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자: 김근주(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의 세계는 오늘날의 세계와 다르다. 인구의 대부분이 작은 시골이나 마을에 살았으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그 업은 대대로 이어졌으며, 노예제도가 있었고, 여성은 가정 내에서의 역할과는 상관없이 아무런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가장이 모든 것을 좌우하였다.[1] 오늘날 도시 중심의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구약과 신약의 본문에서 오늘날 우리를 향한 말씀이나 지침을 찾는 것은 결코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낯선 땅을 흘끗 보기”정도가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2] 근본적으로 그 때 그 곳의 사람을 위해 주어진 말씀을 수 천 년의 세월을 넘어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적용하고자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선적으로 그 때 그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과 그 시대의 해석에 유의하는 것이며, 그러한 이해 위에서 오늘 우리의 변화된 상황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 글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구약의 희년법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회체제의 차이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희년법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맥락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종교적인 규례로서의 기본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더더욱 오늘날의 경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 활용이 어렵고, 나아가 그러한 희년 읽기 자체가 부적절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희년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본 정신이 구약 이스라엘과 같은 농경 사회에서[3] 어떠한 형태로 실현되게끔 규례가 주어지고 있는지, 나아가 희년 규례가 이후의 구약 역사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한다.
1. 희년법의 맥락
1.1. 레위기와 성결 법전
희년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 25장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 25장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25장이 포함되어 있는 보다 큰 틀인 레위기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레위기의 규례의 핵심에는 하나님을 닮는 삶(imitation of God)이 있다. 음식규례의 준수에도 이 점이 강조된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 11:44-45; 또한 18:30; 20:25-26; 22:32).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삼으시려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그들 역시 거룩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닮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는 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규례들을 주셨다. 이러한 규례들의 의미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유들을 추론해 보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규례는 주어지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준수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하신 규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고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을 닮는 삶에 대한 규례를 담고 있는 모음이 레위기 17-26장이며 이 내용은 흔히 “성결 법전(Holiness Code)”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거룩의 규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에 보이는 이들이다. 성결법전은 제의적인 차원에 대해서나 일상 생활의 차원에 있어서나 모두 구별되어야 함을 일러주고 있는데, 제사와 제물 규례(17장, 22장), 그릇된 성관계의 금지(18장, 20장), 일상 생활에서 지킬 규례(19장), 제사장이 지켜야 하는 규례(21장) 등을 담고 있으며, 23-25장은 절기 규례가 있고, 마지막에 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이 결론으로 놓여 있다(26:3-46). 특히, 이러한 여러 규례의 마지막에 위치한 절기에 관한 규례는 23:1-26:2인데, 이 부분은 첫머리에 안식일 규례에 관한 말씀이 있고, 마지막에도(26:12) 안식일 규례로 맺어져 있어서 전체를 묶어주고 있다. 안식일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틀 속에 안식일이 놓여 강조되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창 1:1-2:3). 특히,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언급(창 2:3)은 안식일의 근본에 ‘구별됨’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금송아지를 섬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으나, 모세의 기도와 더불어 그들을 용서하신 사건의 전말은 특이하게도 안식일 준수에 관한 말씀을 틀이 지워져 있다(출 31:12-17; 35:1-3).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천하 만민 가운데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이다(출 33:16). 그러므로 열방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 주신 말씀을 지킬 것이 요구되며, 이 맥락에서도 역시 절기를 바르게 지킬 것이 명령된다(출 34:18-26). 그런 점에서 이 사건 전체가 안식일 준수로 틀짜여 있다는 점도 일관된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되 안식하셨고 그 안식일을 구별하여 이스라엘로 지키도록 명하셨다.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안식일과 안식일로 대표되는 절기를 지키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러한 규례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본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존재의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받도록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본받음에 절기의 바른 준수는 큰 중요성이 있다. 그렇게 볼 때, 성결 법전의 마지막 부분이 절기 준수에 관한 말씀으로 맺어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그에 관한 말씀이 안식일 준수로 틀짜여 있다는 점도 의미깊다. 그러므로, 절기 준수에 관한 23-26:2의 본문은 성결 법전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삶을 규정하는 제사과 정결 규례를 말하고 있는 레위기 1-16장의 경우, 제사와 정결 규례의 총합으로 제시되며 결론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 대속죄일 규정이다(레 16장). 그런데, 레위기 25장에서 자세히 규정되고 있는 희년의 경우 바로 이 대속죄일에 선포된다(레 25:9). 그런 점에서 1-16장의 결론으로서의 16장과 17-26장의 결론으로서의 25장이 서로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4] 그러므로, 레위기의 이러한 짜임새는 성결 법전의 결론으로 절기 규정을 고려하게 하며, 특히 희년 규정이 대속죄일 규정과 상응하면서, 성결 법전을 비롯해서 레위기 전체를 반영하고 담아내는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게 한다.
