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국민들 지나친 비관론 빠져 우파에 몰표 해법은 우경화 아닌 직접 참여 민주주의
아시아의 몇몇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에 의존하지 않고서 경제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아시아 연대기금’을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 정부는 중국과 일본의 지지를 기대하면서, 이 기금에 240억 달러를 분담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사회 불안과 북한과의 긴장 고조, 신뢰의 추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취임 당시 “세계화된 대한민국”을 약속하며 1인당 국민소득을 연 4만 달러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로부터 12개월 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그도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이 표방하는 신자유주의의 위기로 한국이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고, 대북 강경책으로 남북한 사이의 긴장이 지난 10년을 통틀어 최고조에 이르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의 비핵화에 관한 6자회담(중국, 남한, 북한, 미국, 일본, 러시아)에서 한국이 배제될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사실 한국 국민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북한 정권이 가하는 온갖 비방과 위협에 익숙해진 터였다. 하지만 이런 행보에 놀란 이는 아무도 없다. 전임자들이 지나치게 친북적이라고 여겼던 이 대통령이 취임과 더불어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북한 정권이 양보를 하지 않는 한 대북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이에 북한은 2008년 말 남북한 간 불가침 합의를 무효화한다고 선언했다. 일본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도 북한에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단 사그라지면 미국은 북한 정부와 직접 대화를 개시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한국으로서는 “미국 정부와 공조할 수밖에 없겠지만 북한이 한국을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세종연구소 백학순 연구원은 밝혔다. 그러나 북한을 직접적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한국 국민은 북한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경제 상황 악화를 더욱 우려하고 있다. 국내총생산의 3분의 2가량을 국외 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경제위기와 사회위기가 맞물릴 위험이 크다. 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지난 3월 고용 창출과 영세민 지원을 위해 29조원에 이르는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한국의 사회위기는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폭풍으로 야기된 것보다 더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금융위기는 적어도 지역적으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재기를 위해 미국과 유럽 시장에 의지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비록 시간은 좀 걸렸지만 말이다. 지금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와 무관하게 전세계에 걸친 위기 속에서 국외의 상황에 따라 회복이 좌우되는 형편이다. 뿐만 아니라 11년 전만 해도 비교적 동질성을 보였던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가 지금은 그때와 달리 심화된 것도 차이점이라고 사회학자 김용학은 강조한다. 여러 연구소들의 발표를 보면 올해 상반기 말까지 한국에선 50만 개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사회는 분열되고, 국회에서는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한 정당들이 난장판을 벌이고 있으며, 국가원수의 지지도는 하락하는 가운데 지금의 고요함이 언제 깨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연봉 삭감과 초과근무 감축을 통한 고용 유지 조처가 마련됐을뿐만 아니라, 10~20%에 이르는 초임 삭감에 의욕을 잃고 학업을 연장하는 대학생들이 증가해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졸업자 수가 줄어들면서 문제를 완화시키고는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고통스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으며 정권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역경 앞에서 어느 정도 연대의식이 발휘되고는 있지만 이념의 골은 깊어만 간다. 정부를 비판하면 곧잘 ‘빨갱이’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은 이처럼 불안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여론의 ‘봉기’에 정부는 난데없이 허를 찔렸고, 이 과정에서 일부 한국인들의 외국인 혐오 반응을 엿본 외국 분석가들은 당혹감을 느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미국이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비준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사실상 각양각색의 불만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됐다. 식품 안전을 걱정하는 시민들의 대열에 교육 개혁에 반대하는 고교생들이 합류했고, 열렬한 개신교파에 속한 대통령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느낀 불교 신도들이 동참한 데 이어 마침내 노조들까지 가세했다. 비록 평화적으로 출발한 연대 시위였지만 국가의 전략적 독립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인 잠재적 반미주의가 여기에 없지는 않았다. 시위는 확산될수록 더욱 격렬한 양상을 보였고 곳곳에서 진압 경찰과 충돌했다. 이전 세대 시위대가 화염병으로 무장한 것과 달리 이들 시위대는 촛불을 손에 들었다. 경찰의 진압은 거세지고 시민들은 지쳐가는 와중에 대통령이 사과문을 통해 여론을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주특기인 밀어붙이기를 빗댄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사태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대통령은 저항 시위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는 공로를 세웠다”는 것이 국립 호주대학교 동아시아 역사 전문가인 개번 매코맥의 평가다. 인터넷 통제를 위한 무리수 한국은 사회의 민주화가 정치권의 발전보다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한국 정치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보다 출신 지역에 따라 그 구도가 결정되고 있다. 이런 줄서기를 이용한 기회주의적 작태에 국민은 염증을 느끼고 있다. 2008년 4월 총선의 투표율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저치인 46%를 기록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투표 결과(한나라당은 총 의석 299석 중 153석을 차지한 반면 민주당 의석은136석에서 81석으로 줄었다)를 통해 한국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사실과 국회의원과 시민들의 단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 세대들은 정치에 관심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자본주의 시스템이나 노골적으로 행사되기도 하는 금권력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파에 대항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대안 세력이 전혀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갈수록 개인주의적으로 변하고 연대의식이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현 정치 세태에도 실망하고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탈정치화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이수호는 밝힌다. 이들의 정치 참여는 종종 산발적인 활동들로 이뤄지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당시처럼 하나의 거대한 운동으로 융합되기도 한다. 이명박의 우경화 노선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수렁에 빠져든 지금, 이런 직접민주주의가 앞으로도 여러 가지 놀라움들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벵자맹 주아노, <서울, 어떤 도시의 발견>(Seoul, L’invention d’une city), 2006 참조. 글/필리프 퐁스 Phillipe Pons 주요 저서로는 <17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의 비참과 범죄>(1999), <에도부터 도쿄까지>(1988)가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
||||||
(기사제공: 르몽드디플로마티크)
info@ilemond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