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출신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모세의 인물을 여러 차례 집중적으로 그렸다. 그 만큼 많이 모세를 그린 화가가 없을 것이다. 그의 생애 동안 단계마다 적어도 18번 모세를 그렸다는 것이 학자들의 보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그림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기도하는 중 받은 십계명판을 받아들고 밑으로 내려와서 목격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행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란의 춤이다.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출 32:6)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적 삶을 이끌고 삶에 맞는 말씀을 받으려고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하는 그 40일 사이에, 그들은 진영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고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상을 원한 것이다. 모세의 형인 아론은 제사장의 기능을 충족시키는 차원에서 금으로 된 모든 장식품들을 모으게 하여 젊은 황소의 상을 만든다. 충천하는 백성의 욕망과 아론의 무지가 합하여 금송아지가 만들어진다.
아론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 귀에 달고 있는 금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 오시오."
모든 백성이 저희 귀에 단 금고리들을 빼서, 아론에게 가져 왔다.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서 그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킵시다" 하고 선포하였다. (출 32:2-5) 그들은 말들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그 저항할 수 없는 유혹으로 아론에게 이미 명령을 만들고, 그들이 만든 명령을 따르는 시나리오를 만든다. 말의 유령은 어느새 몸속에 깃든다.
세상에 둘 곳 없는 말들이
가슴에 꽉 차 있어요 내가
병들었어요, 오 하느님, 제발
이 말들로부터 그 말들의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부터
그 저항할 수 없는 유혹으로부터
나를 풀어주시든지, 아니면 이 말의 유령들에게
몸을 줄 능력을 내게 주셔요
-김정란, 「아름다운 말의 유령들이」 (앞 부분)
모세가 짙은 구름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백성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그림 같은 장면을 본다.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 시내산 기슭에서 본 타지 않는 떨기나무 이후 처음 보는 기이한 광경일 것이다. 그들은 제단 위에 세워놓은 금송아지를 중심으로 빙 둘러 에워싸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다."(출 32:19)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모세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들고 있던 돌로 된 십계명판을 산 아래를 향해 내던지고 그 돌 판은 바위에 부딪혀서 깨뜨려진다. 모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후"(출 32:20), 하나님을 뵙기 위해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화가 푸생은 이 주제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저 멀리 원경에 아주 작게 홍해를 그려 넣음으로써 세심한 관람자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인생의 광란적 투쟁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 사건은 깊어지는 것인가, 멀어져 잊히는 것인가. 그림의 왼쪽에 하나님을 대리하여 구원사를 짊어진 모세와 후에 모세를 그의 사역을 이어 갈 산 아래로 내려오는 동반자 젊은 여호수아를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잘 드러나지 않는가 보다.
모세는 그가 부재해 있는 동안 일어난 사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계명 판 두 개 중 하나는 이미 깨어져 바닥에 흩어져있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두 손으로 높이 들고 있어 언제라도 내려칠 기세다. 여호수아는 이 모든 광경과 사건을 넋이 나간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림의 중심에 아론이 흰 튜니카(소매 없는 긴 옷)를 입고 자신이 만든 황금 송아지를 자랑스럽게 가리키며 서 있다. 여보게들, 이만하면 성공적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화가 푸생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자 하는 의중을 자연의 상징을 통하여 신묘(神妙)하게 토해내고 있다. 말하자면 육체의 욕망이 그들을 속인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육체의 시간에게 잡아먹혔다. 존재하는 일이 그들을 탕진시켰다 .
아론 위로 자라는 나무를 보라! 그 나무는 말라 생명의 기운이 다한 고사목(枯死木)이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한 나무에 점점 다가가는데, 그 나무는 아직은 수줍고 불안감을 잔뜩 집어먹은듯 하지만 푸른 햇잎을 내고 있고 꽃이 피려고 한다.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에워싸고 미친 듯 몸을 흔들며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사람들은 노래하고 때로 기도하며 팔을 위로 올리기도 하고 서로서로 팔을 감고 손을 잡기도 한다. 오, 가슴에 패이는 골 깊은 추락, 현기증 삶이 그들을 춤 속으로 내어던진다
그러나 오른쪽 앞쪽에 앉은 두 여인은 어디를 뚫어지게 바라보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녀는 바로 앞에 찬연하게 빛나는 제단 위 황금 송아지에 사로잡혀 있는가, 아니면 시선은 자신을 사로잡아 삼키는 그 화려한 외관을 꿰뚫고 넘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말씀을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푸생의 그림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화가가 중심에 인물들과 함께 크게 배치한 형상은 서술하고자 한 사건에서 주변 역할을 하는 것인가? 화가가 예증적으로 지각한 반동이 오히려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예술가는 도덕주의자나 교리주의자가 아니다. 화가는 시인과 함께 인간이 빠진 생의 눈부신 유혹과 유혹 속에서 진지하게 허우적거리는 몸짓과 그 몸짓의 한계와 상스러운 의미를 가감 없이 기술한다. 카오스같은 열정의 도가니 속에서 의미가 창출되는 창발적 어떨 때를 기다리며......
"어떨 땐 가끔...당신의 천사들의
날개가 거의 물질적으로 내 손끝에
닿아요, 너무 뜨거워 만질 수는 없지만"
내가 숨을 쉴 수가 없어요, 하느님
천사의 날개들이 밤낮으로 내 존재 주위에서
너무나 지독한 의미로 펄럭이고 있어요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것이 지상의 것이 아닌 줄
내가 알아요, 내가 허용되지 않는
아름다운 말들을 너무나 꿈꾸었어요
용서해 주셔요
내가 턱없는 유령놀이에 너무
푹 빠진 걸 알아요 너무 멀리까지
온 걸 내가 알아요 하지만
어떨 땐 가끔...당신의 천사들의
날개가 거의 물질적으로 내 손끝에
닿아요, 너무 뜨거워 만질 수는 없지만
-김정란, 「아름다운 말의 유령들이」 (후반부)
※ 이 글은 심광섭 목사(전 감신대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