1.2. 안식일
이레째 되는 날은 이스라엘이 거하는 각 처에서 쉼을 통해 지키는 안식일이다. 이 안식일은 보통 “샤바트”라고 불리고, 몇몇 경우들에서는 보다 더 강조된 의미인 “샤바트 샤바톤(!AtB'v; tB;v;)”으로 불리는데, 이 때의 의미는 ‘특별한 안식일 규례들과 더불어 지켜져야 하는 안식일’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HAL). 절기 도중에 노동을 쉬도록 된 절기의 첫 날과 팔일째 되는 날들은 그저 “샤바톤”이라고 불리는데 비해(레 23:39; 참고 레 23:24), 안식일은 모든 안식 중에서 진정하고 가장 큰 안식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쉼을 주셨지만, 안식일은 그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과 심지어 동물까지도 포함하여 완전하고 평등하게 그 진정한 쉼을 누려야 함을 안식일을 가리키는 이러한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안식일은 십계명에서 유일하게 창조에 근거한 계명이다. 안식일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점에서 다른 휴일들과 구별된다. 지위나 성별, 심지어 동물까지라도 이 날에는 모든 노동을 쉬게 된다. 이방인들까지 여호와께 연합하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안식일 규례였다(사 56:2-6).”[5]
“샤바트 샤바톤”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기 시작한 후의 첫 번 안식일을 가리킬 때이다(출 16:23). 안식일의 중요성은 앞에서 살펴 본 대로, 금송아지 사건의 처음과 끝에서 안식일 규례를 두고 있는 데에서 볼 수 있으며, 이 규정들에서 안식일을 가리켜 “샤바트 샤바톤”이라고 부르고 있다(출 31:35; 35:2). 대속죄일 역시 “샤바트 샤바톤”이라 불리기에 참으로 합당한 날일 것이다(레 16:31; 23:32). 그런데 제7년 안식년 역시 “샤바트 샤바톤”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레 25:4). 이것은 진정하고도 참된 쉼으로서의 안식일 정신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안식년임을 나타내고 있다. 안식년에 절로 자라난 것들은 그 땅의 주인뿐 아니라 종과 나그네와 들짐승 모두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안식을 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안식일 규정은 하나님을 닮는 것을 근본으로 하며, 사람과 피조 세계에 미치는 온전한 쉼을 주장하고 있고, 안식일 규정이 제시하는 쉼과 구별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다.
2. 희년 규례
2.1. 레 25장
레위기 25장은 하나님께서 거룩을 위해 명하신 안식일 규례의 틀안에서, 안식년에 대한 규정으로 시작하며, 일곱 번째 안식년으로 나타나는 “대안식년”으로서의 희년을 명령하고 있다.[6] 절기 규정들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그 내용의 면에서 희년은 절기 규례의 절정 혹은 결론으로 볼 수 있다. 되풀이의 주기가 가장 길고,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7] 25장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I. 안식년 규례(1-7)
II. 오십년 희년 규례(8-22)
가. 희년규례(8-12): 일곱 안식년; 대속죄일; 자유; 각각 기업과 가족으로
나. 기업 매매를 위한 규례(13-17)
다. 규례 준수에 대한 격려와 약속(18-22): 안식년에 대한 예[8]
III. 기업 무르기에 대한 세부 규정들(23-55)
가. 원칙(23-24):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 나그네; 토지 무르기의 허용.
