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4장 13-21절, 시편 119편 1-8절, 마가복음서 10장 46-52절
[모이는 예배와 얼굴 반찬, 계속되는 코로나 19]
우리 노회의 한빛교회 홍승헌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쓰신 목회서신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영양가 높은 반찬이 '얼굴반찬'이라고 하는데, 매주 반갑게 만나던 그 얼굴들을 보지 못하니 기운이 떨어지고 마음이 헛헛한 건 당연한 것이겠지요." 저도 지난 두 달간 우리 생명사랑 가족들을 얼굴을 보지 못하다가, 지난 수요일 다시 모여 기도회를 하는데, 얼마나 반갑고 힘이 났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다시 모이는 예배를 합니다. 온라인 예배도 당분간 병행합니다.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와도 온라인 예배 또한 계속 진행할 생각입니다.
코로나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만나고 얘기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함께 섬기며,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함께 하니 더욱 좋고, 거룩한 영의 기운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되니 더욱 끈끈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를 하였지만, 그것이 단절이나 고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만나니 더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 관점에서 지금도 코로나 19 상황은 지속되고 있고, 우리 사회가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기에 이 모든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필리핀 합동결혼식 마스크 키스 사진) 따라서 교회도 이 상황에 적응해야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누룩과 같이 세상의 질적 변화를 가져와야 하고, 동시에 소금과 빛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한국교회에 드러난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세상과 불통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죄악 가득한 곳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구분 짓는 과거의 생각에 머물러,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너무 소홀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집단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했던 신천지나 민주시민의 상식을 무시하고 개교회의 특수성만을 강조하여 엇나간 행동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교회들의 모습은 분명 한국교회 전체가 깊이 있게 반성해야할 지점입니다. 신천지나 몰상식한 교회들이 바이러스라면 그 숙주 역할을 한 것이 기존의 교회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코로나 19라고 하는 지난 두 세 달간에 벌어진 초유의 사태에 대해 우리 생명사랑교회를 비롯해 한국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있듯이, 준비하는 자에게만 내일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다시 온전히 모일 수 있게 되면, 전교인 토론회라도 한 번 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의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수요일에 수요사경회 뿐만 아니라, '카이로스'라는 유튜브 방송에도 출연해서 오늘 설교에서 할 이야기들을 미리 나누었습니다. 최종 편집본이 나오면 전교인 카톡방에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구원 신앙에서 창조신앙으로]
코로나 19를 통해서 인류가 깨달은 가장 확실한 것은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일구어온 물질문명의 추구는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지구화, 도시화, 금융화에 기반한 소비 자본주의 중심의 경제와 사회 건설은 일시에 인류를 고통의 구렁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인간은 사람만이 아니라 지구 생명체 전체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모든 산업분야를 포함하여 우리들의 삶의 방식도 바꾸어야 합니다. 생태계 파괴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앞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도 기존의 '구원' 중심의 신앙에서 '창조'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난 100여년의 한국개신교 선교와 전도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고, 따라서 죄와 믿음을 강조하면서 내세중심주의로 흘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내세보다 현세가 더 중요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 마스크를 써야 하고, 숨쉬기조차 불편한 일들이 일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들을 에덴에 살게 하시고 모든 생명체를 돌보라고 했던 명령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합니다. 기존의 구원신앙이 나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창조 신앙의 강조는 모든 생명체를 함께 돌보자는 것입니다.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종교인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구를 위한 녹색 발걸음을 더 힘차게 내디뎌야 합니다.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을 줄이기 위해 빈번했던 해외여행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저탄소 제품을 사용하고, 에어컨도 적정하게 사용해야겠지요. 일상의 작은 실천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도 이제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이베이, 코카콜라, 이케아 등 세계 각 분야의 시장을 이끌어 가는 기업들이 주요 멤버로 가입한 모임, RE 100(Renewable Energy 100%)이 있습니다. RE 100은 사업에 사용되는 전력을 100% 재생가능에너지로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기업들의 모임이고, 2018년까지 무려 137개의 세계적 다국적 기업들이 이 모임에 소속돼 있습니다. 코로나 19 이전에도 세계의 유수 기업들은 친환경 시스템을 갖춰야만 살아남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적 가치 사슬의 변화 속에서 한국교회만의 장점을 찾으라]
