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38:1-7, 베드로전서 5:7-11, 마태복음 6:31-34 -
알프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13일간이나 방황하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일 12시간을 필사적으로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을 잃은 지점을 중심으로 불과 6km 안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는 겁니다. 자기는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같은 장소를 뱅뱅 맴돌았습니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 앞이 보이지 않으면 -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20m를 걸으면 약 4m의 간격이 생기고, 100m를 가게 되면 결국 원을 그리고 제자리에 돌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윤형 방황'(circle wandering)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윤형 방황의 버릇이 있습니다. 본인은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멀리서 보면' 어느 한 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뱅뱅 맴돕니다. "산은 산이요, 강은 강이다"라는 화두(話頭)로 유명한 고(故)성철 스님의 호는 퇴옹(退翁)인데 그 뜻은 '뒤로 물러나는 늙은이'입니다. 이 호의 뜻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앞뒤도 모르면서 앞으로만 가거든. 그러니 내가 물러서야지." 타(他)종교인이지만 인생을 꿰뚫어 보는 깊이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달립니다. 앞으로 달립니다. 바삐 갑니다. 하지만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멀리서 보면 결국 같은 자리를 맴도는 제자리 방황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지금 어디를 가고 있습니까? 어디를 그리 바삐 달려가고 있습니까? 앞으로 가고 있습니까?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혹 제자리를 맴도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시대는 '속도'(速度, speed)를 숭상하는 시대입니다. 사실 '스피드'라는 말 만큼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말도 없습니다. 영어권에서 스피드는 마약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빠른 것, 그것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고 찰나적인 환희를 주는 마약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현대인은 빠름을 통해 자아로부터, 또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장편 소설 <느림>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이미 이 시대 스피드의 의미에 관해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다. 끊임없이 발바닥의 물집들을, 가쁜 호흡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자 모든 게 변했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놓이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아니 속도의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쿤데라는 속도의 문제를 '느림과 기억' 그리고 '빠름과 망각'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만일 길을 가다 문득 무언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기계적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늦춥니다. '생각해내기 위해서'입니다. 느림과 기억, 느림과 생각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길을 가다가 자신이 겪은 어떤 끔찍한 일이 떠오른다고 합시다. 그땐 어떻게 합니까? 그 자리에서 빨리 멀어지고 싶은 듯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함입니다. 빠름과 망각 역시 하나라는 말입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는 한자성어도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을 타고 빨리 달리면 산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빠르면 잊게 됩니다. 빠르면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빠름은 망각입니다. 유독 스피드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은 빠름을 통해 자아로부터, 또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문명의 속도에 대한 집착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은 아마 로켓일 것입니다. 로켓은 지구의 중력권을 벗어나는데 필요한 초속 11km 이상의 속도를 내는 기계입니다. 미국 로켓의 아버지 로버트 허칭스 고다드(Robert Hutchings Goddard, 1882-1945)가 1930년에 시속 800km, 고도 20km의 현대적 로켓 발사에 성공한 이래 인간의 '탈(脫) 지구' 염원은 실현되는 듯 보입니다. 이제 로켓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 공상의 세계로 가는 가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마침내 인생과 문명 그리고 역사의 속도를 넘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지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인간의 속도는 상대화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광활한 우주 안에서 인간의 스피드는 보잘 것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차비도 내지 않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탈 것에 승차해 있습니다. 그 탈 것은 바로 지구입니다. 제가 말씀을 시작한 지 약 7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지구는 우주 공간 1만2천8백km를 질주했습니다. 서울에서 뉴욕 정도의 거리입니다. 지구는 시속 약 10만km의 속도로 매년 약 9억km의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내일 바로 이 시각 지구는 지금 우리가 있던 지점에서 약 2백5십만km 나아가 있을 겁니다. 서울에서 뉴욕까지의 거리의 2백5십만 배입니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약 1억5천만km입니다. 빛으로 8분 이상을 달려야 도달하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6개월 후 우리는 지금 보이는 태양의 정확히 반대편 1억5천만km 지점에 가 있을 겁니다.
현대문명의 스피드는 이 거대한 우주 앞에 상대화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공간과 시간 앞에서 인간의 빠름은 상대화되고 맙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무한한 우주의 시공간 안에서 '멀리서 보면' 알프스에서 조난을 당한 어떤 사람처럼 비슷한 지점을 이리저리 맴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서는 인간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이야기합니다. 시편 90편의 기자(記者)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면서, 그런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니]...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음]"을 깨닫습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고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유한한 존재인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하면서 시인은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실로 성서는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히브리서 1:3), 혹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히브리서 8:1)라고 증언합니다. 오늘의 교독문처럼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습니다. 또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며 "바다도 그의 것"으로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습니다(시편 95:3-5). 우리가 애창하는 오늘의 찬송가 79장("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이 바로 이 구절에 기초해 지어졌습니다.