나. 빈곤의 심화 단계에 따른 규정들(25-55)
1. 토지를 팔게 된 경우(25-28)[9]
2. 집을 팔게 된 경우(29-34)[10]
3.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경우(35-38)[11]
4. 종이 되어 자유를 잃게 된 경우(39-46)
5. 이방인에게 종이 된 경우(47-55)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희년에 대한 규례가 기본적으로 안식년 규례의 확장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12] 무엇보다도 희년은 일곱 안식년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안식년에 하나님이 베푸실 약속이 희년 규례를 격려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점(18-22절)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희년은 안식년과 결부되어 있으며, 안식년에 담겨 있는 정신의 확장이요 결론이 희년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3]
또한 25-55절에 제시되고 있는 세부적인 규례들은 가난의 정도에 따른 개별 상황들을 담고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땅에 살고 있는 한 농부의 상황이 경제적으로 계속 악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그로 인한 빈부격차와 같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희년 규례가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모든 이스라엘이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기업을 받고 농사지으면서 살아가는 사회 구조이지만, 이러저러한 현실들로 인해 자유로운 이스라엘이 가난해질 수 있음이 염두에 두어져 있으며, 그러한 가난이 일시적이지 않고 점점 심화되어가는 것 역시 반영되어 있다. 먼저는 경작하던 땅을 팔고, 자신과 가족이 사는 집을 팔게 되고, 마침내는 다른 이의 도움을 힘입어 더부살이로 연명하게 되며, 급기야는 자신과 가족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게 되고, 나아가 외국인들에게 팔리기까지에 이른다. 가난은 이스라엘을 자신이 천부적으로 받은 땅으로부터 소외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유한 삶의 근본인 육체 노동으로부터도 소외시키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기업 무르기에 대한 세부 사항들은 희년 규례가 이상적인 이스라엘의 묘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서 실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대처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근본적으로 현실 세계를 위한 규례일 것이라고 여기게 한다.
2.2. 희년법의 정신
2.2.1.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희년법은 옛 가치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진보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땅이 그 맡은 자로부터 멀어졌을 경우, 가까운 친족이 물러야 했고, 아니면 희년에 이르러 원래 맡은 자에게로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무르기는 자선의 행동이 아니다. 여기에는 땅은 여호와의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년은 대농장주의 형성을 가로막고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사이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 것을 방지한다.[14] 예언자는 이러한 끔찍한 현실에 대해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발할 뿐이지만, 레위기에 따르면 제사장은 율법의 실행을 통해 그러한 현실을 바로잡도록 되어 있다.[15] 이렇듯, 희년법은 구조적으로 가난을 방지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이 적절하게 강조되지만, 땅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땅을 매입하는 사람의 선한 의도가 없으면 가난한 사람은 착취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땅을 매입한 사람이 악할 경우 그는 희년때까지 토지를 고갈시킬 수도 있고 그 어떠한 악을 도모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희년 규례가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에 유의하게 된다. 25장에서 여러 번 반복되면서 여호와를 경외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들은(25:17,18,36,43) 이 법들을 사회적 차원의 도덕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의 본질로 다룰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고대근동의 다른 법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법에는 끊임없이 법의 준수의 동기가 부여되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애굽에서 종되었던 경험에 대한 강조이다: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55; 또한 25:38). 사회의 균형이나 유지가 희년법의 동기라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언약관계가 형성되는 출애굽의 경험이 법의 근본정신 혹은 동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년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지킬 사회적 규례라기보다는 그들의 신앙의 근본적인 종교적 영적 규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6] 나봇과 아합의 예에서 보듯이 악한 의도앞에서 이스라엘의 토지법은 무기력하게 붕괴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희년규례는 여호와를 경외할 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으로 생각할 수 있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들에 대한 명령이며 권고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를 알지 못한 자들에게 구조적이고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사항이 아니라 여호와를 알고 그를 섬기는 자들을 향해 가난한 이웃을 돕고 사랑하도록 선포된 신앙의 권면이다. 25장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네 형제”라는 표현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기업을 무르는 것 역시 가장 가까운 친족을 통해 갑작스레 당한 곤경을 돕도록 배려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에게 각각의 기업이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지만, 그들이 각각 지닌 재화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아울러, 희년이 대속죄일에 선포되었다는 점도 유의할 만 하다. 성결 법전의 절정으로서 희년이 제시되고 있고, 지극히 제의적이며 신학적 성격의 대속죄일에 희년이 선포된다는 것은 희년이 지닌 제의적 성격을 확실히 하고 있다.[17] 그러므로, 희년 규정은 거룩한 이스라엘의 사회적 차원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본받는 가장 근본적인 신앙적, 영적 차원을 반영하고 있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희년법의 원칙에 대해서이다. 희년 규례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으며, 땅을 사고 팔 수 없는데, 이것은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23절). 그래서 희년 규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유업으로서의 땅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게 하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18] 이 원칙은 단지 땅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이스라엘은 비록 가난하여 남에게 자신을 팔아야 할찌라도 종으로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품군, 여호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42,55절). 그러므로 희년법은 땅과 이스라엘이 모두 여호와의 것이므로 이 땅과 이 이스라엘은 여호와 아닌 그 누구의 사적인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유로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그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땅이 있어야 하며, 사람의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자유로운 땅위에서 자유롭게 그들에게 주어진 시내산의 규례를 따라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이 이스라엘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종되었던 집에서 건져내었듯이, 그들 역시 종되었던 그들의 형제를 건져내어야 한다. 희년에 선포되는 드로르는 자유라고 번역되지만, 이 자유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의사결정권과는 무관하다. 공동체내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주어지는 땅과 몸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 여기서 선포되는 자유이다. 희년의 자유는 몸과 마음의 온전한 자유이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 61장의 자유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풀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억눌린 데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기업과 몸의 회복을 포괄하는 개념인 것이다.
