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바꿔 달아보지만 시간이 새롭지는 않다. 어제의 해가 오늘도 떠오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서로를 권태롭게 바라본다. 이제 새로운 삶의 다짐도 없이 그저 세월의 물결을 타고 흐를 뿐이다. 자유로운가? 그렇지는 않다. 뭔가 미진하고 답답한 느낌이지만 새로운 삶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손택수 시인은 '탕자의 기도'라는 시에서 '나무는 종교가 없는데도 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다'며 자기 삶을 성찰한다. 자기 존재를 어쩔 수 없는 무게로 느끼는 것은 인간뿐인가? "풀잎은 풀잎인 채로, 구름은 구름인 채로,/바람은 바람인 채로 이미 자신이 되어 있는데/기도도 없이 기도가 되어 있는데//사람인 나는 내가 까마득하다/가도가도 닿을 수 없는 타향살이다". 시인의 고백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시간이 흘러도 삶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생활의 방편에는 곧잘 익숙해지지만 실체로서의 자아는 늘 낯설다. 타향살이 같은 인생길이기에 늘 불안하다. 행복할 때도 불안하다. 불안은 시간 속을 바장이는 인간의 조건이다. 불안과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사람은 자기에게 벌어지는 예기치 않는 일로 인해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인가?' 하고 묻지만, 정작 인생은 삶이 제기하는 문제에 응답하는 과정이라지 않던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길을 정했다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을 길이라 하셨다. 예수는 길이 된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길이 참임을 머리로 시인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길을 끝까지 걷겠다는 결의이다. 그 결의를 지켜갈 때 우리 영혼의 근육이 붙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은 얼마나 장엄한가? 자유를 원하면서도 우리가 부자유 속에서 허둥대는 것은 참 혹은 진리를 견지할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문제임을 알 때,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할 때 은총이 스며들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연약한 이들보다 더 큰 위험은 자기 확신에 찬 종교인들로부터 비롯된다. 거짓 목자들은 경건의 의상을 입고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영'을 심어줌으로 그들을 지배한다. 두려움은 함께 살아야 할 이웃들을 경계해야 할 '타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두려움은 증오의 뿌리이고 폭력의 아버지이다.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은 담을 쌓는 일에 익숙하다.
혐오와 증오를 선동하는 종교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만날 수 없다 여겼던 이들을 만나게 하셨다. 그러나 증오를 선동하는 이들은 특정한 사람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게토화함으로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무릇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담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리를 놓기 위해 땀을 흘릴 때 시간은 새로워지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비애는 스러진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