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당신"('attah)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시편 77:1-9, 골로새서 1:15-20, 마태복음 22:3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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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우리말에 '당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듣는 이를 조금 높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렇게 씁니다. 부부간에 상대방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이렇게 편지를 마무리하기도 하지요. 셋째로, 당신은 '그 자신'이라는 뜻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윗사람을 높여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아버님 당신께서 생전에 아끼시던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렇습니다. 넷째로, '당신'은 우리말에서 종교적 대상을 매우 높여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여, 당신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그렇습니다. 이처럼 좋은 의미의 높임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성서는 웬만하면 하나님을 가리킬 때 '당신'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처럼 사람들이 서로 다툴 때 상대방을 얕잡아 부르는 말로도 이 말이 쓰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시편 77편은 하나님 '당신'에 대해 말하는 아주 소중한 본문입니다. '나' 안에 갇혀있던 작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 '당신' 안에서 크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텍스트입니다. 히브리어로 당신은 '앗타'('attah)입니다. 주격 남성이고 여성 주격은 '앗트'도 있는데, 성서가 기록될 당시는 남성이 대표적으로 사용되어서 오늘 앗타로 소개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성가대의 지휘자를 따라 여두둔(Jeduthun) 창법으로 아삽이 부른 노래로 알려진 시편 77편은 자기연민에 빠져 괴로워하던 시인이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 하나님 '당신' 안에서 생명과 구원의 빛을 보게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시편 77편의 전반부는 탄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시편에 대한 분석은 세계적인 구약성서학자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IVP, 2020]를 참조합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향해 눈을 돌려 스스로 연민하고 탄식합니다. 1절에서 6절까지를 풀어서 읽어봅니다. (우리말 성서에서는 개역개정본이 이 부분의 뉘앙스를 가장 잘 살렸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소리 높여 부르짖습니다... 내가 주님을 찾습니다. 내 손을 펼쳐 듭니다. 내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내가 신음합니다. 내가 생각에 잠깁니다. 내 심령이 상합니다. 주께서 내 눈꺼풀을 꼭 붙잡고 계셔서 눈을 감지 못합니다. 내가 너무 괴로워서 내가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옛날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가 지나간 세월을 회상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생각에 깊이 잠기어 내 심령을 세밀히 살펴봅니다."

이 짧은 탄식 안에는 '내'가 무려 17번이나 등장합니다. 시인은 지금 자신의 고통에 몰입해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자신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7~9절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수많은 신앙인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마다 자신의 고백처럼 인용했던 구절입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hanan)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hesed)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raham)을 그치셨는가"(개역개정).

겉보기에 이 질문들은 하나님에 관해 묻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관해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관련된 세 가지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들, 즉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뜻하는 '헤세드'(hesed)와 은혜를 뜻하는 '하난'(hanan) 그리고 자비를 뜻하는 '라함'(raham)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시인은 과연 하나님이 신실한 분인지를 묻는 듯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관해 묻고 있습니다. 주께서 '자신을'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리고 혹 '자신에 대한'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인격과 품성마저도 자기 집착 안에서 소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아에 관한 관심 안으로만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깊은 자기연민에 빠져있습니다. 나르키소스의 연못가에 있습니다. 물 위에 비친 제 모습에 흠뻑 젖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연민이다"라고 헬렌 켈러(Hellen A. Keller, 1880-1968)는 말했습니다. 심한 병을 앓은 후 생후 19개월 되던 때부터 그는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렇게 중복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설리번 선생의 도움 속에 최초로 인문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작가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헬렌 켈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얼마든지 연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평생 싸운 대상은 자신의 장애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자기연민의 감정이었습니다.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감정을 우리는 '자기연민'(self-pity)이라고 합니다. 이 감정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애도(哀悼)할 때 좋은 역할을 하지만, 지나치면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합니다. 특히 우울한 사람에게 자기연민은 한없는 무기력의 늪으로 빠지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감정입니다. 그 깊고 푸른 감정 속에 빠지면, 삶의 기쁨이 사라지고 또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마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끝없는 공감과 동정을 요구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지치게 합니다.

