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페스트』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예레미야애가 3:19-26, 히브리서 3:1-5, 마가복음 14:2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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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소설 『페스트』는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당하는 오늘날 다시 읽어보아야 할 작품입니다. 카뮈는 알제리 출신 작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등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페스트』는 1947년 출간된 작품으로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초판 2만 부가 매진되는 등 당대에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작가는 2차 대전을 통해 경험한 다양한 인간의 군상(群像)을 통해 인간의 비극적 상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연대의식과 성실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194X년 알제리의 오랑(Oran)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합니다. 오랑시는 아주 평범한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카드놀이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진료실을 나오다가 죽은 쥐를 발견합니다. 죽은 쥐의 숫자는 날로 늘어납니다. 병원 건물의 수위가 통증을 호소하며 의사 리외를 찾아오지만 사흘 만에 사망하고, 그와 같은 증세로 죽어가는 사람이 폭증합니다. 리외는 보건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질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을 공론화하려 합니다. 하지만 당국은 주저하고 엄격한 조치는 즉시 취해지지 않습니다. 결국은 환자가 넘쳐 병원이 마비되는 상황이 되어서야 페스트가 공식 선언되고 도시는 폐쇄됩니다.

봉쇄된 도시 안에서 의사 리외는 크게 세 인물과 만나게 됩니다. 먼저 파리에서 온 기자 레몽 랑베르입니다. 랑베르는 리외에게 자신은 외지인이기 때문에 봉쇄된 도시를 빠져나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건강 확인서를 써달라고 부탁하지만 리외는 거절합니다. 다음으로 오랑시에서 명성 높은 파늘루 신부입니다. 리외는 파늘루와 앞으로 중요한 신학적 논쟁을 벌일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랑시에 여행객으로 왔다가 페스트가 창궐하자 도피하기는커녕 자원 보건대를 조직하는 장 타루입니다. 이외에도 소설 속에는 다른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여러 인간 군상을 통해 페스트와 같은 거대한 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각각 어떻게 행동하는지 세심하게 그려냅니다.

신문기자 랑베르는 파리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 리외를 찾아가 호소합니다. "저는 이곳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건 인도적인 문제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생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개인이 행복해야 공익도 이루어지는 겁니다." 랑베르는 지금 이 재난 상황의 이방인으로 자신의 행복과 안위만 지키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민간 보건대가 조직될 때에도 랑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웅 놀이 따위는 그만두고 어서 여기서 벗어나길 기다리자고요. 나는 그 이상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랑베르에게 리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군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함입니다. 성실히 자신의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기자 랑베르는 이후 의사 리외가 자신과 똑같이 아내와 이별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음 문을 엽니다. 그리고 끝까지 봉쇄된 도시에 남아 민간 보건대에 참여하게 됩니다. 자신은 이방인으로 이 사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겼던 그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떠나지 않고 여기에 남고 싶습니다. 혼자만 행복한 것은 수치스러울 수 있는 일이예요. 저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니까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이곳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파늘루 신부는 오랑시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겁이 나서 교회로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형제들이여, 재앙이 왔다. 너희들은 이 재앙을 받아 마땅하다." 그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집트에 내린 재앙을 언급하며 "이 재앙은 하나님을 대적한 적을 쳐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애굽 왕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기에 하나님은 페스트를 통해 그를 굴복시키셨다"라고 설교했습니다. 신부님은 이 모든 사태를 '신의 뜻'으로 해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에서 페스트가 하나님의 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이었듯이 지금의 역병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길이라는 그의 '당당한 위로'에 시민들은 오히려 더 공포에 질려 성경보다는 부적을 찾기 시작합니다.

리외는 파늘루 신부의 이런 해석과 맞서 싸웁니다. "나에게 구원이란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 나는 그저 인간의 건강을 염려하고 그걸 최우선으로 삼을 뿐입니다." 추상적인 구원보다는 구체적인 인간의 건강에 집중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성서의 '구원'(salvation)이라는 말은 '건강'(salus)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구원은 저 하늘 위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 위에 있는 우리의 몸의 건강과 치유와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파늘루 신부의 이원론적 신학은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파늘루 신부의 이런 신학은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4월에 오랑시에 페스트가 시작되었는데 10월 들어 새로운 혈청이 만들어집니다. 모두 여기에 큰 희망을 겁니다. 때마침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리자 이 아이의 몸에 혈청이 주사됩니다. 하지만 아이는 심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갑니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때문에 까맣게 타버린 아이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신이시여, 제발 이 어린아이를 구해주소서!" 이때 의사 리외가 말합니다. "적어도 이 애만큼은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있을 거예요!" 파늘루 신부가 중얼거리며 응답합니다. "화가 날 만합니다. 이 세상엔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페스트는 신의 뜻입니다." 그러자 리외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칩니다. "어린아이들마저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이후 파늘루 신부도 병에 걸려 쓰러집니다. 페스트가 '신의 뜻'이라고 했으니 그는 의사를 부르지 않고 조용히 죽어갑니다. 의사는 사인(死因)을 '병명 미상'이라고 적습니다.

