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이슬을 보내시어 만물의 결실을 재촉하시는 하나님,
욕망을 따라 질주하느라 지치고 상한 우리 영혼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마22:21).
명하신 대로 우리 존재 전체를 주님 앞에 바칩니다.
우리를 주님의 쓰임에 맞게 사용하여 주십시오. 아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올무에 몰아넣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평상시라면 경멸해 마지않았을 헤롯 당원들과도 공모를 했다.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불의한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자문을 구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보냄을 받은 이들은 질문에 앞서 예수를 한껏 추켜세운다. 선생님은 진실한 분이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분이기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한 말은 미덥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는 말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은 할라카(halakah) 전통을 따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현실에서 발생한 어떤 사안을 두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 갈릴 때면 율법의 권위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가 내리는 판단을 권위 있게 받아들여 자기들의 행동에 반영해야 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질문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양날의 칼이다. 어느 쪽으로 답해도 예수는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의 조세 정책에 저항하도록 민중들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쓰게 될 것이고, 옳다고 한다면 예수는 졸지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히게 될 상황이었다.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신 주님은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시고는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여 달라고 하셨다.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하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20) "황제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21) 간결한 문답이지만 그 의미는 가볍지 않다. 로마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하여 은으로 주조한 공식화폐인 데나리온 한 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양각되어 있었고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존엄한 아들 디벨리우스 황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다른 면에는 황태후인 리비아가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과 함께 "최고의 사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동전에는 제국신학이 오롯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함정 질문을 교묘하게 빠져나가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씨름으로 이야기하자면 되치기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구별된다고 대답하셨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함으로써 예수님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황제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로마를 통일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하나님의 아들', '주', '평화의 왕', '구원자'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들도 스스로를 신으로 여겼다. 이른바 황제숭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황제가 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역일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황제는 신이 아니라 황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을 향한 무언의 질문이거나 책망이다. '너희는 지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사느냐?'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조차 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니냐?' '로마의 지배를 거절하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로마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냐?' 힘을 통한 지배든 종교적 권위를 통한 지배든 지배를 지향한다면 황제에게 순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예수는 권위자들을 그런 질문 앞에 세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살고 있나? 이 땅에 살고 있으니 이 땅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황제'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인간에 대한 책임이 인간의 이중적 책임이다. 삶의 궁극적 관심을 잃는 순간 우리 삶은 욕망의 중력에 이끌려 납작해진다. 이웃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순간 거룩한 삶은 멀어진다. 찬송가 586장은 우리를 참과 거짓, 빛과 어둠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한다.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진리 위해 억압 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