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31장 38-42절, 시편 37편 34-40절, 마태복음서 20장 1-15절
[인생의 풍랑을 건너는 법]
배를 타고 먼 길을 항해하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인이었고, 한 사람은 학자였습니다. 두 사람의 상인은 배에 가득히 재물을 싣고 가고 있었는데, 둘은 서로 자신이 더 큰 부자라고 뽐내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학자는 자기야말로 최고 부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학자의 겉모습을 본 상인들은 이 학자의 말에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어 크게 파손됩니다. 다행히도 배 안의 사람들은 가까스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상인들의 돈과 금은보화는 모두 배와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은 상인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이곳저곳을 구걸하러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고, 그가 말한 대로 실제 부자가 되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먼 길의 항해는 바로 우리 인생을 뜻합니다. 길고 긴 인생에는 반드시 풍랑이 밀려오는데, 그 때 과연 무엇에 의지할까를 이 이야기는 묻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재물을 의지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고, 지식과 지혜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학자는 먹고 살 길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일생동안 먹고 살 수 있다."(탈무드) 학자는 어디에 가서든 스스로의 삶을 꾸려낼 수 있는 방법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은 꼭 필요하고 쓸모가 많습니다. 돈이 풍족하면 여러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은 누가 쓰느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값어치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도 어리석은 사람의 손 안에 있으면 밑 빠진 독처럼 술술 다 새어나가고 맙니다.
풍랑을 만나 모든 재산을 잃은 상인들은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배를 타고 가는 그 긴 시간 동안 상인들이 학자와 사귀어 소중한 친구가 되었더라면 큰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금은보화를 가지고 적절하게 사용하여 더 많은 친구들을 미리 사귀어 두었더라면 위기의 순간에도 걱정하지 않겠지요. 교육을 잘 해서 효도하는 자식을 두었다면 상인들의 인생은 달라졌겠지요. 하다못해 보험을 들어 둔다든지, 또 사회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국가의 국민이라면 국가가 나서서 구제해 주었을 것입니다. 외부적인 조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로 큰 부자가 되었던 것이니, 큰 불행을 이겨낼 굳센 믿음과 의지만 있다면 재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모든 것 위에 올려놓고,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인양 선전하지만, 행복하고 보람차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더 소중한 다른 가치들을 지켜야 하고, 우정과 사랑, 배려와 헌신, 오랜 연륜에서 비롯된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때와 장소에 맞게 재해석되면 읽는 이의 눈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드러나면서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생의 물고기를 계속 낚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방법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기에서만 멈추지 않습니다.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라는 탈무드의 격언은 물고기가 있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물고기가 없다면 이 말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물고기를 기르는 것입니다. 동서양 고전을 막론하고 인류의 소중한 지혜의 자산들은 단순히 인생의 위기극복용으로만 멈추지 않습니다. 새로운 미래와 사회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들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삶에서 적용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근상'과 '개근거지']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 때는 국민학교라 불렸지만- 학교에서 주는 많은 상이 있었는데, 너나 나나 누구나 꼭 받아야 하는 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개근상입니다. 특기가 있는 친구들이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야 따로 특별한 상을 받지만, 평범한 학생들은 개근상이라도 타야했습니다. 근면함과 성실성을 인정하며 주는 개근상은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탈 수 있고, 그것이라도 들고 가야 부모님께 핀잔을 듣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21세기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개근상' 대신 '개근거지'라는 말이 회자된다고 합니다. 요즘 학교에는 체험학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교 수업이 아닌 다른 활동과 경험을 수업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때는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는데, 이런 한 번도 체험학습을 하지 않고 학교 수업에 개근하는 아이들을 개근거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체험학습을 통해 요즘 부모들은 해외여행을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내여행이라도 하기 때문이지요. 가난하여 다른 체험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저 학교에만 머무는 아이들은 그런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학교에 꼭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고 또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에 청년들이 남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변하는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꾸 옛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태신자들이 생기지 않고, 비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오기를 꺼리는 것은 기존의 신앙인들이 세상과 소통할 줄 모르고 자신들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고학력자가 많아진 대한민국에서 비상식적인 믿음은 이제 더 이상 설 곳이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더 깊숙이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는데, 교회에서 목회자의 권위나 당회의 권위만을 내세운다면 그 교회는 젊은 세대들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교회는 해 오던 많은 것들을 과감하게 벗어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새시대에 적합한 교회는 목회자보다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하고, 특별한 활동보다도 일상의 삶에서 신앙을 드러내며, 한 개인의 역량에 기대기보다는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며, 교회 내부의 문제에만 신경쓰기보다는 사회 전체에 관심을 가지며, 교인된 의무에서 봉사를 하기보다 기꺼이 자원하여 선교하고 이웃을 섬깁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21세기와 22세기에도 살아남고, 튼실하고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려면 과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관리인을 두고 포도원을 운영하는 주인입니다.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이요, 주인이며, 포도농장을 소유하고 있고, 관리인을 두고 포도원을 운영합니다. 자신의 포도원을 위해서 일꾼들을 고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고,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의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농장주들은 삶을 터전을 도시에 둔 엘리트로서, 대리인을 통해서 농촌에 있는 농장들을 관리하곤 했습니다. 보통 그들의 관심은 농장으로부터 나오는 이익이었습니다. 1세기에 갈릴리 지방은 부재지주들이 생겨나면서 극심한 실업 사태가 가중되었기에 일용노동자들은 주인과 임금협상도 하지 못한 채 그날그날 일거리를 얻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도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을 하기로 계약한 사람들과만 1데나리온으로 임금 결정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적당한 품삯을 준다고 말하거나, 우선 일부터 하라고 말하고 있지 품삯에 대한 논의가 없습니다.