시인은 이제 여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칩니다. 1~6절까지 자신에 대한 무서운 집착을 보여주고 뒤이어 7~9절에서도 하나님마저 자기연민을 위해 소비한 시인은 10절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슬픔과 불안의 근원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영어성경 NRSV로 10절을 옮겨봅니다. "나의 슬픔은 바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오른손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It is my grief that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 has changed.) 사실 이 구절은 번역이 매우 어려워 다양한 번역이 존재합니다. (예: 예루살렘성경(JB) - "이것이 나를 괴롭힙니다.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이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 새영어성경(NEB) - "내가 말했습니다. 그의 오른손이 잡을 힘을 잃어버렸는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팔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가?") 우리말 성서 가운데는 공동번역이 가장 원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 몸이 병든 것 생각해 보니, 지존하신 분께서 그 오른손을 거두셨기 때문이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오른손을 거두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편 145:15-16). 시편 103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편 103: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 신앙이 여기서 멈추고 더 자라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자기의 필요와 욕구 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편협한 소비주의 관점의 신앙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신도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기계장치의 신'(Deus-ex-machina)이 됩니다. 하지만 시편 77편의 기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오른손이 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이 전능한 오른손을 거두셨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 시인이 기대하고 예측하는 방식으로 자비를 베푸시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심히 낙심했습니다. 깊고 푸른 슬픔과 불안에 빠졌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내가 언제라도 필요할 때 불러낼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자유로우신 분이며, 결코 우리의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임은 고통스러운 깨달음입니다. 그 결과 시인의 신앙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가 알던 하나님은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인은 이 지점에서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면 처음 1~6절의 탄식으로, 즉 지독한 자기연민과 나르시시즘의 신앙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과연 시인은 어떤 길을 택했을까요?

놀랍게도 시편 77편의 기자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전진합니다. '나'에서 '당신'으로 도약합니다. 지금까지 오로지 '자신의 현재'에만 관심을 쏟던 시인은 11~12절에서 그동안 묻어 두었던 '우리의 과거'를 떠올립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봅니다. "야훼께서 하신 일을 내가 어찌 잊으리이까? 그 옛날 당신의 기적들을 회상하여 주의 행적을 하나하나 되뇌고 장하신 그 일들을 깊이 되새기리이다"(11-12, 공동번역).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과 '기적들'과 '행적'을 기억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고백이 이어집니다. "오 하나님, 당신의 길은 거룩합니다(quadosh)"(13a). 성서에서 '거룩하다'라는 말은 '구별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길이 거룩하다는 말은 그분의 길이 우리의 길과 "전적으로 다르다"(wholly other)라는 말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이사야 55: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시인의 입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감탄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13b, 개역개정).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처럼 가까이 계시면서, 지극히 자유로우시면서, 우리를 놀라게 하시며 애태우시는 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점괘가 든 포춘 쿠키와 같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종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두 종교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하나는 '나'의 지배를 받는 종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신'의 통치를 받는 종교입니다. 시편 77편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나'에 갇혀있었습니다. '나'의 아픔과 상처에 지배받으며 하나님마저 자기연민을 위해 소비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역사를 회상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는 '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 '당신'('attah)에게로 향했습니다. 협소한 '나'에서 크신 '당신'에게도 도약했습니다. 더 이상 '나'의 지배를 받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종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시인의 입에서는 지금까지 들을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노래가 울려 나옵니다. 14절 이하를 풀어서 읽어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팔로 속량하셨습니다. 물들이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천둥소리, 당신의 번개들, 바다에 생긴 당신의 길, 큰 물에 생긴 당신의 통로를 보았습니다. 당신의 발자취는 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뿐입니다. 이로써 시편 77편은 전반부의 '나'와 후반부의 '당신'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즉 전반부에서는 내 고통, 내 손, 내 심령, 내 눈꺼풀, 내 영혼, 내 마음, 내 심령에 집착했지만, 후반부에서는 당신의 천둥소리, 당신의 번개, 당신의 길, 당신의 통로, 당신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10절 이후에 어떻게 시인이 이렇듯 작은 '나'에서 큰 '당신'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전으로 돌아가진 않았습니다. 나르키소스의 연못가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시편 77편은 한 시인의 끔찍한 자기중심적 신앙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했을 겁니다. 하지만 시인은 도약했습니다. '나'로부터 '당신'에게로 극적인 이동을 했습니다. '나'를 품으시며 또한 '나'를 초월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품으시는 그 큰 '당신'(히브리어 'attah, 영어 Thou)으로 '신앙의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시편 77편은 '해피 엔딩'입니다.

'개근 거지'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요즘 해외여행 등으로 체험학습 가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오히려 개근하는 아이들을 비난하는 말이 생겼다는데, 그것이 바로 '개근 거지'라고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요즘 초등학생들이 개근하면 듣는 말"이라는 글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학기 중에 체험학습 신청을 하지 않고 개근하는 아이들은 '못 사는 아이'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학교를 개근하면 자연스레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다는 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적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초등학교 6년 동안 개근상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게 지금도 자랑스럽습니다. 그렇게 개근상은 '성실함의 아이콘'이었는데 이제는 '가난의 아이콘'이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월 거지'나 '휴거' 등 주거 형태부터, 착용하는 옷의 브랜드, 방과 후의 학원, 그리고 가족 여행까지 어른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던 차별과 배제의 문화가 우리 아이들의 초등학교 교실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하지요. 어디서 보고 배웠겠습니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더불어 잘 지내는 삶'이 아니라 '남보다 잘나가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 덕분 아닐까요?

