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나를 따르라"(Nachfolge)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여호수아 1:6-9, 야고보서 3:13-18, 요한복음 13:1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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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가 창립 85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이 나라 최초의 대학교회인 이화 대학교회는 1935년 9월 29일 주일 아침에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의 학생과 교직원이 연합하여 이화의 에머슨홀(지금의 중강당)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됐습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반일사상을 고취한다고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대학교회는 1942년 12월의 예배를 끝으로 강제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10월 22일에 이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교목이 임명되고 채플이 재개되었을 때 다시 문을 연 대학교회는 6.25가 발발하자 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나 1951년 11월에 피난지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다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이화가 서울로 돌아왔을 때 폭격과 화재로 크게 손상을 입은 캠퍼스 안에서 대학교회는 학교의 재건을 위해 기도하며 이화 기독교 정신의 구심점으로 예배와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중강당과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대학교회는 지난 2000년 5월 31일에 이 아름다운 교회 건물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믿음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대학교회가 여든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오늘, 코로나바이러스로 아무도 오지 못한 이 텅 빈 예배당에서 창립 85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는 현실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지난 85년 동안의 긴 세월을 한결같은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큰 재난 상황 속에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대학교회의 깊고 푸른 믿음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모든 교우님을 위로하시고 힘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번 '코로나 19'는 대학교회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교회에 '큰 질문'(Big Question)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해당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2020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64.9%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 나라 국민 3명 중 2명이 한국교회에 등을 돌렸다는,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LA)에서 한국 근대 종교사를 가르치는 옥성득 교수는 이번 코로나 19사태가 신천지만이 아니라 개신교 전체의 위기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신천지를 "개신교 토양에서 나온 새 품종"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 "개신교든 신천지든 근본주의 집단은 적을 만들어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특성이 있으며 "배제와 혐오의 언어를 동원해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에선 똑같다"라고 지적합니다. 지성을 멸시하고 질문을 허용하지 않으며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르는 일부 개신교회의 '중세적 광신'은 실로 이 땅에 횡횡하는 수많은 이단 사이비 종파의 기름진 토양입니다. 일본에서는 1995년 옴진리교 사건 이후 종교에 대한 혐오증이 커졌는데, 한국에서도 코로나 이후 신천지뿐 아니라 교회와 종교 전반에 대한 혐오증이 커질까 심히 우려됩니다. 한국교회가 전도와 외적 성장에 치중하는 물량적 성장주의, 민족과 사회를 위하는 공공성보다 교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폐쇄적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않는 한, 앞으로 '탈교회화,' '탈종교화'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래저래 '코로나 19'는 이 땅의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존재의 이유와 근본을 묻는 '큰 질문'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인 "나를 따르라"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의 한 책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비록 39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지난 20세기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 신학자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쓴 『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d), 『나를 따르라』(Nachfolge), 그리고 『신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 등은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영감과 도전을 주는 신앙 고전(classic)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그의 작품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들조차 그에 관해서 꽤 많은 것을 아는 척합니다. 2002년 독일 국회의사당 연설에서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는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을 독일 정부가 지지해달라 호소하면서 본회퍼 목사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2004년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에서 이라크 포로에게 심각한 인권침해와 학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이 가져야 할 헌신과 충성의 자세로 본회퍼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이상 매튜 D. 커크패트릭, 『디트리히 본회퍼 : 평화주의자와 암살자 사이에서』, 비아, 2015.) 한국에서는 어떤 목사가 본회퍼의 '미친 운전자 비유'를 들며 자신의 정치적 행동의 정당성을 변론하는 도구로 삼기도 했습니다.