코로나 19를 통해서 또 깨달은 것은 이제 서구 유럽이나 미국 중심주의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적 가치 사슬(Global value chain)의 변화가 왔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전 세계에 우뚝 서게 될 지도자가 누구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중심과 주변이 뒤집어집니다. 최근 한국은 야구와 축구를 무관중 경기로 시작했고, 전 세계 사람들이 그 경기를 보고 흥분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 야구 중계권을 사 갔다는 사실이 정말 낯설지만, 이것이 일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한국도 예전처럼 벤치마킹(benchmarking)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맞는 것을 직접 만들어야 하고, 이전에 없던 것들을 창조해야 합니다. 창조에는 상상력과 모험, 그리고 유연성이라는 가치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참신한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성과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에서 하는 것들을 숱하게 베껴왔습니다. 수입신학과 수입신앙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우리 한국 실정에 맞는 자기만의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를 베낄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형편을 살펴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우리만의 고유한 생명사랑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모두가 그것을 함께 일구어 갈지 저와 여러분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와 디지털 교회의 영성]
코로나 19 때문에 먼 미래의 일로 여겼던 4차 산업혁명의 변화들이 가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온라인 수업을 해야 하고, 우리는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비대면, 비접촉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들의 신앙과 영성을 키워갈지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함께 모여서 소리 높여 찬양하고, 뜨겁게 통성기도하고, 교회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오순절파 교회의 은사 중심적 예배와 집회는 앞으로 여러 면에서 제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열정적인 예배를 통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추구했던 한국 교인들은 앞으로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00년 그리스도교 전통은 모든 생명체 안에, 그리고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생명의 근원으로 존재하시고, 힘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또 다른 영성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한 달에 한 번 하는 떼제기도회가 그런 전통 중에 하나입니다.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요함 속에서 세상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훈련은 감정의 카타르시스보다 더 깊은 영성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훈련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 되면 기계를 다루기 어려운 노인 세대의 불편함이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는 어른들을 위해서 디지털 기계 사용방법을 알려 드리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무인 편의점이 늘어나고, 무인 계산기가 늘어가는 이 때, 햄버거 하나 제대로 시켜서 먹을 수 없는 날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교회 공동체가 함께 도울 수 있습니다. 기계 문명으로부터 소외된 분들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할 것입니다.
[물리적 거리 두기의 일상화와 새로운 지혜]
우리는 지난 두세 달 동안 물리적 거리두기를 해 왔습니다. 사람마다 2m 이상 간격을 두어야 하고, 회식자리도 줄어들었고,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식당이나 공원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가 꺼려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할 뿐만 아니라 불안을 가증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외로움마저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두와 단절되거나 고립된 것은 아닙니다. 가족과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친한 사람들끼리는 어떤 문제없이 이전의 관계를 유지합니다. 인류는 낯선 사람하고도 크게 갈등이나 다툼, 경계심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코로나 사피엔스, 코로나 시대의 인류는 이제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1m 이내에 있어도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해서 사람마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해야 하고, 거리 조절을 잘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사람사이의 거리를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그것은 친밀한 거리(0-45cm), 개인적 거리(46-120cm), 사회적 거리(1.2-3.6m), 공적 거리(3.6m 이상)입니다. 앞으로 인류는 이런 거리를 잘 살피면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는 또 다른 방식의 안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믿고 신뢰할 수 있도록 교인들 스스로 훨씬 더 나은 인격을 수양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조심하고, 같은 교인을 대할 때도 무례하지 않게, 존중해야 합니다. 치근덕대거나 끈적거리는 관계가 아니라 깔끔하면서도 깊은 신뢰를 형성하는 좋은 관계 맺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사람들이 된다면, 세상 사람들은 부르지 않아도 우리 곁에 함께 있고 싶어 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를 잘 인도해 줍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길을 성실하게 지키라고 합니다. 주님의 모든 계명들을 낱낱이 마음에 새기면,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뜻을 담은 성경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꼼꼼히 자세하게 읽고, 목사와 신학자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훈련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 동영상들도 너무 좋은 내용들이 많습니다. CBS가 하는 '잘 믿고 잘 사는 법' 줄여서 잘잘법, 그리고 조믿음 목사의 '바른 미디어', 백소영 교수의 'so young한 인문신학', 김학철 교수의 '좋은 예배', 평화나무의 '수요사경회'와 '카이로스' 등등 내용도 좋고 깊이 있는 신앙/신학 강좌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소의 훈련이 있어야 이단과 사이비에 속지 않고, 위기의 순간에도 굳건하게 견딜 수 있습니다. 지혜를 하루아침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신뢰도 마찬가지입니다. 꾸준히 노력해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지혜를 여러분 각자가 습득하시길 빕니다.
