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55:6-8, 야고보서 4:8-10, 사도행전 17:22-27 -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존재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은 다음 그를 찾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10).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야곱은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세기 28:17). 바다의 모래처럼 무거운 괴로움 속에서 고통당하던 욥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기 6:4).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요나 1:9)라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사람이었지만,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요나 1:3)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시편 기자도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시편 119:120)라고 고백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깨졌습니다. 인간은 신을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하였다]"(이사야 59:2). 그런 인간을 찾아 땅에 오신 예수께서도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한탄하셨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한복음 3:19-20).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해 아래 드러날까 하나님을 피해 어둠으로 도피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이신 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폴 틸리히는 말했습니다(폴 틸리히,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 『흔들리는 터전』). 선지자들과 종교개혁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 공명정대한 하나님을 증오했다.... 그리고 침묵이라는 신성모독을 통해 그분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다." 루터는 자기 안에서, 자신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발견하고 무섭도록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루터는 모든 것을 꿰뚫는 하나님의 임재(사로잡음)와 현존(지금 계심)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은밀한 것이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실체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영혼의 깊은 곳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씁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감추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에베소서 4:6 / 고린도전서 15:28, 골로새서 3:11)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절대자의 거울 앞에서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분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기에 그분을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이신 분'을 견딜 수가 없고 도피할 수밖에 없다는 루터의 이 경험은 부패한 교회를 바로 세우는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현대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합니다. 궁극적인 것이 일시적인 것 안으로 뚫고 들어오면 인간은 우선 그것을 피해 숨으려 합니다. 우리 눈에 안전하게 보이는 곳을 찾아 달아납니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피신처는 아마 우리의 '일'(work)일 것입니다. 우리는 일 중독 사회에 삽니다. 분주함에 매몰되어 애써 자신을 잊고 또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합니다. 둘째로 현대인은 '풍요로운 삶' 속으로 도피합니다. 더는 결핍이 없는 존재인 양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고 스스로 의로움에 빠집니다. 풍요로운 삶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로 현대인은 절망으로 도피합니다. 절망은 고통의 자리이지만 '희망 고문'보다 편안할 수 있습니다. 욥도 "내가 스올[지옥]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았다"(욥기 17:13)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대인들은 - 폴 틸리히의 탁월한 성찰처럼 - 십자가로도 도피하려 합니다(폴 틸리히,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영원한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로부터' 도망쳤지만 그들과 달리 우리는 십자가'를 향해' 도망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달려 죽은 십자가가 아닌 십자가는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지라도 오히려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는 은밀한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도망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합니다. 그분의 숨 막히는 현존(지금 계심)을 느끼는 순간부터 우리는 멀리 달아납니다. 이것은 슬프지만 진실입니다. 이것은 슬픈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할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편 139:7). 시편 139편에 나오는 이 한 마디가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이 대주제를 웅변합니다.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야훼께서는 다 아십니다"(1-4절, 공동번역). 이렇게 시작하는 이 아름다운 시편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지옥]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며,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8-10절, 개역개정), "어둠 보고 이 몸 가려달라고 해보아도, 빛 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달라 해보아도,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11-12a, 공동번역)라고 고백합니다. 문학적으로 풍성하고 강력한 이미지로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현존을 노래합니다.
