그곳을 시카고 '근처다,' '바로 옆이다'라는 좀 과장 섞인 말로 소개한 적도 있지요. 기독교 신앙의 소중한 정신이 재세례파 신앙인들의 평화주의와 저항의식 속에 남아있다고 생각하기에 그 동네의 이름만 들어도 재세례파들의 신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생각하는 자리에서 요더를 얘기하는 이유는 예수를 따른다는 모든 사람들이 재세례파 신앙인들의 평화주의 신앙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비폭력 평화주의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란 그들의 신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게 이 땅에서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교회에서 평화에 대한 얘기를 하기 더 쉽겠지요.
미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주의 원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재세례파 신앙을 주류 신학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신학의 전통으로 내세운 사람이 요더였다면, 퀘이커들의 영향을 받아 냉전시대 남한과 북한의 적대적 대치상황 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이 평화론을 펼쳤던 사람은 함석헌이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는 함석헌 사상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예수는 평화주의자'였다 분명히 얘기했지만, 평화주의의 뜻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차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의 원리에서 찾았습니다. 생명의 원리를 경쟁과 다툼으로 본 것은 자본주의와 다윈주의가 득세하면서 사람들에게 주입시킨 사상이라고 보았지요. 그는 생명의 본질을 '살아라!'하는 절대의 명령으로 이해했고, 삶의 큰 길이 바로 평화의 길이라 했습니다. 요더의 <예수의 정치>가 출간된 1972년, 함석헌은 '평화운동을 일으키자'는 제목의 강연을 합니다. 거기서 한국의 상황이 공산주의와 대치중이기 때문에 평화운동이 불가능하다는 - 당시로선 다수 국민의 견해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 입장에 반박해 평화운동을 펼쳐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는 한국에서 평화를 꿈꾸지 못하게 된 이유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민중의 정신을 약화시키고 권력과 부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독점하려는 국가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국제적인 전쟁업자들이 서로 흥정해 전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는 평화운동의 당위성을 생명을 지향하는 인간의 양심에서 찾습니다. 평화의 길은 바로 절대적 평화주의자였던 예수가 갔던 길이고, 그 길이 바로 부활의 길이라는 주장도 그 강연에서 했습니다. 평화는 역사의 명령이고 자기희생이 따르는 믿음의 길이라고는 말도 합니다. 함석헌의 그 강연은 남과 북의 적대적 대치가 강화되고 혹독한 유신체제가 시작하던 시기, 평화란 말만 해도 의심받던 시기의 것에 한 것이지만 지금 읽어도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인식이 특히 교회 내부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탓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함석헌은 평화를 정치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자연의 현상에서 평화에 대한 이해를 찾고자 했지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평화가 어떻게 오나? 대기(大氣)를 마시고 가스를 뱉으니 평화요, 먹을 것을 먹고 마실 것을 마시고 속에 담긴 찌꺼기를 내보내니 평화요, 햇빛을 보고 웃고 바람을 쐬고 죽지를 펴니 평화다. 아니다. 마시고 뱉으니 대기가 있었고 먹고 마시고 내보내니 밥이요 물이었으며 웃고 나니 햇빛이요 펴고 보니 바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셨던 분이니, 평화를 힘의 균형으로 보거나 정치적 타협을 통해 만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싫어하셨겠지요. 그 이유는 현실적인 평화나 평화의 현실성에 대해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평화는 정치적인 흥정으로 통해 또다시 사라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화는 정치운동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출발하는 정신운동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고요. 함석헌은 폭력주의가 이끌어온 역사가 이제 막다른 길목까지 왔고 이를 타개할 혁명적인 논리가 바로 비폭력 평화주의라 생각했습니다. 그 평화주의는 정치 이전에 생명의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정치의 폭력적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함석헌과 요더를 간단이나마 비교해 보자면, 요더는 기독교 평화운동의 근거를 예수의 행적과 제자들을 향한 그의 가르침에서 찾았지만, 함석헌은 예수의 평화주의를 생명과 자연 그리고 정신의 자각에서 출발한 비폭력주의의 한 가지 예로 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화주의의 모형을 예수운동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요더는 니버가 죄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정치가 필요하고 정치는 필연적으로 강제와 폭력을 수반한다고 생각한 것에 맛서 예수의 정치는 세상의 정치와 다르단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예수가 가르쳐준 정치는 전쟁과 폭력의 정치가 아니라 비폭력과 평화와 십자가의 정치였다 주장했습니다. 이에 비해 함석헌은 모든 정치의 배후에 '폭력주의와 강제주의 사상'이 있다고 믿었지만, 니버와는 달리 이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런 정치가 억압적인 국가주의를 만들고, 국가주의는 민중을 지배하고 평화를 반대하는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철학이 된다고 본 것이지요. 평화주의를 이단이라고까지 규정한 니버는 예수의 사랑이나 비폭력의 윤리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함석헌은 평화운동을 불가능의 가능성, 즉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라 말합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요, 종교의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니버의 기독교 신앙이 국가와 타협한 현실적인 선택에 근거한 것이라면, 요더의 신앙은 국가와 타협하지 않는 또다른 현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준 현실의 의미)에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함석헌의 평화론이 비현실적인 것이라 비판한다면, 함석헌은 자신의 비현실적 평화론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니버를 참고한 함석헌과 요더의 평화론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비교를 마칩니다. 다른 의도보다 한국과 미국의 평화주의 전통의 한 부분을 소개해 오늘날 한인교회 내에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평화주의가 기독교 역사의 소중한 전통이란 생각을 하시는 계기가 되면 좋겠고, 극한 대립의 역사와 그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교회 내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대립과 불신의 역사가 바로 한국교회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교회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된 이유는 많습니다. 6.25전쟁이 남긴 상처 그리고 그 후 공산권을 적으로 규정해 이어진 냉전체제 그리고 이를 이용해 공고해진 독제체제도 그 이유의 일부입니다. 북한이 서양의 무신론을 따르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성장이 해방 후 북한에서 받은 박해를 기억하는 교인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고, 교회가 한국의 반공주의의 한 축을 담당해 오면서 그런 적개심을 신앙의 일부로 내면화 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 심도 깊게 논의를 할 주제들이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들 때문에 교회 내에서 남북 사이의 평화를 얘기하기 쉽지 않습니다. 시카고 지역의 한인교회들에서도 그런 불신과 적개심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어딜 가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의 조건인 화해를 얘기하기 힘들겠지요. 화해를 위해 용서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얘기도 할 수 없겠고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 평화주의는 평화를 신앙으로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재세례파들이 평화를 신앙으로 실천한 사람들인데, 그런 신앙이 오늘날 한국에서 꼭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 이 글은 서보명 미국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가 지난 4월 24일(현지시간) 한인교회에서 평화를 주제로 전한 강연문 전문입니다. 서 교수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