당시 일용노동자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재산 품목으로 간주되었기에, 역설적으로 주인은 노예를 아끼고 소중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일용직 노동자는 하루 이상을 고용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을 정도로 어떤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일회용품과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의 농장주들은 일용 노동자들의 상황을 일부러 불리하게 만들고 임금을 낮추기 위한 온갖 전략들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포도 농사를 짓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전략 중 하나입니다. 포도 농사는 다른 곡식에 비해 손이 덜 가고, 수확철에만 집중적으로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싼 품삯으로 일시에 노동을 투입하여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작물이 포도였습니다. 또 포도는 일용할 양식으로 쓸 수는 없기에, 갈릴리 농부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는데, 그럴수록 농장주는 낮은 임금으로도 일군을 고용하기 쉬워졌고, 부를 늘릴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도 이른 아침 즉 6시에 포도원 주인과 노동계약을 한 일군은 그의 가족들이 간신히 하루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 데나리온에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시의 청중들이 느끼고 깨달았던 것을 우리 또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가 제기하는 문제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주인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이른 아침부터 일을 한 노동자편에 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옳다고 생각합니까? 무엇이 정의이며 공정한 것인가요?
오늘 이야기 속에서 이른 아침에 나와 12시간이나 일하고도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노동자가 주인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면 아마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본능이고, 인간만이 지닌 것이 아니라 원숭이 같은 영장류들도 느끼는 공정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노동자가 그렇게 불평하면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본능에 따라 사는 인간이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이 되라고 하십니다. 아침부터 일한 일군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바로 그 사람과 똑같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차분히 살펴서 그것을 알아야 우리는 미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이 필요했고, 일꾼들은 하루 벌이를 위해서 자신의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에 합의하고 일하러 갔습니다. 일꾼들은 일을 마친 후, 이른 아침에 합의한 대로 일한 대가를 받습니다. 주인은 권력을 지닌 당시 농장주들처럼 임금을 깎지는 않습니다.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에게 많은 임금을 준 것도 아니지만, 합의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면서 일관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기생을 넘어 공생이 되기 위해]
이른 아침에 계약을 마친 포도원 주인은 오전에 직접 인력 시장에 나갑니다. 이것은 관리인으로 하여금 농장을 돌보도록 했던 당시 농장주들의 행태와는 다소 다릅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농장에서 나는 소산보다 일꾼들이 빈둥거리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사실 포도원의 일은 오전 6시에 계약한 사람이 하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니까 비유의 포도원 주인은 사람들이 빈둥거리며 놀고 있기 때문에 일꾼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비유 도입부에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대다수의 독자들, 또는 예수님 말씀을 들은 당시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고용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도입부는 이렇게 쓰였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윤을 내려고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몸소 일꾼을 찾아 나선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일꾼을 고용하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보여준 자비와 은총은 임금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가족이 하루를 간신히 먹고 살 최저생계비였습니다. 오히려 포도원 주인의 자비는 사람들을 고용한 것에 있습니다. 포도원에 할 일이 많이 없는데도 일부러 일꾼을 고용하고 적당한 품삯을 지불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자비입니다. 특히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은 주인의 자비와 은총을 한껏 입게 됩니다. 온종일 일한 것은 아니지만 온종일 일한 대가를 받은 모든 일꾼들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자 오전 6시에 온 일꾼이 불평하지요. 불평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직역해 보자면 "내가 선한 것이 너의 눈에는 악하냐?"입니다. 성경은 주인의 호의를 악으로 보는 시기하는 눈에 대하여 꼬집고 있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순간, 오전에 합의한 내용은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자기도 은근히 더 받으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불평과 악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품삯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에 이르게 된 것이고, 주인의 호의와 관대함과 자비와 은총이 악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일꾼은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왜 주인은 계속 인력시장을 서성거리는 것일까요? 주인은 사람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모두의 생명을 동등하게 살리고 싶은 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품삯에 눈이 먼 일군은 다른 일군들과 자기를 구별하면서 더 많이 일한 만큼 더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남을 구별하며 분열을 일으키고, 모두가 일자리를 얻어 함께 삶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만약 이른 아침에 온 이 사람이 가장 먼저 한 데나리온을 받아서 갔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불평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서 저자는 일부러 첫 번째 온 사람이 가장 나중에 품삯을 받게 함으로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고,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았을 때, 카인이 동생을 진실로 사랑했다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했을 것인데 그만 살인에 이르게 된 그 비극이 오늘도 다른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정확한 계약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납니다. 일한 만큼 결실을 얻습니다. 공정하게 대우해야 하고, 그래야 정의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네 삶에는 은총이 있습니다. 덤으로 얻는 것이 있습니다. 되로 주지만 말로 받기도 합니다. 불행은 아무런 이유 없이 불현듯 찾아오고, 행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고, 용서하며 받아 줍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삶을 누리도록 허락합니다.