우선 시편 기자는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다"(8절)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어디입니까?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거기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건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지금 말하는 하늘은 '인간이 만든 하늘'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이상(理想)이 완벽히 성취된 하늘, 그래서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는 하늘,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하늘입니다. 그런 곳은 '유토피아'(u-topia), 즉 "없는(u) 곳(topia)"입니다. 둘째로 시편 기자는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다"(8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스올(sheol)은 '죽은 자들의 거처'입니다. 거기는 생명의 하나님을 피해 숨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로 보입니다. 사실 스올은 삶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기 위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도피하고자 하는 유혹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지어 거기에도 계신다고 말합니다. 셋째로 시편 기자는 "내가 새벽 날개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9-10절)라고 했습니다. '바다 끝'은 어디입니까? 고대사회에서 수평선(horizon)은 한계선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선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이라는 날개를 달고 일출의 빛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서 그 한계를 넘어가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기술 문명이 추구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달아나는 문명'도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시편 기자는 '흑암'으로 도망쳐도 헛된 것이라 말했습니다. "어둠 보고 이 몸 가려달라고 해보아도, 빛 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달라 해보아도,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11-12절). 볼수록 감탄이 터져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둠은 무엇입니까? 어둠은 망각입니다. 어둠은 우리의 무의식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의식 밖으로 의도적으로 내던지고, 망각의 세계로 애써 밀어 넣으려 해도 우리는 결코 그분에게서 도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편재'(遍在, omni-presence)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 omni-science)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걸 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편재와 전지, 그것은 신학적 이론이 아니라 시편 기자의 압도적인 종교적 경험입니다. 시편은 이 놀라운 경험의 소산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 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5-6절, 새번역).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최종적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
도망칠 수 없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피할 수 없는 분이 참 하나님입니다. 외면할 수 있고, 도피할 수 있고, 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틸리히의 탁월한 성찰처럼, 인간의 이상이 투사된 하늘로 도피할 수 있는 하나님, 죽음과 절망 속으로 도망칠 수 있는 하나님, 한계선을 넘은 고도 첨단 문명으로 도피할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과 망각의 세계로 피할 수 있는 하나님, 그런 신들(gods)은 우리의 하나님(God)이 아닙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참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신, 더불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신들은 인간 내부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투사(投射)한 형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신들은 인간의 상상력과 소망 어린 생각(wishful thinking)이 만들어낸 우상이며 우리 자신의 위안거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쉽게 견딜 수 있는 신, 우리가 숨을 필요가 없는 신, 우리가 잠시라도 미워할 이유가 없는 신, 그리고 우리가 - 종교개혁자 루터처럼 - 증오할 수 없고 차라리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신은 결코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신부의 말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정교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의 글을 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제목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아버지. 이 호칭은 애원인 동시에 확신입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먼저 이 호칭을 제안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거룩한 창조주를 아버지로 여기며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너무도 소중한 선물이며 모든 위로, 기쁨, 영감의 원천입니다. 거룩하신 그분에 관해 우리가 고안해낸 생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자, 제1 원인, 전능자, 창조주, 자비를 베푸시는 분, 신... 우리는 무수한 말로 그분을 부릅니다. 이 말들에 담긴 생각에는 그분에 관한 진리의 일부가 담겨 있으며 그분에 관한 풍요로운 경험, 깊은 이해와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이 하나의 말이 '우리'라는 말과 만나면 이 호칭은 그 모든 개념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친밀감, 사랑, 너무나도 고유해 반복되지 않고 기쁨으로 가득 찬 일치를 드러냅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며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친밀한 관계를 체험하며 그 체험에서 오는 기쁨을 맛봅니다. 신앙은 신뢰로 이어지고 의존은 자유가 됩니다....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때 영원은 이미 시작됩니다"(<한국샬렘>의 영성편지에서 인용). 정말로 깊고 아름다운 통찰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Areopagus)에 서서 한 말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 기록된 유명한 설교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언덕인데, 오늘로 치면 고등법원입니다. 바울의 이 아레오바고 설교에는 바울 신학의 진수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아덴[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사도행전 17:22-27).