2.2.2. “유토피아”로서의 희년
2인칭을 향해 명령되고 있다는 점에서 희년 규례는 모든 사람이 준수하고 따라야 할 말씀으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희년 규례의 최대의 문제는 그 실현이 가능한가의 여부 혹은 실제로 준수되었는가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희년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법이라고 알고 있었다면 토지를 구매한 이는 어떻게 해서든 희년이 되기 전에 그 토지로부터 최대한을 뽑아내고 돌려주려고 할 가능성이 있고 이러한 일들은 토지 자체에도 전혀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다른 이로부터 땅을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구입한다고 할 때, 파는 이는 그 땅에서 나는 소득을 최대한으로 올려 부를 것이고 사는 이는 최대한 낮게 부를 것이며, 일단 구매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구매 소득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점에서 희년이 되어 돌려줄 때까지 토지에 대한 극심한 사용이 있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사용권에 들어온 토지에 대해 그 땅의 새로운 사용자는 칠 년째에 안식년을 그 땅에 대해 선포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희년법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19] 가능한 이익을 얻기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하지만, 이 사람의 중심에는 여호와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순종과 열심이 있다. 나아가 이 규례에는 각각의 가족들이 자신의 땅을 여호와께로부터 받아 경작하며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있다. 그러한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희년 규례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법조항의 측면뿐 아니라 이상적인 이스라엘 혹은 회복되어야 할 이상으로서 그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언급된 대로, 희년 규례에 세부적인 상황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제의 준수가 의도되고 염두에 두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희년 규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명하시는 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비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법의 정신을 훼손케 하는 경우들마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여호와께 대한 경외의 원칙에서 상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어쩌면 희년의 실현불가능성은 사실 실제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동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20] 희년은 실현불가능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이상적이다.[21] 여기서 “이상적”이라는 말은 오해되지 않아야 한다. 이 말은 희년이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희년법안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참된 모습(ideal)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2] 희년은 이상적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존재하고 있고 과거 존재하였던 세상과는 전적으로 어긋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희년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땅에 이르러 여호와께로부터 기업을 최초에 받았을 당시로 되돌리게 하는 조치라는 점에서[23] 과거 상황으로의 재조정(reset)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24] 구약 예언자들의 선포는 “그날”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러므로 희년에 대한 묵상은 단지 그 시절이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에서 그쳐져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의 평등하였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다가올 영광스러운 날에 대한 기대 속에 포괄되어야 한다. 이러한 미래를 향한 기대속에서 희년의 규례는 어떤 경우에서건 땅은 인간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그저 그 땅 위의 나그네로서 잠시 관리를 맡은 존재임을 기억하게 한다.
희년의 회복은 보다 궁극적인 회복이다. 신명기의 한 구절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다고 이르고 있다(신 15:11). 그러나 같은 장에서 제대로 면제년이 실행될 경우,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는 선포 역시 주어진다(신 15:4). 가난의 원인이 여러 궁핍과 필요에서 나오고 그로 인해 빚을 지게 되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생각할 때, 7년마다 이루어지는 면제년의 올바른 준수는 그 땅에서 가난한 자가 없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빚은 면제되어도 이미 땅을 팔아버린 사람에게는 여전히 땅이 없는 채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희년의 실행은 참으로 그 땅에 가난한 자가 없게 만들 것이다.
