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장 17-24절, 시편 6편 2-9절, 마태복음서 5장 38-48절
[기술의 발전과 삶의 변화]
제가 나이는 얼마 먹지 않았는데, 우리 사회가 워낙 빠르게 변하다 보니 어린 시절의 일들이 꽤나 오래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전기가 자주 나갔습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에는 이상하게 동네 전체가 전기가 나가곤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집만 전기가 나가는 경우가 있었기에, 전기가 나가면 꼭 이웃집도 깜깜한가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양초가 필수품이었는데,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새까만 어둠 속에서 밝아오는 작은 촛불이 마냥 신기하고 신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제 고향집 뒤뜰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한 여름에는 냉장고 역할을 해서, 김치통이나 수박을 담가두기도 했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서 밥을 짓고, 음식을 했지요. 그러다가 펌프가 생겼는데,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하면 깊은 우물 속의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습니다. 더운 여름에 펌프 밑에 엎드려 등목이라도 하면 정말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집안에 수도가 들어왔습니다. 상수도는 아니었고, 땅을 파서 모터로 지하수 물을 끌어오는 것이지요.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나오는데 그것도 참 신기했습니다.
우리집은 1995년까지도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어 먹고, 구들을 놓은 옛날 방식의 온돌방이었습니다. 저녁에 밥 짓느라 데워진 구들은 새벽이 되면 식어 버리고, 숭숭 뚫린 문틈으로 외풍이 들어오면 찬바람에 잠이 깨고, 몸을 웅크리게 됩니다. 아마도 그 시간이 대체로 새벽 네 다섯시 정도가 될 것인데, 그러면 그 때 할머니나 아버지가 부엌으로 가서 다시 불을 지피고 군불을 때면 온돌이 따뜻해져서 다시 스르르 잠이 오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LPG 가스도 없었고 대신 연탄이나 석유곤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라면을 끓인다든지, 빈대떡을 해 먹는다든지 했지요. 역시 성냥으로 불을 켜서 곤로 심지에 붙이면 약간은 매캐한 석유 냄새가 피어오르곤 했습니다. 추수가 끝나면 한 겨울을 나기 위해 뒷동산에 가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떨어진 솔가리들을 긁어모았고, 죽은 나무는 베어다가 장작을 만들고 했던 기억들이 생생하고, 안방 한 편에는 화로가 있었는데, 거무튀튀한 재 속에 숨어 있던 빨간 숯불이 눈에 선합니다. 가끔씩 주어온 밤이나, 방 한 구석 왕겨 속에 보관하던 고구마라도 구워먹으면 참 행복했지요. 어머니는 바로 집 앞에 있던 작은 텃밭에서 온갖 채소를 가꾸어, 그것을 밤늦도록 다듬어 새벽같이 리어카에 싣고 아침 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매일 3킬로미터도 더 되는 길을 가야했기에 그것이 힘들었던 어머니는 제가 6학년이 될 무렵 자전거를 배우셨고, 그 뒤로 큰 짐 자전거가 리어카를 대신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6학년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배워 탈 수 있었습니다. 핸드폰 하나로 세상의 모든 소식과 지식 정보를 접하는 오늘을 살아가며, 가끔 떠오르는 제 어릴 적 기억들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내에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실제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냈습니다.
[정말 잘 살게 되었나?]
저마다 삶이 다르겠지만, 저 한 사람의 삶의 여정만 보아도, 우리나라는 분명 매우 발전했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류의 바람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눈부신 경제발전의 한 모델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지금의 삶이 행복한가를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분명 예전보다 나아졌는데도 왜 우리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뉴스를 보고 있으면 참 마음이 불편해 질 때가 많습니다. 등산하다가 살짝 어깨를 부딪친 일로 30대 남성이 70대 어르신에게 칼부림까지 하고, 경제적인 문제는 크게 없을 것으로 보이는 한의사 부부가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필리핀에 버리고 오는 일도 발생하고, 유명 유튜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수갑을 채우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습격을 당한 일이라든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집단 폭행 소식, 남자 연예인들의 카톡 방에서 오고 가는 음담패설들을 듣고 있노라면, 과연 우리가 일구어 온 문명이 무엇인가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창세기의 본문 말씀은 농경문화로부터 도시문명이 발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신의 아들 이름인 에녹이라 부릅니다. 에녹의 5대 후손이 라멕인데, 이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고 창세기는 언급합니다. 일부다처제의 등장입니다. 한 명의 남편과 한 명의 아내로 가정을 이루는 일부일처제가 가장 일반적인 결혼의 형태인데, 한명의 남자가 여러 아내를 갖는 경우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권력이 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불평등이 발생합니다. 창세기는 라멕의 아들들을 언급하면서 대규모 농장의 목축업이 발달하는 과정, 국가의 제의들을 치르기 위해 음악을 만들고, 청동기 문명에서 철기 문명으로 이어지는 과정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문명 발달 과정을 창세기는 꽤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도시를 세운 자가 셋의 후손이 아니라 형제 살인의 주인공 가인이라는 것부터가 그러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면서 자신들만의 문명을 만드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라멕의 노래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라멕은 자신을 다치게 한 이유로 사람을 죽인 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일군 문명은 겉으로는 휘황찬란해 보일지 모르지만, 대량살상과 같은 끊임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왔다는 성찰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이란과 미국의 불화로 국제뉴스를 달구고 있습니다. 한 때 미국은 인류의 신문명을 이끌어 온 나라로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갈수록 도덕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웃 나라의 정복을 통해 자신의 배를 불리던 로마제국처럼 미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것 자체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 것인데, 탄핵 위기에 몰린 트럼프는 이란 군부의 실질적 지도자이고, 매년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솔레이마니를 암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돌리는 짓을 서슴지 않고 해 버렸습니다. 또 이에 맞서 이란 혁명수비대는 솔레이마니가 사망한 새벽 1시 20분을 반격 개시 시각으로 맞추어서 이라크에 있는 미군 기지 두곳에 보복 공격을 했습니다. 이런 이란의 반격을 두고 이슬람 경전인 꾸란의 형벌 원칙 '키사스'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키사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절로,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공격당한 만큼만 정확히 되돌려 복수한다는 동태복수법을 가리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불균형적'으로 대응하겠다"며 더 큰 보복으로 갚겠다고 한 것에 대하여 이란은 당한 것만큼만 갚겠다는 종교적 원칙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서에도 나오는 동태복수법은 피해를 당한 자가 지나치게 복수를 함으로써 갈수록 폭력의 강도가 강해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동태복수법 자체가 사소한 분쟁이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지고야 마는 숱한 경험 속에서 나온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태복수법이 지니는 또 다른 문제를 알고 계셨고 그래서 절대로 앙갚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동태복수법은 복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며, 폭력이 정의의 이름으로 둔갑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계속 자신들이 정의를 행사한다며 전쟁을 일삼는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폭력이 일상화 된 세상에서는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계속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라멕은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하며 자랑하고, 미국 또한 자신의 살인이 정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꾸미지만, 이런 폭력이 계속 되는 동안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호소]
