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 총무 이홍정 목사)는 지난 68회기 1차 정기실행위원회 총무보고를 통해 극우보수 기독교세력의 정치집단화로 인해 한국교회의 정치참여 문제가 시험대에 올라있는 상황을 직시했고 이에 교회가 4월 15일 총선에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기준삼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권면하는 내용을 담은 설교문을 지역교회에 배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본지는 NCCK가 각 회원교단의 건강한 목회자로부터 제공받은 4.15 총선 관련 설교문을 차례로 싣는다.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26장 36-39절
20세기 서구신학에 큰 영향을 준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와 예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무 교회도 '자기가 참 교회냐?'하는 문제에서부터 해방된 일은 없다. 그리고 아무 교회도 다른 교회들에게서 '네가 참 교회냐?' 하는 질문을 받는 의무에서 해방된 일이 없다."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하고, 거듭 확인해야만 할 경구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세계의 10대, 50대 교회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는 통계가 나올 만큼 양적으로는 급성장을 했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공신력은 완전 밑바닥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겠습니다.
영등포구에 위치한 당산푸르지오아파트에 이런 안내문이 계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안내문>
* 잡상인, 교회전도사, 절도범 등이 입주민의 뒤를 따라 무단으로 출입하고 있습니다.
*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수상한 사람이 아닌지 반듯이 확인하시고 의심스러울 때에는 관리실로 신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당산푸르지오아파트 관리사무소장
교회 전도사가 잡상인 또는 절도범과 동일한 수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또 오래 전부터 인터넷 상에서 '목사'는 '먹사'로, '기독교'는 '개독교'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완전히 사회적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전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질주의에 한국의 교회도, 사회도 함몰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은 증발되어 버렸고, 끝 간 데를 모를 탐욕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도구로 쓰여 져야 할 물질이 도리어 사람을 부리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되어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으뜸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조직이나 제도나 활동은 궁극적으로 사람 살자는 것이요, 사람 살리자는 것입니다, 교회도, 국가도 그 존재의의와 가치는 그 구성원들의 바른 삶을 돕는데 있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만이 아니라 힘없는 가녀린 생명들이 구김 없이 그 삶을 펼치고 누릴 수 있도록 섬기는 것이 교회의 선교이고, 국가의 책무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정부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이르러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마가 2:27)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사에 있어서 그 제도나 조직의 존재의의와 가치를 규정해 준 말씀입니다. 국가와 정부가 존재해야 할 까닭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까닭도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자신들의 권력이나 안위를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죽임의 문화로 얼룩져있습니다. 교회도 알게 모르게 그런 문화에 오염돼 사회적 불의에 대해 둔감해져 있고, 오직 물량적 교회성장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의 실상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분명히 맛 잃은 소금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9-13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기도문'으로 알려진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26장 36-39절은 이른바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로 알려진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두 본문을 아울러서 "예수의 기도, 우리의 기도"라고 제목을 잡았습니다.
복음서에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보도는 여러 곳에 있지만 기도의 내용이 밝혀진 것은 이 대목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기도'라고 일컫는 마태복음 6장 7-13절은 '우리의 기도'라고 이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이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내려주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도의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그 내용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기도의 핵심은 공히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구함'입니다.