[국가의 신성화와 교회의 역할]
한국인들은 이번 코로나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믿음직한 국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한국 전쟁 당시 도망갔던 이승만 정권,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군사정권, 국민을 속여 자신의 배를 불렸던 부도덕한 정권들이 득세하던 그 시절, 세월호 사건처럼 억울한 죽음들을 목격해야 했던 지난 세월을 뒤로 하고, 처음 좋은 국가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나 종교집단이 해왔던 사회복지 영역을 국가가 거의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TV 드라마나 영화, 온갖 엔터테인먼트 산업들이 일반인들에게 기쁨을 주고 재미와 즐거움을 줍니다. 사회가 좋아지면 질수록 교회나 성당은 텅 비어갔던 서구 유럽의 전철을 우리 사회도 밟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런데 바로 이제야말로 종교가 종교 본연의 힘을 발휘할 때입니다. 종교야말로 세상은 줄 수 없는 깊이 있는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제와 봉사,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런 것들을 국가가 맡아서 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 물음에 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국가가 아무리 잘해도 사각지대가 있기 때문에, 그 때 교회는 더 어렵고 소외되고 힘든 이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 일은 매우 수고스럽고 자기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깊이 만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사랑과 은혜의 생수가 넘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는 바로 더 깊은 진리를 깨우치고, 그것을 삶에서 녹여내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존재와 행위에서 품어 나오는 내공과 품격이 남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마가복음서의 주인공은 여리고의 '눈먼' 사람이자 '거지'인 바디매오입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육체적 한계를 나타냄과 동시에 정신적 무지를 뜻합니다. '거지'라는 것은 남에게 빌어먹고 산다는 말로,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누구나 인간은 건강한 몸과 올바른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길 원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데, 지금 바디매오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자신이 구걸하던 그 길로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평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다급하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든 다윗 왕과 같이 모든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디매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최상의 존칭어로 예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가던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소리를 지르지만, 주변 환경은 바디매오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의 심정도 모르고 바디매오를 꾸짖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런 장애물이나 훼방꾼을 만나게 되면 흔히 기가 죽고, 풀이 죽기 마련입니다. 혹시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더 주눅이 들고 "나는 안되는구나!" 하면서 자포자기하기도 쉽습니다. 과감하게 나가지 못하고 주춤주춤 하다가 뒤로 물러서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 바디매오는 다릅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데다가 거지의 신분이었지만 장애물 앞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는 뚝심과 꿋꿋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렇게 해서 바디매오는 이제 훼방꾼들을 주춤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들의 기를 꺾어 놓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가 예수의 귀에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한마디에 훼방꾼들이 전부 바디매오를 돕는 사람들로 바뀝니다.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디매오가 예수를 불렀지만, 이제는 예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디매오의 열정은 상황을 바꾸었고, 이것은 바디매오가 새로 거듭나는 계기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예수님으로부터 불림을 받을 때, 우리는 이제 주님께로 '아멘'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눈을 뜨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알았습니다. 제대로 볼 줄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올바르게 답합니다. 인생을 대충 산 사람은 이런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물을 때, 우리에게 가장 적실하게 필요한 그것을 답할 줄 아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그걸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딴 곳으로 가지 않고 예수를 따라 나섭니다. 그가 눈을 바로 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따라간 길은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예고하셨던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바로 그 십자가의 길을 갔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처럼, 그동안 우리 모두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은 잘못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편함과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구생명체들을, 또 남들을, 이웃들을 존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서 온 회중이 제사를 드리며 함께 책임지려고 노력하듯, 이제 우리도 코로나 19를 대하며 함께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를 구원할 우리의 믿음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시는 오늘의 활동이 내일의 교회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 길에 어느 누구하나 빼지 말고 함께 동참하시길 빕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자녀들 모두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생명의 근원이시며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 주님께서는 우리를 소금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진정으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어려운 시절 더욱 빛나는 사람들이 있듯이,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 풍랑의 항해를 무사히 건너게 하여 주소서. 어느 누구도 낙오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보듬게 하여 주소서. 바다를 꾸짖는 예수님의 믿음을 본받게 하시고, 새롭게 눈을 떠서 우리 모두가 예수께서 가시는 그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소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기쁨만 아니라 슬픔도 감사하며, 희망만이 아니라 절망도 감사하며, 가진 것만이 아니라, 없는 것도 감사하며, 승리만이 아니라 패배도 감사드립니다.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며, 대장간 쇠붙이는 불이 붙고, 두드려 맞을 때 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늘 우리를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몸과 마음도 드립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 귀한 예물들이 쓰이게 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님을 부르고, 다시 눈을 떠서, 주님이 가신 길을 당당하게 걸어갑시다.
* 축도
여러분에게 좋은 친구가 있기를, 또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위대한 사랑과 따뜻함 그리고 느낌과 용서가 있는 여러분의 영혼 안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기를, 그 여행길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여러분 안에 있는 부정적이고 차갑고 냉정한 것을 바꿀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주님께서 주신 지혜로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코로나 19로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이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이 설교문은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의 5월 10일 어버이 주일예배 설교 원고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