2.3. 고대근동과의 비교
희년안에 담겨 있는 자유의 선포는 구약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사상이지는 않다. 희년법은 고대 근동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25] 특히 희년에 선포되는 “드로르(rwrd)”는 악카드어의 “안두라룸(andurarum)”과 동일한 것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안두라룸(“자유”; 드로르)과 미샤룸(misharum; “정의”; 메샤림 ~yrvym)이 왕들에 의해 선포되었다. 주전 20세기 이전 시기에서 이미 왕들의 칙령에서 노예 해방과 빚의 탕감에 관한 선포를 볼 수 있다. 이전 시기의 증거들에는 땅의 회복이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빚이 탕감되는 것과 연관하여 그 저당이었을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것도 전제되었다고 여길 수 있다. 실제로, 주전 18세기 바벨론의 삼수일루나(Samsuiluna) 치세의 한 토판에서는 미샤룸과 땅을 되돌려 주는 것이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토판에서는 이러한 날에 어떤 기념적인 횃불을 들어 올리는 것이 수반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팔을 부는 희년과 아주 흡사함을 볼 수 있다.[26] 안두라룸과 미샤룸이 이미 일어난 사회적 불의를 시정하는 조치라면, 한 도시를 해방시키며 사회경제적 불이익을 방지하고 보호를 선언하는 “킷디누투(Kiddinutu)”는 미래지향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27] 이 킷디누투 역시 주전 2천년대 중반부터, 헬레니즘 시기까지 실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기에 서로간에 종삼을 수 없다는 오경의 규정들과 이러한 킷디누투 조치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희년 규례와 고대 근동의 조치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고대 근동의 미샤룸은 신의 대행자인 인간 왕에 의해 선포되지만, 희년법은 참된 왕이신 여호와에 의해 선포된다.[28] 희년에 선포된 “드로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심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야 했던 이들이 자유인이 되고, 다른 이에게 넘어가 있던 땅이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서, “드로르”를 통한 희년의 선포는 여호와께서 그 땅의 주인이시며,[29]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주인 되심을 확인하는 사건이다. 두번째로, 미샤룸은 부정기적이며 갑작스레 이루어지지만, 희년은 정기적이고 규칙적이며 거룩한 절기로 규정되어 일어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30] 여기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세상 나라는 즉위하는 임금의 변덕이나 호의에 좌우되고 그의 의지에 좌우되지만,[31] 희년법은 사람의 변덕스러움에 기댈 것이 아니라 규칙적이고 정기적으로 시행되도록 규정된다. 근동의 해방은 왕의 호의에서 나온 시혜인데 비해,[32] 구약의 희년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 근거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제도이다. 그런 점에서 희년법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법령들을 세우고 사회 체제를 완비한다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제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통할 수 있다. 아울러, 바인텔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제까지의 빚을 탕감하는 근동의 법이 과거와 연관된 법이라면, 제도적으로 규정된 희년법은 근본적으로 미래를 향한 법이다.[33]
2.4. 결론
희년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삶을 위한 법이었으며, 동시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바른 삶을 위한 이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대에도 여전히 희년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고 있다. 희년이 대속죄일에 선포되었다는 것은 제의적 정결과 이른바 사회적 정결이 동일한 차원으로 융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소를 정결케 하는 대속죄일이야말로 희년법을 선포하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날일 것이다. 희년법의 실질적인 내용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에 근본을 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원칙위에서, 그리고 여호와의 왕되심의 기초 위에서 선포된 자유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빚의 탕감, 땅의 회복, 땅과 사람의 쉼, 경제적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34] 이러한 요구들은 어느 때에건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실행가능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희년 정신의 반영
3.1. 사 61:1-2과 눅 4:16-30의 비교
3.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여호와의 영을 받은 이가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은 “네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이다(사 40:9-10; 52:7). 즉,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되는 아름다운 소식이다. 그가 행할 사역의 하나로 선포되는 “자유”는 히브리말로 “드로르”이다. 이미 앞에서 이 “드로르”의 선포가 여호와의 왕권을 상징하고 있음을 보았었다. 렘 34장에서 칠년 안식년에 종을 해방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고, 레 25장과 겔 46장에서는 희년과 연관되어 있다. 레 25장의 희년은 종과 땅의 회복 모두를 담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 안식년법을 인용하고 있지만, 모든 종의 일괄 해방을 담고 있는 시드기야의 내용을 볼 때, 사실상은 희년이 집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5] 실제적으로 고대근동에서 “드로르”의 선포는 종의 해방, 땅의 회복, 그리고 빚의 면제를 그 중요요소로 담고 있으며 공평과 정의를 집행하는 실질적 내용이었다.