오늘 포도원 주인은 정의와 사랑, 일한 만큼 주어지는 계약 관계와 일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은총의 관계를 모두 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습니다. 맨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고, 이른 아침에 온 사람에게 열 두 데나리온을 주면 더 풍성한 호의를 베풀었다고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포도원에서 나는 이윤은 무한대가 아닙니다. 지금 주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안에서 최대한 모든 사람을 살려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른 아침에 일한 사람의 요구대로 다 주려고 했다면 포도원 전체가 망했을 것입니다. 적당한 품삯의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도 살리고, 계약 관계에 있는 노동자도 살리고, 일자리를 얻지 못해 서성거리며 근심에 쌓인 이들도 살려내려 합니다. 바로 미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를 고려합니다.
지난 일주일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에 오른 일로 온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영어로 만든 것이 아님에도 각본상과 작품상을 탄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고, 전 세계에 한국의 문화적 역량을 드러낸 쾌거이자 우리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입니다.
이번의 쾌거는 한국의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합작품이라는 해석을 보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유로운 상상력과 저항, 민주주의와 참 인간됨을 추구했던 영화계 사람들의 노력과 거기에 부응하여 재벌들이 영화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했기에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간 민주화 세력은 지금의 한국을 일군 산업전선에 있었던 이들을 박정희 독재정권에 아부하고 거기에 빌붙은 이들이라 폄하하고, 또 산업화 세력은 민주화 운동을 한 모든 이들을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어 왔지만, 역사의 강물은 이 둘 모두를 아울러 끌고 갑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가 아니라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봉 감독이 다닌 학교는 당시 사회학과가 인문대학에 속해 있었고, 통계와 과학적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딱딱한 사회학이 아니라, 사람의 냄새가 나는 인문학적 사회학이 주를 이뤘습니다. 봉 감독이 이런 풍토에서 공부를 했기에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21세기는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품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가며 이제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열 번이나 품삯을 바꿔치기 한 라반 밑에서 20년의 고생을 합니다만 역설적으로 그 고생이야말로 야곱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던 시기였습니다.
전혀 화해될 수 없을 것 같은 양쪽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녹아들어 갈 때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 집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문대골 목사님은 "양극의 용해"라는 말씀을 하셨고, 모름지기 새 시대는 융합의 시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람과 로봇, 남과 여, 아이와 어른,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가 서로 얽혀 세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럴 때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저것도 모두를 품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무엇보다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에 속한 그 어느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생(寄生)도 공생(共生)입니다. 기생하는 생물을 벌레 보듯 하지 말고, 함께 품어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갑시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사용하여,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능력으로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섭시다. 거기에 하나님의 높은 뜻이 있고, 미래가 달려 있고,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주님! 늘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지켜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험악한 세상, 주님의 은총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하루살이는 무척이나 고단했을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보아 주시고, 생각지도 못한 호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돌봐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 닮아 넉넉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남과 비교하여 더 가지려고 하지 말고, 이미 가진 것을 내어 놓아 더 큰 우리가 되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생명을 살리고, 사랑에 충만하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진정으로 소중한 가치를 깨달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게 하시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 어리석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어 생을 유지하게 하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 모두가 지금의 삶에 자족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쁨만 아니라 슬픔도 감사하며, 희망만이 아니라 절망도 감사하며, 가진 것만이 아니라, 없는 것도 감사하며, 승리만이 아니라 패배도 감사드립니다.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며, 대장간 쇠붙이는 불이 붙고, 두드려 맞을 때 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늘 우리를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몸과 마음도 드립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 귀한 예물들이 쓰이게 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베푸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정직하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 축도
그리스도의 온기가 여러분들을 치유하고, 그리스도의 눈이 여러분들을 응시하며,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힘차게 만들어 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이 설교문은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의 2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원고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