미국이 저명한 우주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E. Sagan, 1934-1996)은 - 과학적 무신론자로 알려졌으나 - 1985년 영국 글래스고대학에서 열린 <자연신학에 관한 기퍼드 강연>에 초대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선 그는 많은 신학자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조각상(彫刻像)을 아주 크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매우 작게 느끼도록 하려 한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었다면, 그들은 굳이 허접한 우상들을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작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다면 그냥 하늘을 올려다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교적 감성, 즉 경외(敬畏, awe)의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최상의 방법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임을 역설했습니다. 실로 경이(驚異, wonder)야말로 예배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우리 은하 내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그런 별들의 수는 대략 4,000억 개이며 태양은 그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신학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하에서도 일종의 산간벽지에, 그야말로 촌구석에...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은하가 유일무이한 은하도 아닙니다... 은하수 너머에 있는 외부 은하의 수는 최소한 수억 개, 어쩌면 수백 억 개에 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고 평생을 별을 연구한 세이건은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한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학자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서양 신학이 가진 일반적인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너무나도 작게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이 신은 작은 세계의 신에 불과하고, 은하의 신도 못 되며, 나아가 우주의 신이 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존재입니다."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서 영원히 갈등할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우리는 오히려 성서가 이미 오랫동안 힘주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학기 한 학생이 저의 수업에서 제출한 에세이를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한 학기 전체를 온라인으로 수업하느라 한 번도 직접 얼굴도 보지 못한 학생이지만 '과학신학' 강의를 듣고 자신의 성찰을 이렇게 써서 냈습니다. "과학신학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이 세계와 역사의 스케일(scale)에 대한 재조정이다. 그동안 내게 세계란 지구상의 나라들이었고, 역사란 인간의 역사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건 엄청난 오해였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착각이었다. 세계는 1천억 개의 은하계가 존재하는 광활한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역사란 137.5억 년의 우주 역사로 그 개념이 정정되어야 하는 거였다! 이렇게 세계와 역사에 대한 개념과 스케일이 달라지니, 인간이 다르게 보인다. 인간은 정말이지 이 세계전체에서 변방 중의 변방에 있는, 그것도 아주 작은 별에 살고 있는 점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한평생이라는 인생은 우주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이다.... 이 사실은 참으로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곧 내가 더 이상 잘난 존재가 아니어도 되고, 대단한 의미가 있는 삶을 살거나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 마음은 지금 참 가볍고 평안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비극은 인간 각자가 모두 자신이 잘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우열을 가리고,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폭력과 불법을 사용해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투쟁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본래 가치를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남들보다 잘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우주라는 스케일에서 바라보면 점과 같은 인간 존재가 다른 인간보다 더 잘난다고 한들, 그게 뭐 그리 의미 있겠느냐 말이다.... 내 발목에 항상 채워져 있던 무겁디 무거운 쇠사슬과 쇳덩이가 풀려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그냥 내가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은 거다.... 죽기 전에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거다.... 평범한 '일상'만을 살다 죽어도 되는 거다. 하나님은 절대 뭐라 하지 않으신다.... 마치 항상 우등생이어야만 사랑해 주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면서, 이번에 또 1등 못하면 어쩌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해방감이라고 할까? 그냥 내 존재만 있어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준다." 이 학생은 - 본인은 모르지만 - 이번 제 수업에서 1등을 했습니다. 여러분, 힘드실 때 가끔 하나님 지으신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말씀입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으냐....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기 38:2-7). 욥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재난을 겪습니다. 친구들의 위로도 욥의 고뇌를 풀어주지 못합니다.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마침내 욥도 하나님 앞에 항의합니다. 하지만 욥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우레와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를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 성좌를 묶은 띠를 풀 수 있느냐? 네가 철을 따라서 성좌들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큰곰자리와 그 별 떼를 인도하여 낼 수 있느냐?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욥기 38:31-33, 새번역) 욥의 고통은 이 거대한 우주 앞에서 그 힘을 잃습니다. 유한(有限)이 무한(無限)에게 삼킵니다. 시간이 영원 앞에서 제 한계를 깨닫습니다. 영원과 시간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영원은 초(超)시간이며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시간이 거기서 솟아납니다. 그것은 무한하고 숭고(崇高)한 것입니다. 그 앞에서 시간과 유한은 다만 환희(歡喜)의 찬송을 부를 뿐입니다. 오늘의 개회찬송으로 부른 찬송가 66장("기뻐하며 경배하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제4악장 <환희의 송가>에 기초한 것인데, 이 환희의 찬송은 바로 욥기 38장의 숭고한 깨달음에 기초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그것의 주추를 세우시며, 그 모퉁잇돌을 놓으실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기 38:7)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3장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1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새번역)라는 뜻입니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때,' 즉 '주님의 시간'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다"(전도서 3:17)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혹은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이루신다고 증언합니다(이사야 4:4, 60:22, 66:18, 예레미야 23:5, 다니엘 7:22, 하박국 2:3). 