탈무드에 "지혜로운 사람은 본 것을 이야기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들은 것을 이야기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교회가 갈 길을 잃고 헤맬 때 본회퍼를 직접 읽어보아야 합니다. 본회퍼도 한때는 열광적인 '독일 민족주의'에 심취했던 사람입니다. 20세기 초의 독일은 다양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신학 사상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그의 '창조질서론'과 '두 왕국론'은 독일인이 '독일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도록 애국심을 고취했고 민족주의에 젖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독일인은 독일 민족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수행할 적임자라 생각했습니다. 1차 대전 후 참담한 굴욕감을 준 베르사유 조약은 이런 열망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이때 히틀러가 등장했습니다. 독일인은 그를 하나님께서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위대한 지도자'로 보았습니다. 본회퍼라고 이런 독일 민족주의의 열풍을 피해간 건 아니었습니다.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던 해에 그는 예민한 13살이었고 성장기 내내 그는 그 조약이 독일에 가져온 궁핍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가 23살이 되던 해에 쓴 한 글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당시 독일인들의 '민족'(das Volk)에 대한 전형적인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나의 형제, 나의 어머니, 나의 이웃을 지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음을 나는 안다. 이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살인과 전쟁을 신성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던 본회퍼가 편협한 독일 민족주의에서 벗어나게 한 두 가지의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던 본회퍼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 두 가지는 '세계 여행'과 '교회 일치 운동'에의 참여였습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1933년 이전에 본회퍼는 이미 유럽과 북미 그리고 남미까지 여행했습니다. 간디를 만나기 위해 인도까지 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엔 해외여행이 결코 흔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 여행'을 통해 본회퍼는 자신의 민족주의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편협한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읽은 교독문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山上垂訓, The Beatitude)을 읽으며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론'(Zweireichlehre)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질서를 이루기 위해 교회와 국가라는 두 개의 '왕국'을 만드셨습니다. 루터는 교회가 영혼의 문제를 살필 책임을, 국가는 정의의 칼을 휘두를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양자는 완전히 독립된 역할을 지녔기에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꽤 깔끔해 보이지만, 이는 사실상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과 '국민'으로 분열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본회퍼 목사는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한 삶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삶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며, 평화를 만들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며 바로 이런 제자의 삶으로, 이 지고지순한 사랑의 삶으로, 이 단 하나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본회퍼가 동시대 독일인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일치,' 즉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 때문입니다.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들이 세계교회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분리주의적으로 폐쇄적인 '독일교회'를 고집할 때 본회퍼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지금도 근본주의 신학은 교회일치를 위한 모든 노력을 거부하고 분리주의의 길을, 무한한 자기분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상은 바울이 성서에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5:23)가 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린도후서 12:27)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고린도후서 12:25)라고 했습니다. 사실 본회퍼는 이와 같은 교회론을 자신의 박사 논문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에서부터 이미 펼쳤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가 '신학적 기적'이라고 극찬한 이 논문에서 본회퍼는 교회를 '상토룸 코뮤니오,' 즉 '거룩한 이들의 공동체, 친교, 사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고백할 때의 바로 그 교회론입니다. 교회는 서로 '교통'(交通)하는 곳, 즉 교제하고 왕래하는 곳입니다. 서로 소통(疏通)하는 곳, 즉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일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증오를 이기시고 당신의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민족, 계급, 인종을 가로질러 인류 평화를 위해 전쟁의 반대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라고 본회퍼는 역설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회중(會衆, congregation)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회퍼 목사의 생각은 『나를 따르라』에서 완성됩니다. 교회는 '거룩한 이들의 사귐'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입니다. 본회퍼는 아무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 분노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값싼 은혜(cheap grace)는 우리 교회의 철천지원수다. 떨이로 팔아버린 싸구려 상품이요, 참회 없는 사죄이며,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라는 것이다." 이 책 『나를 따르라』의 독일어 원제는 "Nachfolge"입니다. 이 단어는 '누구의 뒤를 잇다'라는 뜻인데, '모방'(模倣)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모방은 '본받는 것'입니다. 모방은 '닮는 것'입니다. 본회퍼가 생각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숭배나 열광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그분이 바라신 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분의 마음과 행위를 모방하여 그것을 재현(再現, re-presentation)하는 것, 즉 '다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본회퍼는 '제자'(disciple)라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바타'(avatar)가 바로 제자입니다.