주인공 의사 리외는 늘 흔들리지만 굳건했습니다. 그는 당대의 종교와 거침없이 불화했습니다. "성직자들보다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감을 느낀다"라고 그는 솔직히 말합니다. 영웅주의를 멀리하면서 그는 오직 '단 한 명의 인간'에게 그의 눈을 맞춥니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소설 『페스트』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은 파늘루 신부가 아니라 의사 리외입니다. 그는 왜 자신이 역병과의 싸움에 나서야 하는지 스스로 물으며 고뇌합니다. 그런데 답은 멀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여니 도시의 소음이 들려옵니다. 그때 그는 깨닫습니다. 희망은 저 교회의 확성기를 통해 크게 울려 퍼지는 '추상적인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웃 공장에서 짤막하게 반복되는 기계톱 소리와 같은 구체적인 '매일매일의 노동'에 있다는 것을! 의사 리외에게 중요한 것은 '성실성'이었습니다. '인류사랑'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하루하루 자기의 삶과 직책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대'였습니다. 죽음이 일상이 된 현실 앞에서 타인의 고통에 연민하며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설 『페스트』에서 '페스트'는 상징입니다. 그것은 단지 중세시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黑死病)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페스트'는 전쟁 혹은 나치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 안의 악마적 요소도 상징합니다.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精髓)라 일컬어지는 이 소설에서 페스트가 상징하는 것은 '부조리'(不條理, absurdity)입니다. 부조리는 실존주의 철학의 용어로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희망이 없는 절망적 상황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또 모든 일을 완전히 해낼 수도 없는데, 반드시 죽게 마련이니, 이것이 부조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부조리한 현실에 그냥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거기에 저항하며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카뮈는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어설프게 신을 찾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쉽게 종교로 도피하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파늘루 신부를 통해 선포된 전통교리, 즉 페스트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는 그런 교리를 비판하고 리외와 타루가 보여준 '성실과 연대'를 통해 인간의 책임과 희망을 제시할 뿐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표면적으로 반(反)기독교적인 메시지처럼 보이는 『페스트』에서 우리는 오히려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소설이 강조하는 '성실성'은 사실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입니다. 성서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성실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합니다(시편 25:21, 시편 37:3, 시편 40:10, 시편 71:22, 시편 119:90, 이사야 25:1 등).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2-23)라고 노래합니다. 성서에서 여호와의 '성실하심'은 대개 그의 '인자하심'과 한 짝이 되어 나타납니다(시편 36:5, 시편 89편, 시편 100:5 등). 오늘의 교독문처럼, 시편 기자는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편 92:1)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hesed)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 사랑이 '성실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성실(誠實)하다'라는 말은 '정성스럽고 참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성스럽고 참된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성서는 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신다]"(신명기 7:9). '신실(信實)하다'라는 말은 '믿음직스럽고 착실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특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계약) 관계에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믿음직스럽고 착실하게' 약속을 지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역하고 생명의 계약에서 이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자신의 약속을 어기시지 않고 끝까지 신실하게 그 언약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품성과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오늘의 신약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신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히브리서 3: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세우신 이,' 즉 하나님에게 신실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이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셨다]"(히브리서 2:17)고 증언합니다. 그분의 신실함과 속죄가 하나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신실함'은 무엇일까요?

요즘 학계에서 '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라는 어구에 대한 재해석이 활발합니다. 그간 이 말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믿음'(faith)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피스티스'(pistis)가 '충성'(allegiance) 혹은 '신실'(loyalty)로도 번역될 수 있음이 드러나면서 성서에 대해 재해석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2절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으니라"(로마서 3:21-22). 여기 나오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피스티스 크리스투'입니다. 그런데 만약 피스티스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달리 번역한다면 이 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혹은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사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는 기존의 번역은 어색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쳤다고 읽힙니다. 마치 우리의 믿음이 시작인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성서에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는 단 한 분"(히브리서 12:2)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뜻에 신실하게 충성하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믿는 행위'가 먼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이 먼저입니다. 나의 믿음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순종하신 그의 신실하심에 힘입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순종'이 '믿음'보다 먼저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실 때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이 신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도피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자신의 의무에 성실하셨습니다. 그분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 즉 성만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주시며 십자가 위에서 찢길 자신의 몸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쏟아낼 그의 언약의 피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1:23-26). 사형장에 잡혀가는 날이면 우리는 초조하고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고 벌벌 떨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성실하셨습니다. 평소처럼 제자들을 섬기시고 정성을 다해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입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 즉 '그리스도의 충성,' '그리스도의 성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려 주시는 살과 피를 받아서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게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나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정성을 다해 헌신하는 신실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페스트로 봉쇄된 오랑시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페스트 증세가 심하게 드러났던 사람도 다음 날이면 열이 내리고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봄에 죽어 나갔던 쥐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폐쇄되었던 오랑시는 결국 다시 문을 엽니다. 기차와 선박들이 다시 드나들기 시작하고, 도시는 밤낮으로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엽니다. 하지만 이때 자원 보건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용감히 맞섰던 타루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또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페스트가 쥐들을 다시 깨우고, 그 쥐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로 보내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리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요. 오랑시의 페스트는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로 돌아와 온 지구를 뒤덮고 있습니다. '페스트'(pest)는 '과거'(past)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우리의 시간과 공존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카뮈에 의하면 어설프게 종교로 도피하지 말고,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신의 뜻이라고 강변하지 말고, 리외와 타루가 보여준 '성실과 연대'를 통해 재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실하지 않으시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새 태양이 뜨게 하시고 날마다 새 생명이 자라나게 하시며 정성을 다해 돌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습니다]"(시편 36:5).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는] 진멸되지 아니[할 것입니다]"(예레미야애가 3:22). 그렇습니다. 그의 인자하심(hesed)과 자비하심(hanan)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큽니다]"(예레미야애가 3:23). 우리는 날마다 주의 성실함 속에 눈을 감고, 주의 인자함 속에 눈을 뜹니다.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이 세계와 연대하시고 우리를 이 흉흉한 재난의 바다에서 건져 저 소망의 나라에 다다르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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