오늘 읽은 시편이 바로 그 한 사람의 고통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수들의 괴롭힘 때문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해지고, 사무친 울화로 시력까지 흐려졌으며, 밤마다 눈물로 잠자리를 적시며, 탄식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마음은 걷잡을 수 없고, 뼈가 마디마다 떨립니다. 기운을 잃고, 살아갈 힘마저 사라집니다. 사람이 갑자기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뜻하지 않은 폭력의 상황에 노출될 때, 그 사건은 평생 그 사람을 괴롭히는 상처로 남습니다. 괴한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묻지마 폭행의 희생자들, 가정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극심한 공포로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에게 순응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취약함과 공포심, 무력감과 혼란을 동시에 느끼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불행한 사건이 지나도 이런 감정들은 계속 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사건을 떠올리며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 때 나는 왜 그렇게밖에 행동하지 못했을까?' 하며 분노와 죄책감, 의심, 우울함, 후회, 무의미에 계속 노출이 됩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놀라게 되고, 무섭고도 생생한 꿈을 꾸기도 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상상을 하면서 또 한편 그 상상 때문에 스스로 수치스럽고 괴롭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도록 허락하셨는가를 물으며 신앙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동안 믿었던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사라지고,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살았다고 여기며 이제 세상은 위험한 곳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는 것이고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져 내려, 자꾸 앞길이 막막해 지는 느낌에 휩싸입니다. 삶을 살다보면 누구나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 올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 위와 같이 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 감정들이 전부 상실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계획이나,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치유할 수 있는 과정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피해를 당한 이들은 마음에 남은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여섯 가지의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1.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3. 당시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 4.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가? 5. 만약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6. 이 일이 나 자신과 나의 가치관이나 신앙,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피해자는 이런 문제들에 스스로 답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회적 공감을 얻고, 위로를 받으면서 조금씩 치유됩니다. 피해자에게 일어난 일은 잘못된 것이며, 불공정하고 정당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지를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하고, 물질적 손해와 심리적 고통에 대해서 현실적인 보상 또한 있어야 합니다. 즉 피해자들의 욕구가 충분하고도 적절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교회 사람들]
마태교회를 세워나가던 신앙공동체는 유다-로마 전쟁이라고 하는 최악의 고난을 겪고 나서 그 때 발생했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했던 이들입니다. 자신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더 근원적으로 변혁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새롭게 탈바꿈할 수 있으며, 조상들이 지켜온 계명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을 바로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악을 점차 줄여 나가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무례한 언어와 행동이 큰 피해를 주는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일깨워서 서로 존중하는 삶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폭력을 사랑으로 바꾸려는 모험을 실행합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라는 명령은 그냥 맞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상대편의 오른쪽 뺨을 때리려면 왼손으로 때리거나, 오른손 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중동지역에서 왼손은 뒷일을 처리하는 데 쓰는 손이었기에, 왼손이나 손등으로 사람을 치는 일은 폭행죄가 아니라 모욕죄에 해당되었고, 두 배의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꼭 폭력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내가 맞아 줄 테니, 나를 모욕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정확하게 인간 대우하면서 때리라는 말입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서, 때로 지배국가의 권력자가 식민지 백성을 다루면서 생기는 폭력에 대하여 마태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상대편의 마음에 남아 있는 양심을 일깨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분쟁을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가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고, 로마가 식민지 백성을 억압하고 또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루면서 과연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고소해서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고대에 속옷은 여러 벌이었고, 가난한 사람에게 겉옷은 한 벌이었습니다. 겉옷은 밤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이불이 되어 주고, 물건을 옮길 때는 보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자 속옷을 저당 잡으려고 합니다. 그럴 때 이 가난한 사람이 이제 겉옷까지도 내어 준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이 없어지고 더운 뙤약볕과 추운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누려야할 최소한의 휴식과 잠자리조차 보장받을 수 없게 되고, 벌거벗었기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마저 무너지게 됩니다. 공적인 재판이 인간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구약의 율법에서 모세도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애 22:26-27).
