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눈을 뜬 하갈

배경락 목사(기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창 16:1)

우리는 보통 주인공 의식이 있다. 성경에 주인공이 등장하면, 그 사람에게 나를 대입하여 읽어나간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 나오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대해선 관심을 두지 않거나, 혹은 그들을 악평하는 경향도 있다. 마치 자신은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주인공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죄인들이었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에 나오는 조연과 엑스트라에 관심이 자꾸 간다. 그들은 무엇을 느꼈고,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하갈은 아브라함의 여종이었다. 그녀를 소개하는 말은 간단하면서도 냉소적이다. "아! 그 여자아이. 애굽 출신 노예야!"우리는 주변에 하찮은 사람을 보면 비아냥거리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 그 사람! ..." 하갈은 은연중이 아니라 바로 대놓고 무시당하는 그런 여자였다. 한미라 (호서대) 교수는 '하갈은 아브라함이 애굽의 바로에게 선물로 받은 노예'라고 추정하였다(한미라, 58).

1877년 컬럼비아 특별구 경찰서장, 1889년 주 아이티 공사를 역임한 프레더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1818~1895)는 흑인 노예 출신이다. 그는 흑인으로서 최초로 미국 정부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흑인 노예 어머니 해리엇 베일리와 헤어질 때를 다음과 같이 썼다.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과 노인들, 결혼한 사람들과 미혼인 사람들,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면서 말들과 양들과 뿔이 달린 짐승들과 돼지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 먼저 우리 형제자매는 하나씩 차례로 이별을 고하고 떠났다. 그동안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큰 슬픔으로 마비되었다. 그리고 어머니 차례가 되었다. 어머니는 몽고메리 카운티의 아이작 릴레이에게 팔렸다. 그리고 내가 경매대에 올랐다. ... 모든 자녀와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반쯤 나간 어머니는 내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무리를 헤치고 릴레이가 서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발 앞에 쓰러져 무릎에 매달려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억양과 말투로 자신과 함께 아이까지 사서 최소한 아이 중 하나만이라도 구하기를 간청했다. ... 그 남자는 난폭한 주먹질과 발길질로 그녀를 뿌리쳤다. 당시 내 나이는 대여섯 살 정도였다"(Carolyn, 117).

1800년대 미국 노예는 그런 대우를 받았다. 수천 년 전 이집트의 노예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하갈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아브라함의 노예가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말 한마디를 제대로 했을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을 친절하게 대했을까? 아마도 그랬겠지. 그러나 창세기를 읽어보면,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하갈을 친절하게 대하기보다 차별과 무시와 외면으로 일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모두 친절하지는 않다.

하갈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었다. 사람이 아니라 소유물(물건)이었다. 하갈의 의견이나 생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하갈은 생각하면 안 되는 노예였다. 어느 날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니 내 여종(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으면 좋지 않을까요?" 그 생각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좋을지 모른다. 당시 풍습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하갈에게도 좋은 생각이었을까? 짐작건대 하갈이 10대나 20대였을 텐데 아브라함은 80이 훌쩍 넘은 할아버지였다. 거기 사랑이 있을 턱이 없다. 사라는 하갈을 인간으로 생각했을까? 인간의 존엄성, 여자로 느꼈을 감정과 마음을 생각했을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야기를 나눈 후, 하갈은 아브라함의 처소에 들어가야만 했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마침내 하갈이 임신하였다. 아무리 노예지만 주인의 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대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최소한 먹는 것이나 잠자리가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갈의 법적 지위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안전과 소속감과 평안을 맛보았다. 그리고 희망을 품고 꿈을 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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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배경락 기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제공)
▲눈을 뜬 하갈

"내가 아이를 낳으면 나의 신분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면, 희망과 꿈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노예로서 하지 말아야 할 생각과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건 매우 위험하였다. 노예는 생각도, 꿈도, 희망도 품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하갈은 자신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게 불화의 씨앗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 16:4-5).

여기 멸시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였다. 멸시를 뜻하는 히브리어 '칼랄'은 '가볍다', '사소한 일이다 ', '경히 여기다 ', '가볍게 취급하다 ', '경멸하다 ', '저주하다' 등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 교실에서). 그 많은 단어 중에, 성경 번역자는 '멸시하다'를 채택하여 번역하였다. 과연 당시 노예가 주인을 멸시하는 눈으로 쳐다볼 수 있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오히려 "가볍게 보았다"가 더 맞지 않을까? 임신한 몸으로 거동이 불편해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노예 소녀 하갈을 사라가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을까?

왕대일 교수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하갈이 주어처럼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본문 자체는 꼭 그렇지 않다. "그녀의 여주인이 그녀의 눈에 하찮아졌다"(창16:4b). 즉 하갈이 능동적으로 사라를 멸시했다기 보다는 하갈의 눈에 그녀의 여주인이 "작게 비쳐졌다"는 보도이다. 이것은 차라리 여인이 지닐 수 있는 본능적인 몸짓이라고 불 수 있다"(왕대일, 132).

어떤 해석이든 좋다. 흥미로운 점은 4절에서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여인 하갈이 이제 자신의 눈으로 주인과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5절에서 주인 사라도 하갈이 보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았다는 점이다(하성애, 14).

하갈이 눈을 뜨고 자기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 하갈이 보는 세상, 하갈이 보는 하나님, 하갈이 보는 주인은 어떤 모습일까?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눈을 떴다. 이전까지 자신이 보았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 전혀 다른 비전, 전혀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앙은 눈을 뜨는 것이다. 하갈이 눈을 떴다. (하갈 이야기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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