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거리 두기를 시행한지 거의 석 달이 되어 온다. 매주 만나던 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 그림자라도 된 것일까? 불쑥불쑥 외롭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하다가도 발걸음을 멈추고 하릴없이 식물에게 눈길을 준다. 아프고 쓸쓸한 인간사와 무관하게 자기 때를 살아가는 푸나무들의 늠연한 자태가 사뭇 당당하다. 불꽃처럼 피어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지만, 꽃 시절이 지나간다 하여 는적거리지 않는다. 때가 되면 시들어 땅에 떨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 그 홀가분한 순환을 보면서 유정한 나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어디에도 마음 부릴 곳 없어 강변을 걸으며 소리를 지르거나 울었다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지 못한 미안함이 크다. 삶은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이런저런 일에 시달리면서 마음의 평정이 조금씩 무너지다가 마침내 어떤 일을 계기로 하여 폭발할 때가 있다. '무시당했다', '외면당했다', '거절당했다'는 생각이 켜켜이 쌓이고, 그것이 결국 분노로 전환될 때 우리 삶을 지탱해주던 이성과 믿음의 발판도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괴감이 찾아온다.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인정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부끄러움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세상의 권력자들이나 제도적 불의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못하고 사소하고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 자기를 돌아보며 자조적으로 말한다.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니. 이 얼마나 철저한 자기반성인가. 마침내 시인은 절규하듯 말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정말 얼마큼 작으냐...". 자기의 작음에 대한 이 가슴 절절한 노래가 은결든 우리 가슴을 어루만진다. 도저한 정신의 높이를 유지한 채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간다.
따지고 보면 넘어짐과 절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넘어져봐야 자기의 약함을 알고, 절망에 빠져 봐야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으니 말이다. 불교가 강조하는 무(無) 자를 '없다'는 의미의 명사가 아니라 '지운다'는 의미의 동사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어느 분의 글을 읽으며 무릎을 탁 쳤다. 넘어짐과 절망은 거짓된 '나'를 지우고 참된 '나'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안내인일 수 있다. 지우고 또 지운 끝에 남는 것은 경(敬)이다. 이스라엘의 지혜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뜻이었다. 자기를 지우지 않고는 경외할 수 없고, 경외하지 않으면 삶의 궁극을 통찰할 수 없다.
오직 경외하는 사람만이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아차린다. 만나는 사람들을 그 외적 조건에 따라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게 된다.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 속에 깃든 초월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경외하는 사람의 특색이다. 경외하는 사람은 또한 겸손한 사람이다. 서양의 수도원 운동을 정초했던 베네딕도 성인은 겸손은 건물의 돌들을 서로 지탱시켜 주는 시멘트와 같은 것이라면서 "겸손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은 채 그냥 거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 그는 분열을 극복하는 사랑의 담지자로 우리 가운데 머문다.
메마름을 견디고, 외로움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를 통과해가는 시간이 던지는 질문에 창조적으로 응답할 때 우리 삶은 조금씩 무르익어 가지 않을까.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