기도는 그 기도하는 당사자의 희망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질(質)이 담겨집니다. 그가 기도하는 내용이 곧고 바르면 그의 삶은 그만큼 건전해 질 것이요, 반대로 그 기도가 탐욕으로 왜곡되면 그만큼 삶이 조잡해질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느님의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책무는 지금 여기,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인 이 세상에 하늘 뜻을 이룸에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한국의 교회가 그리도 열성적으로 드리는 기도는 과연 십자가의 쓴 잔을 앞에 놓고 혼신의 힘을 다해 드린 '예수님의 기도'와 합치되고, 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려주신 '우리의 기도'와 일치되어있습니까? 우리 자신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뉘우침이 요청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끊임없이 간구해야하는 그 하느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이고, 그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은 우리들 가운데 정의와 사랑이 작동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는 그 정의와 사랑이 실천됨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14-15, 24)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마태복음 6장 끝 부분에 보면 예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31,33)라고 하셨습니다.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는 하느님나라의 속살입니다. 정의와 사랑과 평화, 이 셋은 따로따로 역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셋이 서로 엉겨 맞물려 작동할 때 비로소 제 기능과 역할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정의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의 실천은 정의로워야 합니다. 이를테면 여기 강자와 약자가 있다고 칩시다. 약자가 강자에 의해 부당하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강자의 횡포를 막아 약자를 보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간단한 이치가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쉽지 않은 삶의 난제가 되어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정의는 폭력으로 나타날 위험이 있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거짓된 탐욕일 따름입니다. 정의와 사랑이 맞물려 돌아갈 때만이 평화가 가능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가장 사악한 동물들이 판을 치는 추악한 '동물의 왕국'이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당연히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가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여야 할 터인데, 오늘날 한국사회는 세속적인 성공과 물량주의가 유일한 가치요,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정의는 고사하고 국민의 생명도 아랑곳하지 않는 험악한 세상을 우리는 겪어왔고, 지금도 그 미망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어울려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울려 살자면 나눔은 필수입니다. 하느님은 공유(公有)의 대상입니다, 하느님을 사유(私有)하려는 것이 아담이 저지른 인간의 원죄입니다. 하느님이 지으신 세계, 하늘도 땅도 바다도,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초목과 짐승, 곡식과 열매들, 이것들은 한 결 같이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들이 공유해야 할 하느님의 자산입니다. 이렇듯 공유해야 할 것들을 혼자서 독점하고, 독식하려고 한다면 어울려 살아야하는 공생의 틀이 망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99대 1이라는 불평등의 사회구조에서 바른 삶을 기대하거나 누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든 이 불평등의 구조를 평등구조로 바꾸어내는 일에 나서야만합니다. 여기에 성장 못지않게 나눔 즉, 분배가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익(私益)과 공익(公益)이 충돌하는 경우를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올곧은 삶은 사익에 매몰되지 않고 공익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뜻대로 하지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라고하신 '예수님의 기도'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일러주신 '우리의 기도'와 합치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말처럼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그 천심(天心)이 들어나서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는 경우, 사익 아닌 공익적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솟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현대사는 수난의 질곡으로 얼룩져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질곡들을 극복해 낸 승리의 역사를 반면에 지니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 지배와 광복 후 75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는 동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 하에서 신음해야만 했지만 우리 민족과 국민은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일제하 3.1혁명, 60년의 4.19학생혁명, 79년의 10.26과 80년의 광주민중항쟁, 87년의 6월항쟁 그리고 1917년으로 이어진 촛불혁명은 우리 속에 깃들어 있던 천심의 발로였습니다. 일제 식민지배를 거부한 3.1혁명을 비롯하여 촛불비폭력민주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들이 이루어 낸 정치적, 사회적 변혁은 세계인들이 놀라고 부러워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기필코 천심이 깃든 민심의 발로인 촛불정신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촛불혁명은 반듯이 지속되어야 하고 성공시켜야 합니다. 이번만은 반서민적, 반민주적, 반민족적, 반평화적 매판세력들에게 반전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평화의 세상을 이룩하는데 지혜와 뜻, 힘을 모우고 쏟아야만 하겠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번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그야말로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책임적으로 살았습니까?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깃든 민주개혁을 위해, 평화가 넘실거리는 민족화해를 위해 얼마나 관심하고 인내하며 노력했습니까? 방관자의 위치에서 늘 무책임한 비난과 비방, 냉소만을 일삼거나,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하겠습니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냉소적 태도, '그저 잘되겠지' 하는 방관적 태도, '그래봤자 소용없어' 하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로는 결단코 민주개혁과 민족화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소명과 과제를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하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하십시다.
순자(苟子)의 경구(驚句) 하나 소개합니다.
先義而後利者榮 先利而後義者辱(의로움을 앞세우고 이익을 뒤로 미루는 사람은 영예롭고, 이익을 앞세우고 의로움을 뒤로 미루는 자는 치욕을 받는다.-苟子 榮辱篇 一中)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예수의 기도' '우리의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