제자란 스승의 본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그대로 닮아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발을 씻기신 것처럼 서로의 발을 씻기는 것,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흙먼지 가득한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으레 손과 발을 씻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지체 높고 부유한 사람은 종을 시켜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처럼,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외형을 모방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의 인격과 행동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요한복음 13장). 마치 꺼지기 직전에 자신을 더욱 밝게 빛내는 촛불처럼,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아시고 사랑의 불꽃을 아낌없이 태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바로 이렇게 그분처럼 "마지막까지"(to the end) 사랑의 불꽃을 태우는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것이 그가 주신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사랑의 계명이 결코 실천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을 통해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그 사랑이 전제입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 사랑'으로 몰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끝까지"(to the end) 사랑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입니다. 우리는 이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습니다.... 믿음이 먼저 오고 순종은 그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먼저 믿어야 그다음에 순종이 따라온다면... 믿음과 순종은 서로 분리되고 말 것입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이 경건을 가장한 자기기만이나 값싼 은혜가 되지 않으려면 순종의 첫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새롭게 창조된 존재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란 그분이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한국사회의 이념 갈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과거 우리 사회가 한국교회에 가장 바라던 것은 '봉사'였습니다. 그런데 2013년부터 순위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젠 윤리와 도덕입니다. 조성돈 교수가 진단하듯이, 사회적 양극화와 이념 갈등이 고조된 이 시대에 사람들은 교회가 '초월의 가치'를 말해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이념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섬기는 보편적 사랑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내리친 '베드로의 칼'이 아니라 자기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골고다 언덕 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입니다, 지치고 아픈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그 초월적이고 숭고한 사랑의 재현을 세상이 교회에게 기대합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여호수아 1:7, 그리고 여호수아 23:6)라고 명령합니다. 성서는 반복해서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신명기 5:32, 이외 신명기 2:27, 17:11, 17:20, 28:14)고 명령합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전도서 7:18, 새번역)라고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호세아 2:9)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길 바라십니다.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을 향한 이 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골로새서 2:2) 서로 화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린도후서 5:18)고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8)고 명령합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서로 찢기고 싸우며 고통을 받는 세상의 중심에 서서 아픔을 치유하고 갈등을 통합하는 화목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야고보서 3:13-18)에서 사도 야고보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마다 이 세상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혜보다는 편견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나만이, 특정한 우리만이 안전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나머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라는 식의 마음이 바로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야고보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기심과 파당심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이라고 질타합니다. 왜냐하면,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혼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위에서 오는 지혜"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곧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먼저 '순결'하다고 했습니다. 특정한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지혜는 또 '평화'라고 했습니다. 다툼과 전쟁을 부추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그 지혜는 '친절'하다고 했습니다. 친절은 배려와 존중의 표현입니다. 또 그 지혜는 '온순'하다고 했습니다. 온순의 반대는 '포악'인데, 포악하다는 말은 남이야 어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아무도 선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그것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감격과 감동으로 그것에 보답하려고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야고보는 "위에서 오는 지혜"가 '편견'과 '위선'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가진 대개의 견해는 숱한 편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로 인한 위선(僞善, hypocrisy)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신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위선은 죄인을 뻔뻔한 의인으로 만듭니다. 위선은 자신을 선으로, 타인을 악으로 규정하면서 배제와 혐오의 언어를 동원해 타인을 정죄합니다. 마치 자신은 죄인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라는 성경 말씀의 부정이요, 하나님에 대한 기만행위입니다. 위선은 구원의 길에서 결정적으로 탈락하게 만드는 최악의 죄입니다. 우리는 사도 야고보의 말처럼 이제 우리 마음속의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을 버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며, 자비의 마음으로 편견과 위선을 물리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지혜를 구현하고 재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 지혜를 비추는 성체(聖體)가 되어야 합니다.

옥성득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 기독교 형성사』에서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배타적 보수성은 왜곡된 전통이고,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태도가 본래 주류였음"을 논증했습니다. "한국 개신교 1세대 그러니까 1910년까지의 한국 개신교는 한국적 독특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 형성된 아주 새로운 공동체"이며 이 "1세대 한국 기독교인들은 항일 독립운동과 근대 문명화에 기여하였듯이 유연한 타종교 신학을 가지고 토착적인 기독교를 창출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 논지입니다. 우리는 이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 희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 처음으로 돌아가("Ad Fontes")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크리스천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교리에 동의하는 자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Nachfolge)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모방하라', '나를 재현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끝까지 서로 사랑하라'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준 것 같이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주라' 명령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 15:22)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사랑의 계명 이외에는 우리에게 주신 다른 계명이 없습니다. 정죄와 배제와 혐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순명(順命)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대학교회는 물론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본질이고 존재 이유입니다. 지금 "나를 따르라"고 주님이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아 어디든지 주를 따라 세상에 사랑의 빛을 비추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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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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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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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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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