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대전국립현충원은 부슬부슬 비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궂은 날씨에도 국립현충원 정문 앞은 긴장감이 흘렀다.
지난 10일 별세한 고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을 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간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같은 대립은 15일 오전 국립현충원에서 열릴 안장식을 앞두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광복회 대전지부, 독립유공자유족회 대전지회,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 대전지역 독립운동 유공자 단체와 대전충청권 지역시민단체 등은 안장식 전날인 14일 국립현충원 안장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이 성명엔 대전NCC 정의평화위원회, 성서대전, 대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 개신교 계열 단체도 참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고 백 장군의 친일행적을 언급하며 국립현충원 안장을 '날벼락'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고 학살한 친일앞잡이를 한 곳에 모신단 말인가. 우리는 국립묘지 어느 곳이라도 친일파들의 안식처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백선엽은 국립묘지가 아니라 오히려 야스쿠니 신사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규탄했다. 이어 21대 국회를 겨냥,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허용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국립묘지법이 정의롭게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안장식 당일에도 규탄 성명은 이어졌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아래 유족회)와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는 안장식 당일인 15일 낸 입장문에서 "현충원의 근거가 되는 국립묘지에 관한 법률에는 국가나 사회를 위해 희생, 공헌한 사람을 안장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며 "외세 하에선 조국 독립을 방해한 인물, 전쟁 시기엔 자국 국민을 학살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 어떻게 현충원에 묻힐 수 있단 말인가. 전쟁범죄자의 책임을 묻기는 커녕 전쟁범죄 혐의가 있는 자를 기리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보수 진영도 지지않았다. 우리공화당, 재향군인회 등 보수 단체는 진보성향 시민단체에 맞서 맞불집회를 열었다. 그러면서 고 백 장군 국립현충원 안장에 반대하는 진보단체 활동가를 향해 거침없이 '북한 김정은 사주를 받은 빨갱이'라고 매도했다.
반성 없었던 백선엽, 영웅 추앙 이유 없다
고 백 장군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은 새삼스럽지 않다. 또 어디에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그의 행적은 180도 엇갈린다. 여기서 그간 오고간 논란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있다.
고 백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 <군과 나> 일본어 판에서 이렇게 적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었기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 하더라도 독립이 빨라졌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 주의주장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군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마음으로 토벌에 임하였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두 번째 문장,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 하더라도 독립이 빨라졌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쉽게 풀이하면 자신의 간도특설대 복무 이력이 한국의 독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고 백 장군이 영웅으로 추앙 받는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활약상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회고대로라면 한국전쟁 당시 활약상 역시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저 한 명의 군인으로 사명을 다했을 뿐이고, 따라서 우리는 고 백 장군을 영웅으로 추앙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참 어처구니없는 건, 이 대목은 한국어판에는 없고 일본어판에만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한 줄 한 줄에 군인으로서 확신이 묻어남에도 왜 한국어판에는 싣지 않았을까? 그나마 한 점의 부끄러움이라도 남아서 그런 걸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 백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을 두고 눈앞에서 갈등이 벌어지는 광경은 그저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의 과거 행적에 붙는 의문부호 때문이 아니다. 고 백 장군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은 정리되어야 했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를 자처하지 않는가? 이 정부에서 친일행적 논란이 이는 한 명의 퇴역군인을 어디에 묻을지를 두고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은 과히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게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민주당은 21대 국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자의 국립묘지 ‘안장금지'와 ‘안장된 자의 이장'을 추진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와중에 이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을 올린 고 백선엽 장군의 현충원 안장에 대해 민주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광복 후 이 나라는 친일세력이 지배계층으로 공고히 뿌리 내렸다. 그래서 친일 적폐 청산을 위한 법과 제도를 내놓아도 저항이 만만치 않다. 국립묘지법 개정안 역시 반발은 없지 않을 것이다. 혹시 민주당이 이 같은 반발을 의식해 고 백선엽 안장 논란에 침묵을 지킨 것인가?
이런저런 논란을 뒤로 하고 고 백선엽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파란만장한 한 세기를 살아간 한 퇴역군인이 던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