지금 우리 사회는 위태로울 정도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로 존속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까지 들게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공정'의 기준을 세워 소리 높여 요구합니다. 하지만 '불평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운동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의 규칙만 계속 요구할 뿐, 불평등의 고통으로 허덕이는 이들에 대한 배려나 연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이익이 중심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가 능멸당합니다. 윤리는 묵살당합니다. 사유의 깊이는 조롱당합니다. 야만이 이성의 탈을 쓰고 진실인 양 행세합니다. 대화는 없습니다. 모두가 독백뿐입니다. 모두 자기 안에 갇혀있습니다. 작은 '나' 안에 몰입해 자신의 아픔과 상처에 대한 연민에 빠져있습니다. 나르키소스의 연못에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성숙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숙함이란 무엇입니까? 성숙이란 편향된 사고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나' 안에 '너'를 품는 것이고, '너'를 통해 '나'를 보고 듣는 것입니다. 다름은 내가 밀어내야 할 적이 아니고 또 다른 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내 존재의 크기를 넓혀, 자아의 동심원을 확대해 성숙한 자아가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 아름다운 메시지가 종교와 종파를 넘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짧은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뜨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Rivers do not drink their own water; trees do not eat their own fruit; the sun does not shine on itself and flowers do not spread their fragrance for themselves. Living for others is a rule of nautre. We are all born to help each other. No matter how difficult it is... Life is good when you are happy; but much better when others are happy because of you.)

그렇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재난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서로를 연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재난에 취약한 사람들을 향해 끊임없이 관심을 두고 긍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재난을 극복하고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인류는 물론 지구의 생물권 전체가 상호의존의 관계 안에서 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생명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서 함께 연대하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오늘은 창조절 제1주입니다. "저 높고 푸른 하늘과 수 없는 빛난 별들을 지으신" 대주재 성부 하나님을 기리는 계절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에베소서 1:23)이십니다.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고린도전서 15:28), 즉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에베소서 4:6)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로마서 11:36)간다고 말합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시편 77편의 기자가 나아간 '당신'입니다. 온 만물을 품고 계신 창조주 '당신'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한복음 15:5)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2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심오하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십니다. 이 크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당신'입니다. 나의 '큰 나,' 즉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케 하시는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외톨이가 아니라 이 거룩한 생명 안에서 "따로 그리고 같이"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동료 피조물'(fellow creatures)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시고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37-40).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자기 사랑이 모두 하나라고 가르치신 겁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사랑은 '심오한 정신적 일체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최고 형태는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바로 이 일체감에 근거한 자기희생일 것입니다. 내 안에 너가 있고, 너 안에 내가 있기에 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만물 안에 계시기 때문에("God in all; all in God")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사랑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즉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골로새서 1:20)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 안에 참 평화와 화해가 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코로나바이러스로 생활 속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가운데, 다시 세 주째 온라인으로만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마스크 쓰시느라, 손을 씻으시느라, 그리고 사람들과 거리두기 하시느라 얼마나 힘드십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이 고난을 버텨야 할까요? 샘터지기 안중덕 님이 쓴 <코로나 감염시대가 전해주는 메시지>로 위로의 말씀을 대신 전합니다. "1.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것은 '그 입을 다물라'는 뜻이다. 막말과 거짓말을 하지 말며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다... 2.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뜻이다. 악한 행실과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성결하라는 말이다... 3. 사람과 거리두기를 하라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하라'는 뜻이다. 사람끼리 모여서 살면서 서로 다투지 말고 공기와 물과 자연의 생태계를 돌보며 조화롭게 살라는 말이다... 4.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위안을 얻거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예배당에 가지 말고 천지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이다... 5. 집합을 금지하라는 것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라'는 뜻이다. 모여서 선동하거나 힘자랑하지 말고 사람이 그리운 이들의 벗이 되라는 말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홀로 외로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이들의 짐을 나누어질수록 세상은 사랑으로 포근해지리라."

시편 77편의 기자처럼 여러분도 작은 '나'에서 벗어나 크신 '당신'의 생명 안에서 사랑으로 온 세상을 포근하게 만드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202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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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