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침묵 속에서'가 자꾸 떠오른다. 그는 난폭한 이 세상을 향해 이런 제안을 한다. "이제 열둘을 세면/우리 모두 침묵하자/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손도 움직이지 말자". 말이 비수가 되어 다른 이들의 가슴을 찌르고, 사람들을 가르고 있다면서 잠시 모든 말을 멈추자는 것이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말들이 세상을 떠돌고, 떠도는 말들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다. 오히려 오해와 불신을 낳고 있다.
정치인들의 막말이 도를 넘고 있다.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은 정치인들이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경멸과 조롱은 다반사이고 사람들을 격동시키려는 언어가 기관총처럼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런 일로 재미를 보는 이들은 사실과 주장을 뒤섞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진실 따위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 이익에만 발밭을 뿐이다. 저속한 말, 더러운 말은 인간 정신 속에 숨겨진 저속한 것을 부추긴다. 이성과 도덕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저속함이 거리를 횡행할 때 인간의 존엄은 무너진다.
이 삭막한 시대에 종교인들의 책무는 말의 제집을 찾아주는 것이고, 인간 속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굳이 종교인이라고 할 것도 없다. 개신교회에만 국한해서 말하자. 목사들은 '말'이 권력임을 잘 아는 이들이다. 목사의 말은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여야 하고, 상처 입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미풍이어야 하고, 잠든 영혼을 깨우는 천둥소리여야 하고, 불의를 타격하는 망치여야 한다. 그 때 말은 사건을 일으킨다. 그런 말과 만날 때 사람들은 크고 높은 세계에 접속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어느 목사의 막말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은 종교인의 책무이기에 뭐라 할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몰상식하거나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때, 더 나아가 신앙적이지 않을 때는 문제가 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특정인에게 불온의 찌지를 붙이고, 경멸의 언사를 일삼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가용성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경험과 기억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참된 인식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철저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성찰을 거치지 않고 발설되는 말은 폭력이다. 편리하다고 하여, 인기 있다고 하여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말과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인용했다. 본회퍼는 미치광이 운전사가 차를 몰아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할 때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은 죽은 이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만이 아니라 차에 올라 운전사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존엄한 생명이 속절없이 유린되는 현실에 전율했다. 그래서 공공의 책임성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깊은 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본회퍼가 치열한 숙고의 결과로 내린 결론을 맥락과 무관하게 자기 목적을 위해 함부로 전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독이다. 본회퍼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은 결단할 때이지 하릴없이 하늘의 신호를 기다릴 때가 아니'라면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게 대단히 중대한 결단을 날마다 새롭게 내리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보기에 사랑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저항의 기본은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 초월의 능력이다.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것이 사랑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몰강스러운 말들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4세기의 성자인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말이 저릿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양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늑대 천 마리에 에워싸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복하고 승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늑대가 되는 즉시 우리는 패배한다. 우리는 늑대를 기르지 않고 양을 기르는 목자의 지지를 잃기 때문이다." 경멸을 내포한 말, 혐오를 선동하는 말, 허영심에 뿌리를 내린 말은 생명을 낳지 못한다. 누군가의 가슴을 찌르던 말을 내려놓고 잠시 침묵하자.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