신약에서도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맨 처음 하신 말씀 역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가 1:15)였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오자 예수님은 "때가 왔다"(마태 26:45, 마가 14:41), 혹은 "때가 이르렀다"(요한 17:1)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에베소서 1:9)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공동번역)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에베소서 1:10, 공동번역)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에베소서 1:11, 공동번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며(고린도전서 4:5)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잠언 16:9)라고 했습니다. 급히 해내려고 바삐 움직이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를 썼습니다. 여기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발로 밟는 모든 땅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은 한 농부(바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흠은 눈앞에 보이는 땅을 한 치라도 더 갖고 싶은 욕망에 온종일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결국 그가 가진 땅은 자신의 몸이 누울 수 있는 고작 2m 남짓의 땅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흠'처럼 달립니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더 누리기 위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달리고 또 달립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또 뜁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삶은 더욱 피폐해집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도 모르는 이 무작정의 달리기 속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세계는 무참히 파괴됩니다. 마침내 바이러스와 기후변화로 지구 최후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과학자들의 섬뜩한 경고가 들려옵니다. 이제 우리는 멈춰 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미 너무 멀리 왔습니다. 그나마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서예가이며 음악가인 황진이(黄真伊)의 유명한 시조가 떠오릅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쉬이] 감을 자랑 마라." 푸른 계곡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정신없이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오직 달려가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 다른 목적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마냥 흘러만 가고 있습니다. 푸른 숲, 웅장한 벼랑, 볼만한 경치도 많건만 고개를 푹 숙인 채 오직 달리기만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는 다시 이렇게 노래합니다.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밝은 달이 적막한 산에 가득 차니 쉬어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달려가는 시냇물은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사실 그날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하늘에는 쟁반 같은 달이 가득 차서 온 숲과 봉우리와 계곡을 신비한 푸른빛으로 깊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렸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선생도 그의 <철리시>(哲理詩)에서 '멈춤'[止]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천지 만물이 저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화담은 '그침'(止)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침은 부자연스러운 욕망이나 자기중심적인 마음 그리고 작위적인 태도를 버리고 절제와 균형을 따를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화담 선생은 인간의 '그침'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행함에 그치는 것'(止行)이고 다른 하나는 '그침에 그치는 것'(止止)이라고 말합니다. 행함에 그치는 것은 '행할 만할 때 그치는 것'이고, 그침에 그치는 것은 '그쳐야 할 때 그치는 것'입니다. 화담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는 '지지'(止止), 즉 그침에 그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쳐야 할 때입니다. 탐욕과 모방과 시기와 경쟁을 그쳐야 할 때입니다.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바트'도 단순한 쉼이 아니라 '그침'이고 '멈춤'입니다. 그침에 그치는 것이 안식입니다. 인생은 결코 먹고 소유하고 싸우다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물처럼 흘러가면서도 달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 다시 말하면 사랑을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소망을 꿈꾸고, 영원을 사모하는,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영적 차원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속도로 살아야 합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가장 먼저 선두그룹으로 치고 나온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경우는 퍽 드뭅니다. 왜냐하면 그 선수는 자기의 속도에 충실하지 못하고 다른 선수의 속도에 편승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주 끝까지 최고의 스피드를 유지하는 지구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페이스를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5G"의 빠른 속도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입니다. 고속의 시대일수록 자기만의 속도가 중요합니다(정호승, "나만의 속도에 충실하라"). 자기만의 호흡으로, 자기만의 속도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른다는 것은 미래를 현재에 가져와 미리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 하나님의 경륜 안에 그가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두름은 불신앙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을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 6: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아닌 내일이 자신을 염려합니까? 주님은 일부러 주어를 바꾸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우리가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 6:32)고 하셨습니다. 궁핍보다 더 서러운 것은 아무도 그것을 몰라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 아픔을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자애로우신 하나님이 내 슬픔에 공감하신다는 이 말씀이 오늘은 정말 위로가 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 했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역대하 20:20)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시편 32:10)고 약속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이사야 12:2)고 이사야 예언자는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경륜을 의지하십시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전도서 3:1)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시간 안에 사십시오. "때가 이르매" 거둘 것입니다. 성서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저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시편 95:7)이라고 선포합니다. 저 높이 계시는 온 우주의 창조자가 나를 돌보시는 친근한 목자가 되신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분이 내 아버지가, 내 목자가 되신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찬송가 568장("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의 가사처럼, "내게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나와 함께 하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지금 "잠깐 고난을 당한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베드로전서 5:10)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로 하여금 땅에 살아도 진리 안에서 이기고 이기게 항상 능력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