[36] 겔 46장에서 드로르가 언급되는 것은(“드로르의 해” rwrd-tnv) 회복된 이스라엘의 이상안에 희년이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46:16-18). 또한, 2절에서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어떤 해(年)가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가리킨다고 할 때, 희년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해일 것이다. 또한 이와 상응한 표현이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임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날(day)과 해(year)가 짝이 되어 있는 것 역시, 대속죄일에 선포된 희년과 잘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37] 그러므로 이사야 61:1-2는 여호와의 신을 받은 이에 의해 선포되는 희년이 그 배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38] 이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은 여호와의 신을 받은 이이며, 그는 가난한 이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자이며, 그를 통해 마음 상한 자가 고침받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가 선포된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에 선포된 자유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 예수께서 그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이 구절을 선포하심으로 시작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 역시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이다(마 4:17; 막 1:15). 특히, 누가복음의 구절은 이사야서 본문을 칠십인경으로 인용하고 있는데,[39] 눅 4장18절 끝에 있는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는 마소라본문 이사야서나 칠십인경 모두에서 나타나지 않는 표현이다.[40] 이 어휘는 이사야 58장6절에 있는 표현이 칠십인경에서 번역된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41]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기자는 두 이사야 구절을 필요에 따라 병합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에서 그가 희년에 대한 말씀을 근본적으로 해방과 자유케 함의 사역으로 이해하고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2]
예수님의 이사야 61장 사용에서 언급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희년의 성취의 선언이다. 희년은 숫자 7과 49에 매여 있지 않다. 희년은 특정한 기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기간은 이후의 문서들에서는 상징적인 영적 시간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칠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도 지극히 상징적이며 함축적이다. 그런 점에서 일곱의 일곱 배인 49역시 극히 신학적인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 모든 완전함이 포괄된 수인 것이다. 7년 안식년이 땅의 안식과 노예의 해방을 지시하고, 7년 면제년에서는 빚의 탕감과 노예 해방이 선포되며, 49년 희년에서는 땅의 회복과 더불어, 노예의 해방, 빚의 탕감 모두가 약속된다. 그런 점에서 희년 개념의 핵심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그 모든 회복과 자유,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 희년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50년 주기성을 재고하게 된다. 희년에 대해 연구하는 이들은 레위기 25장에 규정되고 명령된 대로, 50년마다 반복된 희년에 집중하지만, 희년 사상이 49년에만 한정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희년을 통해 나타난 구약의 사상은 칠 년 안식년과 면제년을 통해서도 부분적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한 시간들을 통해 구약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해방하시고 회복하시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이사야 61:1-2를 읽으신 후 첫 말씀으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43]고 이르신 것은 의미깊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바로 그 순간이 은혜의 해라고 선언하고 있다.
3.2. 나봇의 포도원(왕상 20장):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왕의 궁전과 나봇의 포도원이 인접하게 된 것은 나봇에게는 굉장한 행운이었을 수 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얻기 위해서 그에게 다른 땅을 제시하기도 하고 금전적인 보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땅을 매매의 대상으로 여기는 합리적인 아합의 견해는 땅을 “조상의 유업”으로 여기는 나봇과는 맞지 않았다.[44] 여기서 나봇은 조상의 유산을 팔거나 넘기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신다고 답하는데, 여기에는 확실히 레 25장23절에서 드러나는 대로, 모든 토지는 여호와의 것이라는 신앙 전통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45] 아합 역시 이러한 이스라엘의 고대 신앙을 알고 있었기에 나봇의 거절에 달리 대응치 못하고 물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 여인이었던 이세벨에게는 이러한 상황 전개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왕상 20:7). 그녀의 음모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재판제도가 사용되었고, 이스라엘의 또 다른 신앙 규례들이 동원되었다. 두 명의 증인에 의해(신 17:6; 19:15), 하나님을 저주하였다는 죄목이 확인되면서, 나봇은 규정 대로 성 밖으로 끌어내어져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다(레 24:14).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살인죄와 도적질의 죄를 선고하시며, 아합과 그의 왕가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신다.
