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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기] Day 33. 모든 순간에 살아 있었음을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아르주아(Arzua)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7시간30분 (37.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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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의 모습이다. 이곳은 순례의 종착지이자 또 다른 순례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순례 이유가 어떠하든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큰 감동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대성당 공사를 마쳤다고 하니 지금이 산티아고로 향할 절호의 기회이다.

오늘이 마지막 순례이다. 생-장-피에-드-포르(St-Jean-Pied-de-Port)에서 시작된 여정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de-Compostela)를 맞아 끝을 맺는다. 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그 길었던 800Km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지금껏 살아오며 내가 이 길을 걷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고 또 이 길을 시작할 때만 해도 완주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곳에 있고 이 길의 마지막 현장에 서 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여러 영혼과 만났다. 그들은 평소 일상에서 만났던 이들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미지의 것을 자기 내부에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걸림돌이 낮은 영혼들이었다. 훨씬 몸이 가벼운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가진 삶의 태도가 부러웠지만 부러워한들 그건 그저 그들의 삶일 뿐이었다. 그들처럼 되기 위한 개인적인 바람이나 마음 만으론 자유로운 영혼에 탑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만의 길을 새롭게 열어갈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게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에도, 이놈의 고독한 순례자는 여전히 '자아'라는 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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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앞뒤로 빼곡히 찍힌 순례자 여권의 도장들을 바라본다. 지난 시간이 기억에서 잊혀도 몸은 기억하고 있겠지만 때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참 뿌듯할 때가 있다. 잃어버릴까 봐 여권을 꽁꽁 싸매 가방 깊숙이 넣어둔다.

누구에게나 낯선 곳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과 미지의 것을 대면하는 일은 두렵고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인생의 기쁨은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설 때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 중에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여전히 몸엔 벤 관성이 나를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려 하지만 두 발을 땅에 굳건히 디딘 채 흔들림을 견뎌 볼까 한다. 물론 넘어지고 비틀댈 수 있다. 새로운 초대장이 날아와도 쭈뼛대며 망설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 채, 지(知)와 행(行) 사이의 간격을 조금씩 조금씩 좁혀가 보려 한다. 지금부터, 천천히 말이다.

훌쩍 떠났다가 슬며시 돌아간다. 삶이라는 문장에 의문부호가 붙기 시작하면서 모든 시간이 축복이자 고통임을 알게 된다. 누군가 이번 순례에 관해 "무슨 답이라도 찾았습니까? 아니면 새로운 무엇이라도 보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가장 솔직한 대답은 이것이다. 그럴듯한 어떤 말도 해줄 게 없다는 것 말이다. "아니요. 그런 건 없었습니다. 다만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 때문에 후회했고 때론 만족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할 것 없는 이 시간 속에서 깨달은 것 하나는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의 순간에 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 하나 느끼고 갑니다."

나처럼 훌쩍 산티아고로 떠난 순례 선배자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을 안내하는 가이드에게 이런 말을 듣었다. "공격을 하거나 도망을 가는 것도 싸움의 일부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다만 싸움에 속하지 않는 것은, 두려움에 마비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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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순례 완주증이다. 순례자 여권만큼 의미 있는 종이 한 장이다.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 기록되어 있는 이 완주증은 액자에 넣어놓고 두고두고 보아도 좋을 만한 산티아고 상징물이다.

지나온 삶을 잠시 떠올려 본다. 패배하는 것은 늘 두렵고 창피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패배의 형태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도망가는 행위로 나타났다. 도망가는 행위만이 유일한 패배의 형태인 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패배의 모습은 도망가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순간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새로운 날들의 초대에 다시 몸이 굳어 옴짝달싹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이것이 패배의 한 형태임을 알아차리고 그 순간을 포월(抱越)해서라도 넘어설 것이다. 존재를 풍성하게 할 낯선 부름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그 난관을 넘어설 것이다. 산티아고로 떠나게 하고 또 산티아고 길 위에 있게 한 내면의 음성이 늘 함께할 것이기에 그리 두렵진 않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세월의 축적이 필요한 듯하다. 눈에 씐 비늘이 맑아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찬란할 인생을 위해 조금 느리고 조금 더디더라도 일상을 대하는 용기만큼은 잃지 않으련다. 그 지난한 순례길 위에서 마주할 평범한 일상순례자들을 생각하니 기대로 다시 가슴이 뛴다. 이젠 안다. 생기 있는 한 영혼은 반드시 그 생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의 기운을 전하지 않곤 견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시작하련다. 언제나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길은 열리는 법이다.

"절벽 끝으로 오라."
"할 수 없어요. 두려워요."

"절벽 끝으로 오라."
"할 수 없어요. 떨어질 거예요!"

"절벽 끝으로 오라."

그래서 나는 갔고,
그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나는 날아올랐다.

(영국 시인, 크리스토퍼 로그(Christopher Logue, 1926-2011)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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