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감하고 2020년을 맞아야 하는 시기, 우리는 2019년 성탄절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성탄절의 유래와 상업적 분위기는 차치하고 나는 성탄절이 한 해의 마지막 일주간을 앞두고 있는 것이 퍽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 한국 교회, 그리고 우리의 삶 모든 영역에서 정말 행복하고 멋진 한 해였어... 라고 말할 수 없는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바라는 것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렇듯이 감사함보다는 불만스러운 것투성이입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편안하게 감사하며 살아온 시간이 너무 이기적이었고 또한 죄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변에 있는 무수한 약자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억울한 정황에 처해 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온 세계의 미움과 차별의 대상이 된 북녘 하늘 아래 고되게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망설이며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도 한 해 일만 명이 넘고, 고독사하는 이도 한 해 삼천 명이 넘습니다. 매년 소모하는 천문학적인 군사비, 무기 구입비를 없애고 자식 교육 걱정,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이가 없는 없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우리가 경악해 한 일, 국민이 맡겨준 국가 권력을 자의에 따라 행사하는 검찰에 의해 모진 핍박을 받은 조국 교수 가족도 마음에 걸립니다. 어서 공명정대한 세상이 와서 조국 교수 가족과 같이 억울하게 고난을 겪는 이들이 없기를 염원합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한국교회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좋은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지만 성직자의 탐욕과 근본주의자의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성서적인 것 같지만 필연적으로 목사의 자의(恣意)가 넘쳐서 성서를 취사선택, 왜곡하고, 시대착오적인 신화와 미신을 유통하며, 자칭 신을 대리하는 것같이 선전하며 행세합니다.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와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신자에게 사랑보다는 증오와 혐오를 가르치고 이 수단으로 자기 집단을 지키며 생각이 다른 이를 악마화 하며 억압합니다.
사실 신학적으로 보아 근본주의 문제는 19세기에 이미 그 본질이 규명되어 지나간 흐름입니다. 성서를 문자대로 믿기를 강요하는 근본주의는 인문학적인 성서 비평학에 의하여 해체 지경까지 갔다가 20세기 초반 냉전체제와 맞물려 다시 지역적으로 발흥하고 있는 미제(美製)신앙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본주의 세력은 합리적인 계몽 과정을 지나며 보다 성숙한 유럽 사회에서는 별다른 힘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신학적 논의보다 대중을 휘어잡는 미신적 종교 놀이를 더욱 선호하기 때문에 합리성이 취약한 신자일수록 마술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듯이 허세 떠는 목사를 영웅시합니다. 이들은 자기 세력화를 위하여 성서를 오역하고, 그 뜻을 왜곡하며,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이용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을 흉내 내며 전국적으로 뉴 라이트 세력을 조직하고, 이명박 정권을 지지했던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진보를 거부하는 정치세력은 근본주의자들의 과거 지향적 보수성과 코드가 잘 맞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후원해주고 서로 이용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증오의 힘을 적대자에게 돌리면 쉽게 정치적으로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근본주의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교회, 사상, 종교를 사탄의 세력에 지배받고 있다고 선전하며 악마화 하는 일에 전문가입니다.
이들은 손에 성서를 들고 있지만 즐겨 이용하는 무기가 세 가지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상대를 신앙의 적, 하나님의 원수, 적그리스도로 몰아갈 수 있는 무서운 무기입니다. 여기에 일단 걸리면 누구든지 공존을 거부당하고 박멸되어야 할 존재로 전락합니다. 첫째는 이단, 둘째는 공산주의, 셋째는 이단과 공산주의 배후인 마귀와 사탄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실 모두 등치가 가능한 것으로 요약하면, 적그리스도(anti-Christ)입니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단 시비가 일어나고, 이어 상대를 악마화 하는 행동이 거침없이 나타납니다. 이런 근본주의를 설파하는 목사들은 악마를 잡는 대단한 영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져, 신학을 잘 모르는 신자는 내심 두려움을 가지고 그를 추종하게 됩니다. 따라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누군가를 이단으로, 빨갱이로, 적그리스도로 악마화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광화문의 기독교인들을 자세히 보면 이런 구조를 판에 밖은 듯 따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에 근본주의자들과 정치세력이 손을 잡고 비이성적인 광란을 일으켰던 일이 있었습니다. 백과사전에서 "원숭이 재판"(Scopes Trial)을 찾아보면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자인 미국 대통령 후보까지 나서서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그 결과는 근본주의자들이 온 사회의 조롱을 받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미국 기독교는 그 이후 급속도로 몰락했지요. 이 재판에서 높은 도덕성과 지성을 갖춘 종교가 아니라, 이성적 합리성을 거부하고 미신적인 신앙을 내세우던 기독교의 시대 착오성이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로부터 꼭 100년이나 지났는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근본주의자들이 자기 세상인 것처럼 나대고 있습니다. 나는 이 현상을 한국 기독교의 반지성주의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그러했듯이 맹목적인 신앙을 배운, 신학적으로 무지한 신도들의 열광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광화문에 모여든 근본주의자들이 자칭 선지자를 참칭하는 자와 합세하여 문재인 정권을 난데없이 빨갱이 정권이라 매도하며 악마화 하는 것은 미국적 근본주의자들이 하던 짓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미국에서는 한 때 근본주의자들이 공교육과정에서 성서 문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연과학적 세계관을 억압하려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문재인 정권을 빨갱이 정권으로 함부로 규정하고 정치적 세력 규합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다릅니다. 그러나 상대를 기독교 신앙의 적, 곧 악마화 한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주의자들의 정치 세력화는 종교와 정치의 분립을 전제하는 민주 사회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극우 정치세력의 손을 잡고 나타나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에 세뇌된 보수 기독교인들의 난동이라는 성격에 더하여, 정치 세력 규합에 실패해온 정치 세력이 편승하여 더욱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무수히 나타났다가 사라진 근본주의자들의 행태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이들의 선동에 우리 사회나 한국 교회가 휘말려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100년 전의 미국 사회와 같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늘의 한국 교회는 교육계에 침투한 사탄의 세력이라며 두려워하던 1920년 대 미국 교회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러했듯이 머잖아 근본주의자들의 본질이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리고 종교적으로 시대착오적인 "덜된" 본색이 드러나면 모두들 놀라 어처구니가 없다 할 것입니다.
루터는 성탄절을 일러 하나님이 높고 귀한 자리를 버리고 가장 비천한 자리, 말구유에 강림하신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화려한 귀족 가문이나 왕가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힘없고 낮은 자의 자리에 아기 예수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라는 메시지가 성탄절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기독교는 귀족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짐승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하는 곳, 부유한 자, 권세를 가진 자, 신분이 귀한 자들이 머물지 않던 자리, 말구유에 오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가난한 이의 빈한한 삶의 자리, 고공 농성하는 자리, 빼앗기고 억눌려 마음이 슬픈 이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계절입니다. 광화문의 기독교인들은 높은 권력을 잡으라는 예수를 믿으려 하겠지만 그런 예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비천한 자리에 오신 그분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을 낮추고 거짓과 오만과 탐욕을 버리고 비워야 하겠지요. 예수가 소중한 만큼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성탄 절기에 "하나님께는 영광, 사람에게는 평화"를 노래할 수 있겠지요.
※ 이 글은 박충구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