진정 옳은 재판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설득해서 가난한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도록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진 자가 가난한 사람의 속옷마저 빼앗도록 하는 재판이 모두 행복한 사람다운 세상을 만드는 재판인가? 합리성의 이름으로, 또는 법조문을 들이대면서 가난한 자의 모든 것을 탈탈 털어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라고 이 말씀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군인은 식민지 백성을 징발해서 노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고 가시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졌던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로마는 스스로 자신들이 문명국이었기에 일을 시켜도 함부로 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리(약 1.5킬로미터)라고 하는 제한을 두었습니다. 어떤 로마병사가 유대인 청년을 시켜서 이 물건을 들고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매우 밝은 표정으로 "그렇게 하지요" 하면서 오 리가 아니라 십 리를 들어 줍니다. 사람은 지배자의 위치에서 일을 시키면서 권력의 맛을 보면 볼수록 남보다 윗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시키는 일을 하고 윗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사람은 돈은 벌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얻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 리를 가라고 하는 강요에도 십 리를 기꺼이 가주는 행위 속에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인간의 높은 도덕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사랑은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참으로 명예로운 일입니다.
당시 세상은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명예가 수여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수치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러한 자비의 행동들은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식민지 백성에게는 자존감을 높여 주었고, 남을 지배하는 인간들의 양심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권력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다스리는 것, 관대함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보통 당시 신의 아들이라 불린 지배자들에게 요청되던 덕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 교인들은 힘없고, 박해당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지배자들에게 요구되는 이런 덕목을 자신들이 해 내고 있습니다. 불의를 불평 없이 참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실천합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사람들끼리만 협조하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배척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해체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세워가는 자주적인 능력을 가질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닮아, 원수마저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이들이 되고자 했습니다.
마태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훨씬 탁월한 도덕적 우월성과 자의식,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자율성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이들은 남과 떨어져서 홀로 군림하는 그런 지배자가 아니라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가족들이며, 모든 생명체가 함께 행복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요구한 행동은 수동적으로 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마태교인들은 무력이 아닌 사랑으로 적극적이고도 비폭력적인 저항을 하면서, 불의를 폭로하고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문명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문명 생활은 어떤 생활인가요? 지금 세상은 참다운 문명(文明)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썩어가는 세상을 새롭게 하고, 어두운 세상을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덟 종류의 행복한 사람을 말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팔복의 말씀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해석한 버전으로 읽어 드리고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영적으로 늘 하나님을 찾는 그 사람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위로를 해 주실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사람이 활약할 자리를 허락하실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참여하여 애쓰는 사람은 풍성한 삶의 의미를 누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한 사람, 형제자매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따뜻하게 대해 주실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 말과 행동에 교활함이 없는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불리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 세상의 유혹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 또한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언제나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 주현절 첫주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올곧게 지켜내고자 했던 마태교회 교인들의 삶을 되돌아 봅니다. 선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며 우리 생명사랑교회 또한 올 한 해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용기와 힘을 주시고, 넘치는 주님의 사랑을 늘 맛보게 하여 주소서.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이 사회에 생명사랑교회를 세우신 당신의 뜻을 기억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올 한해,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 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 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하며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늘 행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당신께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올바로 쓰이게 하소서. 움켜쥔 손을 펴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을 서둘게 하소서.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서 부를 때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며 달려 나가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올해도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셨듯이, 우리 또한 형제자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온전하여 집시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받은 은총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이 설교문은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의 1월 12일 주일설교 원고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