아크로폴리스 종교의 신들과 달리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 그의 설교의 요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을 찾으시고 언제나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게 성서의 일관된 선포입니다. 이름 모를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잔 야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세기 28:15)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축복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신명기 31:6)이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수많은 시편 기자들이 주님께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말고, 멀리하지 마소서"(시편 27:9, 35:22, 38:21, 71:12)라고 탄원합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처럼 주님께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편 22:11, 19)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여호와]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여호와]의 화평의 언약을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이사야 54:10)라고 선포합니다. 신약성서에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3:5)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성서는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시편 119:51). 시편 기자의 노래입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이사야 50:8). 이사야 예언자의 쟁론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편 34:18)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음이 상한 자가 계십니까? 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편 65:4)라고 했습니다. 지금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이런 복이 있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신다"(신명기 4:7)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편 145:18)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예레미야애가 3:57)라고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간구하고 아뢰는 분들이 바로 이런 복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겠습니까!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시편 25:1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분은 우리와 '친밀'(親密, intimately, closely, friendly)하게, 즉 아주 가까이, 허물없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 73:28)라고 시편 기자는 다짐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니 그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분이 도리어 나의 피난처가 됩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도다"(이사야 29:13)라고 비판한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6)고 촉구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니겠습니까? 신약성서의 야고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야고보서 4:8)고 말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이사야 3:8) 앞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합니다(디모데후서 1:14, 요한1서 4:13, 고린도전서 3:16, 마태복음 10:20).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방법으로 도망치든 그분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붙드십니다. 사로잡으십니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시편 41:12)라고 했습니다.
나는 영원히 '주 앞에'(Coram Deo) 서 있습니다. 또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다"(시편 90:8)라고 했습니다. 우리 영혼의 가장 깊고 아픈 곳도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아래 밝히 드러납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매양 아십니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다 아십니다"(시편 139:1-4, 공동번역). 그러므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편 139:7)라는 감탄사밖에는 우리 입에서 나올 말이 없습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습니다"(시편 139:5). 하나님은 우리의 양옆에 그리고 우리의 앞과 뒤에 계십니다. 탈출구는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은 나의 "오장육부를 만들어주시고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주셨으니...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뼈 마디마디 [하나님]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내]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의] 눈은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의]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시편 139:13-16, 공동번역)라고 했습니다. 나의 전 존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나의 일생의 운명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 깊어 미칠 길 없고,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습니다. 세어보면 모래보다 많고 다 세었다 생각하면 또 있사옵니다"(시편 139:17-18)라는 감탄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편 기자의 감탄이 오늘 여러분의 감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께 사로잡히십시오. 이 하나님께 붙들리십시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 앞에 압도당하고, 붙들리고, 사로잡히십시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 지가 반년이 지났습니다. 시내 곳곳에 "사회적 거리는 2m, 마음의 거리는 0m"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사람들과,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때가 바로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의 거리를 좁히십시오.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간격을 유지하십시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고 도피하는 존재지만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이사야 40:9)고 성서는 가르칩니다. 이제 하나님은 -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처럼 - 더는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모든 두려움으로부터의 지키시는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예레미야 17:17)라고 예언자는 다시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주님께 한 발짝씩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오늘의 공동기도문(최용우 시, <기쁨>)처럼 "주님이 제 옆에 계시기만 하면 저는 기쁘고 또 기쁩니다"라는 찬사가 여러분의 입에서 절로 나오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찬송가(438장) 가사처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습니다"라는 노래가 절로 입에서 흥얼거려지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처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계신, "우리의 숨결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이 나의 참 기쁨과 행복의 근원입니다. 이해인 님의 시 <가까운 행복>을 읽어드리며 말씀을 마칩니다. 이 시에 어떤 구절을 하나만 더 넣으면 좋을까요?
"산 너머 산 / 바다 건너 바다 / 마음 뒤의 마음/ 그리고 가장 완전한 / 꿈속의 어떤 사람 // 상상 속에 있는 것은 / 언제나 멀어서 / 아름답지 // 그러나 내가 / 오늘도 가까이 / 안아야 할 행복은 // 바로 앞의 산 / 바로 앞의 바다 / 바로 앞의 내 마음 / 바로 앞의 그 사람 // 놓치지 말자 / 보내지 말자." 시인이 허락한다면, 저는 여기에 이 구절을 하나 덧붙이고 싶습니다. '바로 앞에 계신 하나님 / 놓치지 말자 / 보내지 말자.' (202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