누가복음 20:9-18에는 포도원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포도원을 악한 농부들이 맡아 경작하고 있다가, 주인이 그 아들을 보내어 포도원의 수확을 거두려고 하자, 악한 농부들이 그 아들을 죽여버리고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포도원 비유와 나봇의 포도원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봇은 포도원의 주인이었고, 그 아들도 포도원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원은 열조의 유업이고, 누가복음에서도 이 “유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다. 나봇을 죽이는 이유는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이고, 아들을 죽이는 이유도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나봇은 성밖에 끌려나간 채 거기에서 죽었고, 누가복음에서 그 아들도 포도원 밖에 내어쫓겨 거기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나중에 엘리야를 통해 아합과 이세벨에게 심판이 선포되었고, 포도원 주인인 아들의 아버지는 군사를 보내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였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포도원 비유에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배경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두 본문을 비교할 때, 우리는 나봇이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3.3. 귀환 공동체
3.3.1. 느 5:16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한 번 나라를 잃었고 그 땅을 잃었던 백성들이기에 땅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생각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귀환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땅을 담보로 해서 돈이나 곡식을 빌려 주는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느헤미야의 이 언급을 볼 때에 이러저러한 경우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땅을 구입하고 사들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 공동체의 일보다 온전한 회복의 일보다 자신의 일과 자신의 성취와 자신의 안위에만 힘쓰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그러한 이기적인 모습의 절정이 형제에게 이식을 취하기와 땅을 매입하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당장에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사들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돌려 줄 것을 명령한다(느 5:11). 부유한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매입하는 것은 그들이 빌려준 돈에 대한 대가일 텐데도 느헤미야는 당장 돌려줄 것을 명한다. 아마도 오늘날에 이러한 것을 명령한다면,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로 반발이 극심하였을 것이며, 느헤미야는 더 이상 자신의 개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들은 이에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회중들은 함께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 그 말한 대로 행하였다"(느 5:13). 이러한 결단과 순종이 있을 때에 함께 부르는 찬양이 의미가 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할 때에 느헤미야의 저 언급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땅에 집착하게 되고 땅을 소유하기에 몰두하게 될 때에, 느헤미야는 귀환공동체와 또 하나님이 다시 거하게 하신 이 땅을 위해 성곽을 쌓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힘은 소유에 있지 않고 관리와 섬김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각자 자신의 땅을 구입하고 땅을 늘려가는 데에만 혈안이 되고 형제의 고통과 눈물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환한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외”(느 5:9)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여기에 나온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레위기 25장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땅에 대한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에서 비롯된다. 개개의 규정을 엄밀하게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 대한 경외의 원칙 위에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3.3.2. 느 10:29-39에서는 8장의 수문앞 광장 집회를 기점으로 해서 귀환 공동체의 백성들이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살기로 결단한 내용이 소개된다. 여기에는 이방혼인 금지와 안식일 준수를 비롯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드려야 하는 몫에 대한 내용까지 고루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31절에 있는 대로, 칠 년 안식년을 지키겠다는 부분이다. 이와 더불어 모든 빚의 탕감도 결단의 한 부분으로 선포되었다. 칠 년 안식년과 이에 이은 빚의 면제는 신 15장의 면제년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귀환 공동체에게 있어서 여호와만을 따르기로 하는 결단에는 안식년과 면제년의 규례에 대한 준수가 핵심적인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46] 비록 여기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일곱 번 안식년에서 볼 수 있듯이, 안식년의 완성 혹은 절정이 희년임을 생각할 때, 안식년 규례의 준수는 희년의 준수와도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레위기 25장에서 희년 규례가 안식년 규례와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희년 규정은 실상 안식년 규정의 확장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께 구별된 백성이므로 거룩하다. 여호와께 구별된 이들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안식일을 지키며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안식년을 지킨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은 사회적인 규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거룩을 이루는 규례이다. 그런 점에서 이에 대한 규정들이 “성결 법전”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